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여권이 거절 당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유독 운수가 좋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주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밤새 충전해놓은 줄 알았던 휴대폰 배터리가 반절만 남아있는 걸 발견했다.
당황할 겨를도 없이 짐을 챙겨 택시를 탔다. 어쨌든 아침 비행기를 타려니 피곤했다. 한숨을 쉬었다. 택시 아저씨는 놀러가는 데 한숨을 쉰다고 나를 나무랐다.
팬더믹 이후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친한 언니와 함께 2024년 새해부터 대만 타이페이에 가기로 한 터. 숙소를 알아보고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택시투어까지 예매했다. 설렜다. 프리랜서로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여행 자체가 사치였지만, 그래도 없는 시간을 쪼개서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참이었다.
내 여권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출국 수속을 밟을 때였다.
알고보니 대만에 입국하려면 여권 만료일로부터 최소 6개월 이상의 기한이 남아있어야 했다. 내 여권 만료일은 5개월 뒤였다. 어차피 우기고 우겨서 한국에서 출국을 하더라도 타이페이 공항에서 입국을 거절당할 것이 불보듯 뻔했다. 항공사 직원은 난감해하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이때부터 진짜 모험의 시작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슈를 맞닥트리니 정신이 멍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기로 한 일행에게 일단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니 지인 입장에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동안 끊었던 전자담배를 다시 손에 들 정도로ㅎㅎ)
그렇게 철저히 대만 여행을 준비해놓고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빠뜨렸다 는 게 믿기지 않았다.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고 일단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가서도 오전에는 원격으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 차라리 그냥 여행을 포기할까 싶었다.
때로는 빨리 상황을 판단해 빠르게 포기하는 선택이 지혜로울 때도 있는 법이다. 매몰비용이 아깝다고 무어라도 더 해보려 했다간 매몰비용만 늘리고 빈 손만 남는 리스크가 존재하니까. 일행에겐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일단 집에 가서 쉬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권이 문제라는데, 아예 입국이 안 된다는데 어쩌겠나. 냉정하게 계산각이 나왔다.
근데 이 날은 유독 마음가짐이 달랐다.
그렇게 기대하고 기다렸던 여행길이 아니었던가. 여행을 가고싶어 했던, 일상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내 시간을 환기하려 했던 그 마음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이대로 쉽게 그 마음을 접어버리기에는 스스로 너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했다. 진짜 할 수 있는 플랜B, C까지 다 시도해본 후에 (설령 여행을 못 가도) 아쉬움을 남기지 말자고.
이때 ‘긴급여권’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대학생 때 스페인에서 여권을 잃어버려서(!) 프랑스 영사관에서 긴급여권을 임시로 발급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긴급여권 발급이 가능하다는 걸 검색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 인천국제공항, 혹은 근처 시청/구청에서 긴급여권 발급을 신청하면 최대한 그날 새로운 임시 여권이 나온다는 걸 발견했다.
첫번째 난관 : 나는 서울에 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서울 거주민이 아니었다. 긴급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충북도청 혹은 세종시로 가야 했다. 일단 여권사진을 빠르게 촬영하면서 충북도청에 방문해 긴급여권을 발급받기로 급하게 동선을 짰다. 다행히 이른 시간에도 여권사진을 20분 이내에 뽑아주는 사진관이 도청 근처에 있었다. 포샵 따위는 사치였다. 사진이 나오는대로 도청에 달려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딱 마침 그날 오전에 긴급여권 발급 신청서가 똑 떨어졌다. 현장에서 안내를 해주시는 자원봉사자분도 난감하다는 듯 손사래 쳤다. 긴급여권이 당장 필요하다면 세종시로 가보라는 안내를 받았다.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아… 그냥 역시 집에 있어야 하나.’ 어느 세월에 세종시에 갈지 까마득했다.
두번째 난관 : 점점 매진되는 당일 비행기표
이왕지사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집에 다시 돌아가서 캐리어를 챙긴 후 오송역으로 향했다. 가장 빨리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역에서 다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어차피 비행기를 타는 것이 목표라면 인천국제공항에서 긴급여권을 발급 받아 그날 (어떻게든) 타이페이행 비행기를 타면 그만이었다.
충청도에서 서울로, 다시 인천으로 와서 긴급여권이 나오길 기다리는 약 4시간 동안 솔직히 피가 말리긴 했다. 그날 대만 타이페이로 가는 비행기표는 빠르게 매진되고 있었다. 어차피 여권을 새로 발급 받아야 비행기표를 예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 달리 조치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와중에 휴대폰을 충전할 콘센트를 찾아 헤맸다.
세번째 난관 : 그래서 대만에 도착한 후에는?
긴급여권으로 타이페이에 입국할 경우 일반 대한민국 여권과는 대우가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긴급여권 소지자는 랜딩비자를 별도로 발급받아야 했다. 그걸 위해서는 대만 달러로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서 온라인으로 랜딩비자를 신청해야 한다고. 내가 겨우 예매한 비행기는 밤 11시에 대만에 당도할텐데, 그때 비자 발급 창구가 열려있을지 미지수였다.
온갖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으로 돌렸다. 공항 노숙은 디폴트였다.
결과적으로 대만 타이페이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밤에도 비자를 발급해주는 직원 한 분이 사무국에 상주하고 있었고, 무사히 비자를 받아서 야밤에 택시를 타고 타이페이에 입성했다. 새벽 1시에 숙소에 도착한 나를 보며 일행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일단 대만 맥주에 독특한 과일을 먹고 한숨 잤다. 약 18시간 만에 나는 청주에서 대만에 당도했다.
