"여기까지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처음 겪어보는 수습 종료 통보.
이직 실패, 퇴사, 다시 쓰는 이력서.
어쩌다 보니, 너무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번엔 불가피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평가에 의한 종료."
초라한 결과에 당연히 멘붕이 올 거라 생각했다.
충격을 받아서 화가 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무덤덤했다.
오히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이제 대체 뭘 해야 하지?"
헤드헌터를 통해 몇 천만 원을 들여
모신 실리콘밸리 창업멤버 출신.
그의 이력은 누구보다 화려했고,
자신감이 회의실 문을 열기도 전에 뚫고 들어왔다.
그는, 작디 작은 나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직속 상사였다.
하지만, 나는 금방 그 회의실을 떠나야 했다.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기에.
결국 퇴사 2개월 만에 나는
또 다시 이력서를 꺼내들어야만 했다.
2025년이 된 지금, 만 35세가 되었다.
장사로 시작했고 커리어 전환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케터 중니어인 나는,
누구보다도 조급할 수 밖에 없었다.
"공백기 생기면 끝이다."
"이력서에 공백을 남기면 아무도 날 원하지 않을 거다."
이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안했다.
그랬기에 이 악물고, 무조건 버텨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보통 같았으면 패배감이 몰려왔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이상하게 달랐다.
두려움보다 해방감이 컸다.
아니, 그보단 그냥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상사를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내 경험으론 그를 만족시킬 수도, 이 환경을 바꿀 수도 없었다.
이전의 나는 주도적인 삶을 갈망했다.
모든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했다.
신중하게 결정한 포트폴리오는 분명, 어떤 회사에서도 나를 증명해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스타트업을 선택했고,
내 시간과 몸, 에너지를 200% 갈아 넣었다.
"이 모든 게 내 커리어에 남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전처럼 취업 하나만을 위해 달리고 싶지 않았다.
지난 공백기엔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만 같아서
카페 알바, 쿠팡 알바, 콘텐츠 알바 등 단기 알바를 하루도 빠짐없이 전전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웠지만, 막상 돌아보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내가 원했던 '주도적인 삶'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억울했다.
"왜 나만 이렇게 되는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억울함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진짜로 두려워했던 건 회사에서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직함과 회사 로고가 사라졌을 때
나 자신의 가치도 함께 없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주도적인 삶’을 꿈꾸면서도
사실은 회사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나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이번엔 다르게 실패를 접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실패한 마케터라는 이름으로
이 여정을 기록하기로 했다.
‘진짜 주도적인 삶’이라는 말이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철이 없네."
"그러니 망하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래도 나는 아직 덜 망했네."
라는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괜찮다.
중요한 건,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더 명확히 볼 수 있을 거란 믿음이니까.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라,
실패 끝에서 내가 붙잡은 작은 가능성들을 기록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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