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러스 인터뷰

행정학과 → 창업, 베스트셀러 작가로… 맨땅 헤딩하며 겪은 솔직한 시행착오들

20년 넘게 살던 고향 떠나 기꺼이 방황할 수 있었던 '선택의 순간들'

2024.09.05 | 조회 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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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러스 다이어리

스텔러스 창업자|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인트로 : 익숙한 곳을 벗어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며칠 전부터 제 화면에는 영상 하나가 자주 보였습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예고편이었죠.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실사화한 작품이었습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댓글창을 열었습니다. 한국이 자신과 맞지 않아서 뉴질랜드로 떠난 주인공의 이야기를 두고 누군가 분명 “ㅇㅇ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핀잔을 주지 않았을까, 내심 짐작했습니다. 

허나 댓글창은 의외로 차분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가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댓글과 함께 한국을 떠난 각지의 이민자들이 한국을 떠난 이후, 힘겨운 이민 생활, 그럼에도 자기 삶을 변화시킨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헬조선’이라는 유행어가 생긴지 어언 10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체감했습니다. 30년 가까이 한 동네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던 저에겐 참 고무적인 변화입니다.   

 

출처 : 스텔러스 다이어리
출처 : 스텔러스 다이어리

 

가족을,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없다지만 

이후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능동적인 선택이든, 수동적인 받아들임이든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각자의 ‘방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설령 무언가 싫어서 한 선택이라도 그것은 방향을 설정하는 의사결정의 과정에 포함됩니다. 강력한 ‘동인’(움직임의 이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본인이 익숙한 곳, 능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결정은 어떨까요?

거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관성과 타성은 은근 힘이 세거든요. 동인이 더 세지지 않고선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근 10년간 그 용기를 내어 한국을 떠난 사람이 늘어난 까닭에 이제는 그 용기의 의미를, 사정을 아는 사람들도 늘어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렇게 큰 용기를 내 살아온 사람입니다. 용기를 내 고향을 벗어나 서울로 갔고, 용기를 내 전혀 상상하지 못 했던 삶의 궤적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본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출처 : 김중철
출처 : 김중철

 

EO라는 미디어 회사에서 교육 사업을 총괄하는 중철 님은 불과 10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어른으로 성장한 케이스입니다. 행정학과에 입학했지만 벤처 창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3잡도 불사했습니다. 자신이 5년 뒤, 10년 뒤에도 가슴 뛰며 설레는 ‘방향’을 찾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큰 동인, 큰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움직였을까요?

그는 어떤 의사결정을 거쳐서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았을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서 큰 용기를 낸 중철 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삶의 변곡점과 의사결정을 고민하는 독자님들께도 큰 영감과 용기,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아티클 한 눈에 읽기]

  1. 꿈도, 목표도 없던 나를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
  2. 행정학과 대학생이 ‘창업’을 선택한 계기와 과정
  3. “집 없이 소파에서 자도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4. 서울서 3잡 뛰고 공부하면서 책 저자가 되기까지
  5. “제가 가려는 방향에 1도라도 가까운 게 중요하죠.”
  6. 아웃트로 : 결핍은 방향이 되고, 어려움은 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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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목표도 없던 나를 바꾼 ‘결정적인 전환점’ 

 

Q. 중철님,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EO라는 회사에서 교육 사업 및 이오플래닛이라는 플랫폼을 총괄하는 김중철입니다. 스스로 ‘스타트업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Q. 본인을 따로 정의하셨다니 흥미롭네요. 왜 그렇게 정의하셨을까요?

스타트업 생태계가 좋고, 이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창업이나 스타트업의 일에 대해 연구하고 그걸 쉽게 알리는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제가 맡은 사업이나 만드는 제품(프로덕트)이 제가 좋아하는 이 방향성에 잘 맞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 이 생태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Q. 원래부터 ‘스타트업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는 게 꿈이셨나요? 

아니요. 저는 김해 주촌이라는 곳에서 나고 자랐어요. 마당을 중심으로 한 디귿자 모양의 집에서 두 가구가 같이 사는, 그런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저한테 ‘공부하라’고 권하는 어른들이 주변에 없었어요. 제 친척까지 통틀어서 제가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이었죠.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크게 고민하거나 압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Q. 지금과는 사뭇 다르셨으리라 짐작이 가네요. 

