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말인즉슨, 내가 서울을 떠난지 3년이 넘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청주시에 살고 있다. 결혼을 하면서 서울서 여기로 거처를 옮겼다. 2021년 3월, 오미크론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나는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왔다. 남편이 될 사람의 거처로 내 몸과 조그마한 짐만 가져오는 일이라 이 자체는 거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는 결혼을 하는 것만큼, 그보다도 더 큰 의미가 ‘서울을 떠난다’는 결정에 담겨있었다.
나는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 없는, 찐 서울깍쟁이였다.
20대에 그렇게 여행 다니길 좋아해놓고도 결국 내가 오랜 기간 내 삶을 뿌리내려온 서울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해왔다. 그나마 집에서 멀리 오래 지내본 게 방학 때 3~4주간 대학교 동창회 업무를 도우러 인턴 아닌 인턴을 갔을 때였나. 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서울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제는 친정이 된) 온 가족이 한 동네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었다. 미취학 아동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까지 그 근처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서울 한 귀퉁이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다. 거길 벗어나는 상상 자체가 부재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느닷없는 항로로 나를 이끌었다.
(남편이 된) 당시 애인은 상경한 충청도 사내였다.
그는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상도에서 사당으로, 관악구로 유랑하듯 짐을 옮기며 여러 해 지냈다. 자취를 해본 적 없는 내게 그의 타지살이는 매번 낯설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집이 아닌 방을 기준으로 산다던데. 딱 내 애인이 그렇게 살았다.
불현듯 그는 이직을 결정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나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서울에 유학을 왔다가 낙향을 하면 다시 서울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경위를 이해했다. 친구들에게 서울은 어떻게든 동아줄을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삶의 조건 혹은 문턱이었다. 그에게도 그런 마음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일에 치여 살아가던 그에게 변화가 필요했다. 마침 학교 선배가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났으니 내려오라고 제안했다. 고민했다. 이제야 서울에 1.5룸 전세를 구했는데, 이만한 곳이라도 괜찮다면 결혼을 계획해볼까 했는데 다시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니. 그가 보수적으로 세워뒀던 여러 미래 계획이 송두리째 바뀔 게 뻔했다.
그렇게 2020년 4월 그가 서울을 떠나고 나만 서울에 남았다.
큰 동요는 없었다. 자주 보지 못해 아쉬울 것 같지만, 사실 같은 땅을 밟고도 각자 바빠서 자주 보지 못 했던 터였다. 다시 대학생 때처럼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어차피 일이 한창 바쁠 나이니 결혼은 후일로 도모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이사 가는 그를 배웅했다.
내가 그의 새로운 터전에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는 몇 주가 지난 2020년 5월이었다.
당시 나는 청주를 알아도 그 안에 어떤 지역과 동네가 있는지 무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거기로 내 몸을 옮겨 살아가리라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동네 이름을 듣고도 그저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고만 여겼다. 들어본 적 없는, 서울이 아닌 지역이니 버스로 갈 순 있을까 걱정했다. 내 빈곤한 상상력의 민낯이었다.
그렇게 고속버스에서 내린 그 동네는 충격을 안겨줬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신도시였던 것이다(!)
비록 아직 버스터미널이 크게 갖춰져 있진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즐비하게 펼쳐진 아파트 단지들이 나를 맞이했다. 사실상 내가 나고 자라온 서울 동네보다 훨씬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었다. 내리자마자 이 광경을 보며 어리둥절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변 인프라를 살피며 나는 내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주변에 산업단지와 공단, 대학 캠퍼스가 인접해있던 이 동네는 도시공원이 잘 조성돼 있었다. 대형마트가 근처에 떡하니 자리 잡았고, 스타벅스가 이미 2개 이상 개업한 신도시였다. 땅을 넓게 쓴다는 것, 인구 밀도가 비교적 적다는 것 외에는 훨씬 살기 좋은 동네였다.
그 동네 최고 맛집이라는 카레집에서 점심을 먹고 푸르른 공원을 산책하면서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 한 변수를 깨달았다.