이렇게 난관(?)을 헤치며 어떻게든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하는 경험은 2024년 상반기 가장 기억에 남는 배움이 됐다. 결국 ‘실패를 무릅쓰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기피의 대상이라는 것, 그러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두려움을 안고서라도) 실패를 각오하며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나 또한 여러 세월의 겹을 걸쳐 또 다른 어른이 돼 있었다.
20대 때의 나는 유독 간절함을 피하고 싶어했다.
20대를 통틀어 10년의 시간이 내게는 덜 간절해도 살 만한 합의점을 찾는, 타협의 연속이었다. 너무 기뻐하거나 기대하지 않고, 그렇지만 하루하루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순간들로 채우면서 무사히 30대에 접어들었다. 간절함에 맞먹는 감정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늘 불가피한 실패와 나락을 예비해둔 채 살았다. 진짜 무릎이 꺾여 넘어졌을 때 너무 좌절하지 않을 채비를 해두는 식이었다.
무릎을 꺾고 빌어본 사람은 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는 걸. 내가 눈물 콧물 쏟아가며 빌고 매달려도 안 될 건 아니 된다는 걸.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기에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 용쓴다. 그러면서 체념을 학습하고 적응력을 키운다. 간절함을 멀리 한다.
어쩌다 보니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쓰디쓴 낙담을 맛보고 나니 내게는 일종의 '간절함 알러지'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간절함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다.
19살이었던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울며 기도했다. 아빠가 췌장암 말기라는 걸 알게 된 이후였다. 그 소식을 접한 후 우리 가족의 최대 난제는 내 입시도, 언니의 향후 커리어도 아닌 아빠의 건강 회복이었다.
물론 차도는 좋지 않았다. 당시 의사는 길어도 6개월을 버티지 못 할 것이라 선고했다. 그래도 아빠가 1년 넘게 우리 곁을 지켰다는 걸 감사해야 했을까. 인생의 말로와 기막힌 사연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바닥에 코를 박고 빌었지만 기도는 응답 받지 못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렀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모든 가족이 불현듯 눈을 떠 깨어났고, 머지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자동차에 몸을 싣고 가는 동안 나는 핸드폰으로 ‘장례식장’을 검색해 바로 예약할 수 있는 자리를 알아봤다. 장례식장에서도 음식을 나르고, 손님을 모두 받았다. 울음을 참았다. 스무 살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내가 감정적으로 간절하며 솔직했던 순간, 기도를 올리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감돈다.
자기연민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그렇게 엎드리고 있는 어린 나를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때의 간절함은 내 평생에 없었고, (큰 이변이 없다면) 앞으로도 흔치 않을 간절함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죽음은 벌어졌고, 간절함만이 홀로 남겨졌다. 쓸쓸함은 오래 남았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난 간절함을 피하며 살아왔다.
간절해지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망이 이뤄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슬픔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후로 입시에도, 학업에도, 취업이나 커리어에도 100% 간절해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무사히 버텨내는 근육이 생겼지만, 부작용도 남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거기에 간절함을 쏟고 싶은지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최선의 가성비를 따지는 식이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거기서 비롯되는 상실을 각오하는 일인데, 나는 상실이 아프고 두려워 사랑하길 마다하는 어른이 된 셈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20대 때의 내가 (아직 오지 않은) 상실의 아픔을 회피하기 급급할 때 그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됐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때로는 발에 단단히 발을 딛고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의 과도한 불안감을 묵묵히 지켜보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 버팀목이 돼줬다. 그와의 시간이 한 해, 두 해, 7년이 흐르면서 깨달았다.
그는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대상이 됐다. 너무 사랑하고 소중한 나머지 그가 없을 세상을 상상하면 (10때 내가 그러했듯이) 무릎을 꺾고 울며 빌 수 있을 것 같다. 열 번이고, 천 번이고 바닥에 엎드려 누구에게라도 애원할 것 같다. 타인을 나의 우주로 받아들이는 일은 이토록 가슴 아프다. 이래서 젊디 젊은 20대 시절에 나는 간절함으로부터 도망 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나 거대한 상실조차 기꺼이 받잡을 각오를 할 정도로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제는 차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간절히 바랐지만 그 소망이 묵살되는 일,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거절되는 경우, 그 끝에 실패와 상실과 낙오가 있을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자세라고 되뇌이곤 한다.
그러니 사랑은 내게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신념’과 같다.
우연히 무언가 마음에 들어서 호감이 싹트는 것과는 다른 결로 사랑이 존속한다고 본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상실할 것이고, 희망이 꺾이고 마음이 다치겠지만 그럼에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10년간 지금의 남편을 만나며 내가 가장 크게 배운, 변화한 지점이 바로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영화 <콘택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지구에 온 외계인의 언어를 분석하며 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외계어를 점차 이해하면서 그들의 시간 개념이 직선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걸 발견한다. 이 외계인들은 시작도, 끝도 모호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그 체계 안에서 시간을 ‘순환’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지금 공존하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 이런 식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 주인공은 기꺼이 미래의 그 시간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자신에게 너무나 사랑하는, 소중한 존재가 생겨나는 것을 기꺼이 수용한다. (설령 지금 내다본 미래의 시간 속에서) 그 아이가 죽게 되더라도, 그리하여 주인공이 피폐한 여생을 보내게 되더라도 적극적으로 사랑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동시에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로 결정한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사랑은 상실을 동반하는 결심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의 한 조각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는 것이 사랑의 위력이 아닐까. 심지어 그러한 태도가 사랑하는 대상에 그치지 않고 삶을 대하는 관점 전반으로 확장되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기꺼이 아파할 정도로 품이 넓고 마음이 깊은 사람이 되는 출발선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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