그쵸. 애초에 대학 진학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적당히 성적에 맞춰 결정했어요. 대학에 들어간 이후 그 다음 스텝이 무엇인지도 몰랐고요. 행정학과에 입학했으니 주변에서 공무원 준비를 많이 했고, 아마도 내 미래도 그렇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군대 다녀와서 학회장을 맡으면서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긴 했습니다. 사실상 그 전까지는 ‘제 삶에 자발적인 배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중철 님, 출처 : 김중철
어린 시절 중철 님, 출처 : 김중철

 

Q. 흘러가듯 살아왔던 셈이네요. 그렇다면 변화의 계기가 있었을 듯합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한 특강을 들으면서 찾아왔어요. 

학기 중에 300명이 모이는, 무조건 들어야 하는 특강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연사분이 오신다는 것만 전해 듣곤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특강 연사로는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독특한 직함을 가진 이준용 대표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분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으로 ‘가슴 뛴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당시 대표님은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익혀서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직접 만들었다고 설명해주셨어요. 그 직함을 명함에 새겨서 수백억 대 계약을 수주하고 세일즈를 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죠. 본인 직업을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접했던 순간이었어요. 

그래서였을까요. 특강 때 저도 모르게 손을 들고 질문했어요. ‘어떻게 하면 당신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물어봤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이 설렜거든요. 마침 부산에서 프레젠테이션 관련 교육을 진행하신다고 알려주셔서, 그때부터 격주로 부산에 가서 PPT 만드는 법, 발표하는 법을 배웠어요. 

제 입장에서는 난생 처음 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자발적으로 제가 익숙한 곳을 벗어나는 일이었어요. 스스로 ‘나는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가 될 거야’라는 꿈도 생겼고요. 

나중에는 부산 교육이 모두 종료되고 서울에서만 교육이 이뤄졌는데, 덩달아 저도 직접 서울까지 찾아가서 교육을 듣기 시작했어요. 그만큼 배움이 즐거웠고, 무언가 해보고 싶어졌던 큰 변화였습니다. 

 

Q. 와… 인생이 달라지는 전환점이었네요. 김해에서 부산을 거쳐 서울까지, 공간을 넘나들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서울에 제 발로 찾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내가 너무 작은 세상에서 살았구나’였어요. 서울에 오니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면 손만 뻗으면 되더라고요. 그만큼 기회가 많은 공간을 처음 경험하면서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아요. 

(김해에서 부산으로, 서울로 활동 무대를 확장하면서) 이제 막 24살이 되는 시점에 시야가 트이고 나름대로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행정학과 대학생이 ‘창업’을 선택한 계기와 과정

 

Q. 이후 코파운더로 초기에 스타트업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어요. 이 또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 줄 알다 보니 대학 내 마케팅 동아리에서 주로 활동했어요. 거기 외에는 프레젠테이션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동아리에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형을 만나 처음으로 ‘창업’이 무엇인지 접할 수 있었어요. 

(지금 보기엔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지만) 당시 형은 ‘우주정거장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우리가 우주정거장을 만들어 저 멀리 우주로 진출하는 꿈을 꿔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봤는데,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완전히 새로운 직업에 대해 접했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어요. 주변에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 보니 저에겐 희소한 경험이었고, 그때부터 나름대로 우주로 향하기 위해 우리가 세부적으로, 단계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Q. 우주정거장…!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단계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당시에 생각하셨나요? 

곧바로 우주정거장을 만들겠다고 나설 수는 없으니 일단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축적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러기 위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창업 아이템을 다양하게 시도하면서 차차 사업이 전개됐죠. 

벤처나 스타트업이 뭔지, 창업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2년 가량 여기에 올인했어요. 대학 내 창업 지원 공간에서 거의 먹고 살다시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Q. 부모님 입장에서는 걱정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실제로 집에서는 ‘그거 꼭 해야 하느냐’고 (어찌보면 처음으로) 압박이 들어왔어요. 공부를 안 하니 학점은 영 시원찮게 나오고, 외박을 불사하고 돈을 써가면서 창업에 매달렸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제 나름대로 협상(?!)을 했어요.