스스로 의아했다. 왜 단 한 번도 서울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사는 나 자신을 떠올려 본 적이 없는지, 내가 들어보지 못한 지명이라서 해서 자연스럽게 ‘아파트가 이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고 상정했는지, 이렇게 젊은 부부와 애/개가 많이 살아가면서 통계적으로 인구가 늘고 있는 동네를 ‘서울이 아니다’는 이유로 순수하게 외면했던 건 아닌지.
이렇게 세계관이 깨지는 경험은 나의 관점을 재구성하는 기회로 이어졌다.
내가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살지 못 할 장벽이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최우선순위로 정의했을 때 삶의 방식과 구성 요소를 재배치해 볼 순 없는지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어쩌면 내 사고방식이 바뀌는 이 찰나가 나를 변화시키는 흔치 않은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결혼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해 8월에 식장을 미리 예약하고, 가을에는 ‘스드메’를 정해서 추운 12월에 웨딩 촬영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식장에 49명 밖에 들어올 수 없었던, 모두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어야 했던 (어찌보면) 최악의 타이밍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서울을 떠나는 의사결정’은 일사천리로 실행에 옮겨졌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의문이 들 것 같다. ‘좋은 동네인가 보다’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는 사소한 순간에 지나치게 과몰입(?)해 의미 부여를 한 게 아닌지 반문해볼 수 있다.
그랬다면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사는 결정은 아직까지 유지하진 못 했으리라 짐작한다. 아무리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해도 종종 서울을 오가며 리모트워크를 하는 삶이 결코 쉽지도, 순탄하지도 않았으니까. (현재진행형 고민이고)
달리 말하자면, 나의 거처를 옮기면서 내가 살아가는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전복시켜버린 맥락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크게 3가지로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나다움’은 어디까지 바뀔 수 있을까
사람은 저마다 특유의 의문을 품고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내 외모? 부모님께 상당 부분 물려받는다. 나의 기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내가 재능을 발휘하는 영역마저 부모님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 나의 의사결정 또한 내게 주어진 유전과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더 크게 보면, 내가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것부터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조차 21세기, 한국, 서울, 여성 등 온갖 외부 요소를 철저히 따라간다.
(어렸을 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게 너무 이상했다.
나는 ‘나’라고 존재하고 지칭되지만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다움’에 실상 나의 지분은 얼마나 있나 싶었다. 다 그렇고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문제가 도대체 흐린 눈으로 넘어갈 수 없는 사안으로 보였다. 적어도 나에게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같았다.
한편으론 이게 잔잔한 두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매일 그렇진 않겠지만)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나’를 탐구하고 추구하지 않는 이상 나는 그저 나를 둘러싼 세상 속에서 내가 보는 만큼, 아는 만큼만 상상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아예 못 보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야말로 사는대로 생각하며 ‘보지 못 했다’는 것조차 모른 채 흘러갈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내가 서울을 벗어날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것,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동네는 낙후했을 것이라는 의식의 흐름에 지배됐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이를 인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동안의 내가 결코 하지 않았을 변칙을 내 인생에 더함으로써 나의 보금자리를, 일과 삶의 방식을 내가 선택해 변화해보는 값진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2.나의 경향성에 따라 서울을 벗어나자
물론 억지로 나 자신과 반대되는 시도를 하는 건 현명한 도전이 아니라 무모한 방종일 수 있다.
돌연변이 중 다수는 결국 환경에 적응하지 못 해 살아남지 못 한다. 살아남는 돌연변이는 보통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아 정착하거나 기존 우세종에서 아주 조금의 차이를 만들며 종의 분기를 만든다. ‘아주 약간’ 틀어지는 일이다.
그러니 ‘서울을 떠나서 여기서 살아볼까?’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을 때 이 모험이 내게 맞는 옷이 되는 맥락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 맥락을 그동안 나의 커리어와 일하는 모양새를 통해 발견했다. 나는 7~8년간 4~5개 회사를 다니면서 내게 맞는 환경과 맞지 않는 환경에 대한 데이터를 쌓은 상태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보다 급진적인 리모트워크’는 시도해봄 직한 선택지였다.
여러 경험 데이터로 미뤄 짐작했을 때 나는 반드시 오프라인 출퇴근을 해야만 할 때 가장 힘들어했다.
