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주인공이 아닌 조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같다.
학생 때만 해도 내가 주인공이라고, 적어도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여긴다. 그러다가 세계관이 차츰 확장하면서 사실 내가 이 영화의 메인 캐릭터가 아니라 호텔 문을 지키는 벨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상이라는 무대의 가장자리에 서는 데 익숙해진다.
그렇다 보니 점차 자기 인생에 관심이 줄어들기도 한다. 오늘도 출근해 남이 시킨 일을 열심히 하고, 녹초가 된 몸으로 퇴근하는 식으로 하루가 지나간다. 내 인생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달라질 게 없다고 짐작하며 ‘나’가 아니라 ‘나의 역할’에 매진한다. 피고용인으로, 엄마나 아빠로, 자식으로, 타인의 조연으로.
허나 조연도 자신만의 설정과 드라마를 갖고 있다. 뛰어난 각본을 쓰는 작가, 생생한 게임을 기획하는 제작자들은 안다. NPC(논 플레이어 캐릭터)조차 나름의 서사를 쓴다. (그래야지만 스토리와 스토리가 연결돼 있는 전체 스토리, 세계관이 입체감을 얻는다.) 저마다 지금의 모습에 이른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러니 본인이 조연일 수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나의 설정과 드라마’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충분히 (시시한 어른으로서도) “나만의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번 글은 잃어버렸던 '나의 이야기'를 되찾는 관점과 방법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 글 말미에서 “나만의 성장 스토리” 쓰기 템플릿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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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적 사고
최근 배우 천우희 씨의 유퀴즈 인터뷰를 흥미롭게 봤다. 그는 오랜 기간 배우 오디션에 낙방하는 고배를 마셨다. 그의 얼굴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리 120% 최선을 다해 오디션을 준비해도 자신의 타고난 외모로 거듭 거절 당하는 심정은 오죽하랴. 하지만 그는 자신과 상황을 탓하며 낙담만 하진 않았다.
당시만 해도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조연이 될 기회조차 없는 무명이었다. 하지만 ‘우희적 사고’는 자신이 나만의 서사 속 주인공이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기 때문에 오디션 탈락은 영원한 실패가 아니라 주인공에게 오는 시련이었다. ‘고난은 주인공을 성장시킨다’는 마인드셋이 그가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불안과 권태 모두 적절히 조절하는 데 '나만의 이야기'라는 관점은 효험 있었다.
이윽고 배우 천우희는 조연으로, 주연으로 조명 받았다. (탁월한 연기를 위한 끈질긴 노력에 더해) 그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묵묵히 써내려간 십수년의 시간이 그를 모두가 인정하는 주인공의 자리로 인도한 게 아닐까. 조연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가치있거니와 그 드라마가 빛날 기회, 타이밍을 가져오는 것 같다.
본인의 '이야기'란 무엇인가
우희적 사고는 실용적이다. 한 사람의 일화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적용해 볼만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고 본다. 나를 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것, 그에 따라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헤아리는 것, 나아가 그 문제를 딛고 주인공답게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서사를 (커리어와 인생 설계에) 대입해 볼 수 있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법은 무엇일까? 그걸 알려면 일단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구조화해 쓰는지 살펴봐야 한다.
영화 각본가 글린 거스(Glenn Gers)는 Film Courage 와의 인터뷰에서 ‘스토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즉, 스토리는 한 캐릭터가 어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다른 캐릭터가 그 의도를 돕거나 방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그러니 이야기는 정보의 나열일 수 없다. 오늘 무엇을 했다, 무엇을 했다, '무엇을 했다'는 정보의 연속으로는 스토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스토리는 주인공의 목적, 그걸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관계를 아우른다. 바꿔 말해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나의 목적, 그걸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설정 없이 주인공부터 창조할 순 없다.
이야기를 '쓰는' 주인공이 되려면
같은 인터뷰에서 글린 거스는 스토리텔링의 6가지 핵심 질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 Who is it about?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 What did they want?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Why can't they get it? (왜 그들은 그걸 얻지 못 하나요?)
- What did they do about it? (그들이 그걸 얻기 위해 무엇을 했나요?)
- Why doesn't that work? (왜 그 행동이 통하지 않았나요?)
- How does it end? (이 이야기는 어떻게 마무리 됐나요?)
이를 천우희 배우의 과거 상황에 대칭시키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Who is it about?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 배우로 데뷔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나
- What did they want?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배우로 성공적으로 데뷔해 인정받는 것,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
- Why can't they get it? (왜 그들은 그걸 얻지 못 하나요?) : 배우로서 ‘부족하다’는 모호한 평가를 받는 것
이러한 난관에 처한 주인공 입장에선 무엇을 할까?