‘학교 공부를 하면서 창업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대학생 시절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대학생 시절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실제로 그렇게 엄포를 놓고나서 학교 공부에도 매진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학점 4.3으로 같은 학년에서 전체 3등이 됐어요. 소액 장학금도 받게 됐고. 덕분에 부모님께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어요. 

‘한다면 할 수 있는 아들이니 믿고 맡겨달라.’

한 번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얻으니 그 이후로는 좀 더 창업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이후 4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하고 창업에 올인했답니다. 

 

Q. 유독 창업에 매료되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때까지 누구도 ‘방향’을 제시해준 적이 없었어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처음으로 제게 방향을 제시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던 것 같아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롤모델을 발견했던 것처럼 ‘자아실현’을 하는 방식으로서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길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창업이 저에겐 가슴 뛰는 일이었어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택 중에서 나라는 사람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저에게 설렘을 준) 누군가의 삶을 추종해보면 어떨까 했어요. 그러한 ‘방향’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귀인이니까요. 그렇게 환경과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키면서 실제로 제 삶도 진짜로 많이 변화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집 없이 소파에서 잠자도 행복했어요” 왜냐하면…

 

Q. 이십대에 삶을 바꾸는 변곡점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셨나요? 

간절하게 일했어요. 대표 역할을 맡은 형과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매일 일 얘기 밖에 안 했어요. 다행히 사업이 잘 풀리면서 사업 확장의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서울에 가는 게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죠. 

형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았을 듯해요. 아무래도 팀 전체를 이끌고 서울에 자리잡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제가 나서서 ‘서울에 가야 할 타이밍’이라고 설득했어요. 제 눈에 서울은 기회의 땅이었으니까요. 꼭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Q. 당시에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간략하게 설명해드리자면 ‘와이파이에 광고를 얹는 비즈니스’였어요. 와이파이에 펌웨어를 얹는 기술을 개발해서 사람들이 와이파이에 접속하면 첫 웹페이지에 광고가 뜨게끔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어요. 

 

Q. 스타벅스 와이파이에 접속하면 스타벅스 페이지가 뜨는 것과 비슷하군요.

맞아요. 다만 스타벅스의 경우 자기 채널로만 접속자를 유입시킬 수 있다면 당시 저희 서비스는 슬라이드, 동영상 광고 등을 다양하게 배치해서 와이파이에 접속한 사람들이 각 광고를 클릭해 다양하게 유입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어요. 할리스 직영점 전반에 서비스를 공급할 정도로 사업 자체는 번창했습니다. 

 

코파운더로 초기 창업 팀에 합류했던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코파운더로 초기 창업 팀에 합류했던 중철 님의 모습, 출처 : 김중철

 

Q. 서울살이는 어떠셨나요?

그때 저랑 형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서울로 향했어요. 처음에는 집이 없었고, 그나마 고객사에서 책상 2개와 소파를 빌려줬어요. 거기에 회사 짐을 모두 옮기고서 소파에서 자면서 사업을 이어갔어요. 그러면서 서울 거처를 알아봤어요. 

일주일쯤 그렇게 지내니까 고객사에서 나중에는 면세점 내 호텔을 숙소로 제공해주셨어요. 덕분에 호텔에서 1달 가량 머물다가 서울 집을 구했어요. 본격적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죠.  

 

Q. 꽤 오래 거처가 없었네요. 사업이 잘 되는 것과 별개로 막막함도 컸을 듯합니다. 

의외로 그때는 저희 나름대로 희망이 넘치고 되게 행복했어요. 조그마한 세상에서 살다가 서울이라는 큰 세상으로 왔다는 자체가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제가 살고 싶은 곳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어떻게든) 치열한 과정에 저를 던져놓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Q. 내 삶에 방향성이 생겼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철 님께 크나큰 동기부여가 된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창업을 그만두게 됐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회사가 투자를 받기 전까지 저는 분기마다 50만원을 받으며 일하곤 했어요. 나중에 투자 유치를 하고나서 월 130만원을 받았고요. 아무래도 직장을 다녀본 경험이 없어서 돈에 대한 뚜렷한 감각이 없었고, 무엇보다 ‘회사가 커지면 나도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어요. 어쩌면 ‘그냥 열심히 살 수 있는 무언가’가 간절해서 돈을 내다시피 하면서 살았던 셈이죠. 