'반드시 사무실에 출근해야 한다’는 조항은 여러 함의를 갖고 있다. 상사가 보는 눈 앞에서 일해야 한다는 것, 말투에 대한 지적을 받는 것, 보수적인 조직에 최적화되는 것 등등. 사무실 출퇴근이라는 상징은 내게 맞지 않은 옷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면 보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더 오래 복무했다. 상사를 포함한 타인이 무언가 먼저 지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목표를 세워 이리저리 방법을 강구해내곤 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건 매우 고되고 외로운 과정이었지만, 굳이 힘듦을 정해야 한다는 나는 이걸 고를 것이라는 게 명백했다.
게다가 나의 우유부단함을 보강하기 위해서라도 물리적인 제약을 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내가 창업 팀에서 나와 백수가 됐을 때 극도의 불안을 마주했다. 당장 사회에서 낙오될 것 같으니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잡아 무슨 일이라고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었다. 그래서 내게 들어오는 제안을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며 얼른 일을 빨리 재개하기 위해 디테일을 무시했다.
그러나 나의 경향성을 고려했을 때 무턱대고 아무 일이나 받았다가는 금방 탈이 날 게 명약관화였다. 그러니 ‘리모트워크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서 내가 내 우선순위와 최적의 패턴을 잊지 않도록 제동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봤었다.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오퍼를 받아도 원격근무가 불가하다면 고사할 수 있는, 명료한 기준이 필요했다.
서울을 떠나는 결정은 그래서 과격하면서도(?!) 이상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원격근무가 과거보다 한국에 많이 알려진 시점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나 자신을 시험하면서 아예 새로운/나에게 잘 맞는 일과 삶의 방식을 재구축할 좋은 실험이었다. 이러한 트리거 없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터. 결혼은 강력한 계기가 돼 줬다.
3.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얼마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서도 서울을 떠나보고 싶었다.
방금 ‘리모트워크라는 제약 조건’이라고 말해놓고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리모트워크라는 조건을 달아서 내가 살아가는 형태를 재구성하면서 나는 공간과 시간의 물리적인 한계를 완화하는 방향을 지향하고 싶었다.
기술은 항상 인간의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발전한다.
인간의 두 다리가 갈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자전거를, 자동차를, KTX를, 비행기를 발명했다. 각종 메모, 캘린더 앱은 두뇌 용량을 보완하는 ‘제2의 두뇌’라고 불린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다 처리할 수 없는 데이터를 소화해내는 확장성을 가리키고 있다.
오죽하면 스티브 잡스는 90년대 인터뷰에서 컴퓨터가 ‘마음의 자전거’라고 표현했다.
이때 마음은 인지 능력 및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해당 인터뷰에서 스티브 잡스는 언젠가 사람들이 인터넷과 컴퓨터를 통해 (서로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전자 조직을 만들어 함께 일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독수리보다도 기동력이 약하지만 자전거를 타는 순간 무시무시한 기동력을 발휘한다. 기술 발전은 (비록 양면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행착오의 역사와 맞물린다. 한양 도성에 오기 위해 며칠씩 말을 타고 와야 했던 시간, 공간의 시대에서 화상으로, 온라인으로 어디서든 간접적으로 대면하는 시대로 전이했다.
이러한 가설 위에 서서 나는 부모님이 알지 못 했던, 보지 못 했던, 상상하지 못 했거나 실제로 시도해볼 수 없었던 삶의 모습을 건드려볼 수 있다고 짐작했다. 서울을 떠나 살면서도 다양한 사람과 온라인을 통해 일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스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오히려 늦기 전에 기꺼이 도전해볼 만한 사안이었다.
(이렇게 장황한 설명이라니!)
아무튼 이러한 내 나름의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서울을 떠나 지금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아직까지는 위 맥락과 가설이 내 몸에 꼭 맞는 신발로 느껴진다. 혹은 적극적으로 내가 추구할 만한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며 나 자신에게 변화를 줄 수 있는, 더 없이 감사한 기회를 얻었다. 올해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좌충우돌로 살아갈지 기대된다. 적어도 나다움에서 나의 비중을 늘려가는 방향으로, 건강한 향상심을 간직하며 내게 허락된 시간을 성의껏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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