유퀴즈 인터뷰에서 천우희 배우는 “자기 객관화”를 하기 위해 한국에 있는 또래 여자 배우를 모두 검색해봤다고 한다. 자신의 현재 위치와 강점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검색 결과 본인과 비슷한 느낌의 배우가 없다는 걸 알고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직접 만들었다. ‘어떤 배우’가 되겠다는 관점을 거기에 최대한 담았다.
이와 같이 나를 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설정하면 역설적으로 자신을 멀찍이 관찰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1인칭 시점으로 보이지 않았던 나의 위치와 강점, 주인공으로서 마주한 어려움과 그에 대한 솔루션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는 보다 또렷하게 보인다.
스스로 본인의 이야기를 쓰는 주인공이 되는 것은 주체성을 넘어 자기 객관화, 자기 이해의 힘을 기르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현대판 오디세우스 서사
실제로 스탠포드 라이프 디자인랩에서는 ‘오디세이 플래닝’이라는 프레임워크를 통해 인생 설계와 커리어 디자인을 돕는다.
오디세이 플래닝이란 마치 10년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했던, 그리스 신화 속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Odyssusus)처럼 본인을 인생 서사의 주인공으로 두고 대략 5~10년 뒤 미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촘촘한 계획이라기보단 일종의 브레인스토밍, 아이디에이션 작업이다.
스탠포드 라이프 디자인 랩 : 빌 버넷(Bill Burnett) 겸임교수은 오디세이 플래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 “5~10년 뒤 내 삶이 어떨까?”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 하는 것.
- “삶이 변곡점에 있을 때 내 삶이 어떨지 시각화하는 작업”
- “삶을 풍요롭게 성취감 있도록 하는 모든 요소를 나열해보는 것”
- “나, 내 가족, 내 친구, 내 커리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 촘촘한 계획이 아니라 브레인스토밍, 아이디에이션
- “삶이 변곡점에 있을 때 내 삶이 어떨지 시각화하는 작업”
- “삶을 풍요롭게 성취감 있도록 하는 모든 요소를 나열해보는 것”
이때 5~10년 뒤 내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이야기는 3가지 버전으로 작성할 수 있다.
- 현시점에서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미래 계획. (플랜 A)
- 첫 번째 계획이 틀어질 경우 예상 가능한 플랜 B.
- 돈이나 리소스가 모두 보장돼서 별다른 제약이 없을 경우 내가 써내려 갈 스토리를 적는다.
위와 같이 오디세이 플래닝 맛보기를 통해 ‘나만의 이야기’를 3가지 버전으로 쓴 후 거기서 미래 계획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 있다.
이처럼 내 미래를 스토리로 쓰는 작업 자체는 (비록 계획은 언제나처럼 뜻대로 되지 않겠지만) 스스로 주인공으로 내 인생이라는 서사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데(ready to engage) 도움이 된다”는 게 스탠포드 라이프 디자인랩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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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스토리의 위대함
책임감으로 인해, 혹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따라 정신없이 산다지만, ‘나만의 성장 스토리’에 집중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해서 내가 정확히 어디쯤 도착했는지 되짚어 보는 것도 장기적으로 꼭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글을 준비하며 오디세이 플래닝에 맞춰 내용을 채우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주인공의 감각을 되살리는 계기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마도 나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주인공이 되진 못할 것이다. 꼭 그런 주인공이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다만 남들이 나를 주인공이라 여기지 않는다 해서 나조차 나를 ‘행인 1’로 치부하진 않았나 반성한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극에서 대사 한 줄 있는 단역조차 나름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이야기에서는 그 사람이 메인 캐릭터다. "시시한 어른"일지라도 저마다 스토리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만의 이야기’를 되찾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자신의 스토리를 통해 삶을 조망하고, 나름의 해법을 시도하며 본인이 삶의 주인이 되는 스토리텔러가 늘어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 하고 싶다. 이 마음이 내년을 앞둔 나의 고민이자 고난이다. 이 길로 나아가는 과정 또한 즐거운 이야기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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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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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 윤성호 씨도 유퀴즈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일이 너무 풀리지 않아 힘들 때 책상 밑에 쭈그려 앉아 "도대체 나 얼마나 잘 되려고 이렇게 힘들지?" 이러면서 버텼다고.. 천우희 배우님이 시장 분석 후 본인을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 고민하셨던 부분도 인상적이네요. 이번 뉴스레터를 다 읽고 나니, '나만의 이야기를 되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삶도 조금씩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
스텔러스 다이어리 (196)
창업이든 부업이든 본업이든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마음이에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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