헌데 투자를 받은 후에도 투자자로부터 ‘쓰는 돈을 더 줄여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어요. 제 입장에서는 월세부터 보험료까지 스스로 벌면서 제가 저를 책임져야 하는데, 월급을 더 줄일 순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네가 그동안 한 게 뭐냐’는 말을 듣게 됐어요. 2년간 올인하면서 그 시절 편의점 주간 아르바이트 연봉(약 1800만원)보다 적게 받았는데, 제 입장에선 그 시간을 부정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죠. 

결국 저는 그날로 퇴사를 결정했어요. 좀 더 지혜롭게 대화로 풀어갔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우리 모두 서른 살도 안 된 시점이었어요. 결국 제가 퇴사하고서 개발자 친구도 대표 형과 멀어지면서 퇴사했고, 잘 나가던 사업도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시장 진출이 코앞이었는데 그간의 노력도, 급여도 0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죠. 

 

 

서울서 3잡 뛰면서 공부하고서 책의 저자가 되기까지

 

Q. 저런… 함께 창업한 회사를 퇴사하고서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서울에서 함께 숙식도 했는데 다시 거처를 옮겨야 했겠어요. 

일단 집을 새로 구하면서 투자사에서 잠깐 일했어요. 한 6개월간 백화점 엘리베이터 LED, LCD 광고판을 교체하거나 수리하는 일을 했어요. 대체로 백화점 영업이 종료된 후에 업무를 했기 때문에 늦게 퇴근하면 새벽 1시였어요. 야간 업무나 새벽 업무가 많았죠.

하지만 매일 2~3시간 무조건 ‘공부’를 했어요. 마케팅이든, 디자인이든, 개발이든 제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계속 공부했어요. 서울에서 지낼 수 있는 6개월을 절대로, 절대로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어요. 막상 돈이 없어서 무료 유튜브 영상이나 1만원짜리 맛보기 강의를 찾아 듣는 한이 있어도 매일 간절하게 배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Q. 또다시 ‘간절함’이 발휘되는 순간이네요. 새로운 방향성을 찾으셨을까요?

다양한 공부를 해본 끝에 마케팅으로 새출발을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아는 형이 운영하는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주 2일 근무하면서 쿠팡 야간 아르바이트, 발레 파킹을 병행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어머니께서 사기를 당하셔서 법적 이슈를 제가 해결해야 했어요. 평일엔 경찰서와 변호사 사무실을 오가며 3잡을 뛰는 식으로 일했답니다. 

 

Q. 참 쉽지 않은 시기였네요. 

한 1년간 그렇게 지냈어요. 

 

서울에서 쓰리잡을 병행하며 일하던 중철 님 모습, 출처 : 김중철
서울에서 쓰리잡을 병행하며 일하던 중철 님 모습, 출처 : 김중철

 

Q. 마케팅에 관한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마음을 정하셨는데, 요건 어떻게 시도하셨을까요?

1년간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카드뉴스 제작으로 시작해 네이버 검색 광고 효율화 작업 등을 추가로 제안했어요. 점점 마케팅 상품이 늘어나면서 회사가 성장했죠. (주중에 따로 유동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는 조건 하에) 제가 그 회사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하는 첫 번째 정직원이 됐습니다. 

 

Q. 이후에 마케팅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셨다고 들었어요.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 성장하기까지 여정도 궁금하네요. 

서울에 남아 공부하면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를 열심히 찾아다녔어요. 결국 제 결핍은 양질의 교육과 인프라에서 기인한다고 봤거든요. 제가 나고 자란 곳에는 제게 동력을 제공하는 교육의 기회, 인적 네트워크가 부재했어요. 반대로 서울에서는 어떻게든 더 많이 보고 배우려고,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고 동분서주했던 것 같아요.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와 함께 ‘개기디마셔’라는 IT 커뮤니티를 만들었어요. 

 

Q. 아예 커뮤니티를 만드셨던 것이군요!

맞아요. 이후 그 친구가 디자이너에서 마케팅으로 포지션을 전환하면서 ‘마케팅에 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고, 마케팅 강의를 열어보기로 의기투합 했어요. 커뮤니티 내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3시간씩 5주간 총 15시간 교육을 진행했어요. 

이 경험을 살려서 마케터 포지션으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됐고, (뒤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더존ICT그룹에 마케팅 전략 포지션으로 입사해 서비스 기획자까지 병행하게 됐고요. 덕분에 (마케터가 된) 디자이너 친구와 함께 <오늘도 개발자가 안 된다고 말했다>라는 책까지 집필했습니다. 여러모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습니다.    

 

출처 : 디지털북스
출처 : 디지털북스

 

“제가 가려는 방향에 1도라도 가까운 게 중요하죠.”

 

Q. 나의 결핍에서 출발해 결국 책을 쓸 정도로 성장하셨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사실 마케팅을 열심히 배운 것도 다시 창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어요. 마케팅은 수단이고, ‘기업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방향성에는 변함이 없었어요. 저에게는 그게 자아실현의 가장 큰 뼈대였고, 내가 가고자 하는 그 방향으로 1도라도 가까워지기 위한 의사결정을 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Q. 이후 그 방향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어떤 의사결정을 하셨을까요?

감사하게도 더존ICT그룹에서 ‘마케팅 하는 서비스 기획자’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좋은 제품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판매하는 것이 마케팅의 본질이라면 '마케팅'으로만 제 역할을 한정 짓는게 아니라 좋은 제품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데 기여하고 싶었어요.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드는 방향으로 제 저변을 넓혀야 그 다음 단계의 배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 중철 님의 방향성이 일관되고 뚜렷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는 EO에 합류해 한국 시장을 위한 제품을 기획, 개발, 마케팅을 하는 포지션을 맡게 됐어요. 

EO는 기업가정신에 주목해 자기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창업가들에 대한 콘텐츠를 만드는 미디어 회사인데요. ‘자체 채널’을 만들고 싶다는 니즈가 강했고, 이를 ‘커뮤니티 플랫폼’으로 풀고 싶어했어요. 

저 또한 커뮤니티에 대한 갈급함이 컸던 사람으로서 (창업가들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도전이라고 느꼈어요. 이를 ‘이오스쿨’이라는 교육 사업을 통해 창업가의 커뮤니티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어요.

 

Q. 다양한 아이디어 중에서 왜 ‘이오스쿨’을 택하셨을까요?

커뮤니티 서비스에서 양질의 커뮤니티 참여자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는 봤고, 교육이 양질의 커뮤니티 참여자를 모객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가설이 있었어요. 

실제로 1기 교육 수강생을 모집했을 때 300명 이상이 지원했고, 그 중 100명을 선발해 교육을 진행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창업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의 커뮤니티에 들어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었어요. 

 

Q. 결과적으로 교육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셨나요?

커뮤니티를 만들진 못 했어요. 1년 가까이 커뮤니티 플랫폼을 만드는 데 난항을 겪었어요. 대신에 ‘교육 사업’ 자체에 집중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Q. 오! 어떻게 방향성을 바꾸셨을까요? 

초반에는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창업 교육을 기획하고 운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전과정을 저 혼자 소화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점차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고, 아예 이 교육 서비스에 집중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 과정에서 깨달은 바가 컸어요. 

때로는 제가 잘하는 무언가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현재 일하고 있던 EO 팀원들과의 사진, 출처 : 김중철
현재 일하고 있던 EO 팀원들과의 사진, 출처 : 김중철

 

이전까지 제가 했던 건 마케팅과 서비스 기획이었는데, 사실 교육 서비스에서 중요한 건 ‘깨달음을 얻고 변화하는 것, 그 자체’에요. 그게 콘텐츠 만족도로 연결되죠. 고객이 교육 콘텐츠와 전반적인 경험을 구매한다는 게 이 업의 본질이더라고요. 여기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프로덕트 개발이나 마케팅을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결국 고객이 가치를 느끼고 만족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제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걸 잘해’ 식의 공급자 중심의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제가 직접 교육 커리큘럼을 기획하거나 구상하고, 교육 상품을 세일즈하면서 고객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 자신을 한 단계 변화시키는 중요한 의사결정이었어요. 

 

Q. 내가 그동안 해오던 방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 ‘중철 님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중철 님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가까워지는 일이라서? 

창업교육 서비스 자체가 회사에서 새로 시도하는 신사업이었기 때문에 고객의 니즈부터 발굴해야 했다는 점에서 저에겐 0에서 1을 만드는 과정이었어요. 또한 이 서비스가 ‘스타트업의 시작부터 성공으로 향하는 창업 전반의 여정을 돕는다'는 점에서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제가 하는 일에 회의적인 시각도 충분히 알고 있어요. 

“창업을 직접 해봐야지, 교육으로 접하는 건 한계가 있다” "너희 같은 교육 서비스, 흔하지”

하지만 이런 회의론에 크게 흔들리지 않아요. 제 나름의 확신이 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던 김해 촌놈으로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에게는 양질의 교육과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결정적이었어요. 그걸 통해 제가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분명 저 같은 결핍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가 하는 일이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Q. 그러게요. 과거 중철 님이 겪은 결핍이 지금은 중철님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시간을 쓰고 싶으신가요?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오스쿨은 앞으로 5년 뒤, 10년 뒤에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제가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처음 접하면서 삶의 궤적이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이처럼 한 사람이라도 자기주도적으로, 본인이 옳다고 느끼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 “접근성”의 문제가 있어요. 이걸 해결하는 데 제 시간을 쓰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지금은 '창업과 스타트업'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지만, 점차 어린 나이의 청소년을 위한 기업가정신 교육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제 삶을 바꾼 건 ‘공부하라’는 잔소리 보다 “배워야 하는 이유”였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실행할 수 있는 청소년들이 많아지길 바라요.

이 과정에서 제가 좋아하는, 본능에 가까운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 강점과 약점을 모두 이해해야 하고, 더 큰 영향력(임팩트)를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할지 제 나름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좀 더 낫다고 믿는 삶, 제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 가까워지는 의사결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출처 : 김중철
출처 : 김중철

 

아웃트로 : 결핍은 방향이 되고, 어려움은 배움이 된다

대화를 마칠 때쯤 중철 님은 의사결정을 위한 3가지 질문을 언급했습니다.

  1. 어려운 의사결정인가
  2.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의사결정인가
  3. 내가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타인을 위한 의사결정인가

(이러한 기준에 따라) 때로는 어려운 도전일지라도 많이 배울 수 있는 의사결정에 기꺼이 임하려 한다는 게 중철 님의 원칙이었어요. 관성과 타성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에 1도라도 가까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 위 질문들이 동기부여의 원천인 셈입니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타인을 위한 결정인가. 흥미롭게도 이 질문은 중철 님의 결핍에서 비롯됐습니다. 과거의 나에게 필요했지만 쉽사리 누릴 수 없었던 무언가를 지금의 누군가에게 기꺼이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죠. 과거의 결핍이 결핍으로만 남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지금의 나에게 방향을, 목적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나름의 동기를 발견했을 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어려움을 피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할 줄 아는 것, 잘 하는 테두리 안에서 의사결정을 하면서 ‘지금의 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철 님은 ‘때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내가 잘하는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라는 거죠. 그래서 (방향의 결이 같다면) 어렵더라도 뚫고 나가는 정면돌파를 택할 수 있습니다. 결핍이 방향에 대한 힌트를 줄 때 고난은 배움의 과정이 됩니다. 장애물, 도전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본인에게 무엇인지 상기시켜 줍니다.  

여러분은 중철 님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동력은 무엇이고, 지금 그 방향에 가까운 의사결정을 하고 계신가요?

개인적으로 “내 본능에 가까운 결정”이 무엇인지 떠올리면서 이번 글을 마치려 합니다. 나답게, 그러면서도 지금 나에게 없는 내 모습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문구 같아서요. 여러분도 삶의 전환기에 기준이 되는 질문을 얻으셨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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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스텔러스(Stellers)|Fo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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