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한’ 결정
스텔러스가 인터뷰하는 이야기꾼, 스토리텔러들은 다들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나다움을 헤아리고 ‘나다운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기나긴 인생을 행복하고도 균형감 있게 살 수 있다고 몸소 보여줍니다.
그렇게 나다움을 찾아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 사람, 그 삶의 이야기 3번째 시간입니다. 이번 인터뷰는 연희동에서 무릉이라는 사운드 테라피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박시현 대표 님입니다.
무릉은 ‘사운드를 통해 사람들에게 해방감을 선물하는’ 브랜드인데요. 시현 님이 직접 선정한 3가지 차를 마시면서 싱잉볼 명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적인 쉼을 연구한다”는 소개 문구가 눈길을 끄는 곳입니다.
이런 시현 님은 원래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8살 무렵부터 20대가 되기까지 가야금을 연주하다가 완전히 다른 경로를 선택한, 색다른 이력을 가진 인물이죠.
시현 님의 삶 이야기에도 ‘나다움’에 대한 관찰이 가득합니다. 가야금 연주가 아닌 다른 길을 택했다가 '사운드 테라피'라는 길을 선택해 나다움으로 돌아오기까지, 굽이마다 고민과 의사결정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어요. 조바심으로 인해 나답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방황하다가 모두 내려놓는 쉼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 결정의 순간과 과정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 없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무언가 비어있다는 공허감을 느끼는 것. “바쁘다는 건 남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산다는 뜻”이라는데, 그렇다면 반대로 어떻게 나의 리듬에 맞춰 살아갈지 고민해볼 일입니다.
오늘 스텔러스가 담은 시현 님의 이야기, 그 끝에 달린 삶의 단서들이 여러분께 좋은 힌트가 되길 바랍니다.
[아티클 한 눈에 보기]
왜?” 질문해 혼났지만 그 덕에 얻은 3가지 깨달음
무작정 간 영국서 우여곡절 끝에 찾은 ‘진로 변경’
공간 기획자로 입사하면서 겪은 방황의 시간들
모두 내려놓으니 보인 다음 선택지 : 사운드 배스
아웃트로 : 10년 뒤에 칭찬할 만한 오늘을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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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질문해 혼났지만 그 덕에 얻은 3가지 깨달음
Q. 지금은 윌니스 스튜디오를 운영하시지만, 원래는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가야금 연주자로 커리어를 시작하셨을까요?
악기는 초등학교 2학년, 만 나이로 6살 때 시작했어요.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 가야금반이 있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름 풍경이 너무 신기하고 뇌리에 남았어요. 아직 가야금 반에 들어가기엔 어린 나이였음에도 ‘진짜 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놀랍게도 어머니께서 덜컥 가야금 악기를 사주셨어요. 당시 저희 집 형편이 그리 부유하지 않았음에도 선뜻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가야금을 배울 수 있었어요.
이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예고를 갈지 기로에 섰어요. 집에서는 난색을 표했어요. 아무래도 부모님 입장에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레슨 선생님이 저를 서울에 데려가 공연을 보여주셨고, 저는 완전히 매료됐어요. 꼭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가야금을 계속 배울 수 있었답니다.
하지만 대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재수를 했어요. 이때부터 제 진로에 대한 고민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Q. 에고. 대학 진학이 쉽지 않으셨네요.
사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저는 연주자의 길로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졸업 후 악단에 들어갈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죠.
다시 말하면, 타고난 재능을 갖은 친구들에 비해 한 끗이 부족하다는 걸 누구보다 제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체능인에게는 일종의 독기, 혹은 연습량으로 채워지지 않는 재능의 영역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단지 기술로 채울 수 없는, 어떤 ‘한의 정서’가 저에게 없다는 걸 느끼니 답답했어요.
‘내 인생은 너무 평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인생이 송두리째 막 굴러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부터 공연 기획, 예술 경영에 관심을 갖으며 기획자의 길을 꿈꾸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나는 연주자보다 기획자가 맞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기도 했죠.
Q. 당시 시현 님에게는 평생 해왔던 연주가 아니라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게 참 막막했을 것 같네요.
마냥 악기 연주를 하기 싫어서 멀리하기도 했어요. (재밌게도) 그 와중에 대학교 동기들과 국악 팀을 만들어서 제가 기획까지 맡는 데 더 열정을 쏟았답니다.
Q. 독특하네요. 빠르게 ‘다른 길’을 찾아보려 하셨어요.
당시에 퓨전 국악이 붐을 타기 시작한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팀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연주 합을 맞춰 퓨전 국악 공연을 시도하기로 마음 먹었던 거죠.
당시에 소위 ‘돈 버는 맛’을 알았어요. 너무 재밌더라고요. 언니들한테 연주 비용이 얼마인지 알아내서 기획사 사장님들과 직접 협상도 하고, 가격 정해지는대로 악기는 제 차에 싣고 친구들을 택시 태워서 공연장으로 향하는 식으로 열심히 활동했어요.
당시에 라이브 공연까지 할 수 있는 팀이 많지 않다 보니 앙드레김 패션쇼 같이 크고 화려한 곳에서 직접 연주 공연을 하는 경험을 많이 했답니다.
Q. 다시 가야금 연주에 주력할 마음은 아예 없었을까요?
그냥 악기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밤새서 연습해 무대에 서는 것, 그 무대를 성사시키는 과정이 훨씬 재밌었어요. 정해진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무언가 창의적으로 시도하는 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애초에 저는 ‘왜’라는 질문이 많은 아이였어요. 특히 입시 음악에서는 정해진 정답에 맞게 연주하면 되는데, 저는 거기에 반발심이 일었던 것 같아요. 왜 전통을 답습해야 하는지, 입시곡만 반복해서 연습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았죠.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연주자의 기량을 만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연습이었는데, 그 누구도 이걸 명쾌하게 설명해준 어른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문이 들고 질문을 꺼냈다가 선생님들께 혼나기도 했답니다.
대학 때도 ‘그냥 해야 한다’는 데 의문을 던졌다가 난처해지기도 했어요. 보통 대학교에서 1년에 한 번씩 예술제 준비를 하는데, 빡세게 연습하는 와중에 선배들의 ‘집합’에도 응해야 했어요. 후배 기강을 잡는다는 목적이었죠. 연습해도 모자란 시간을 그렇게 쓰는 게 이해가 안 가서 따져 물었다가 제가 속한 학년 전체가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이 나네요.
Q. 아이고… 여러모로 곤란하셨겠어요.
하지만 반대로 저희 동기끼리 결속력이 생겼어요. 제가 국악 팀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동기끼리 친해졌기 때문이었어요.
Q. 새옹지마 같네요. 어쩌면 ‘왜’라는 질문이 전에 없던 가능성을 실현해준 셈이에요.
국악 팀으로 활동할 때도 수익을 공평하게 N분의 1로 나눠서 가졌어요. 공연 기획 및 팀 운영을 하는 사람은 “뽀찌”(딴돈의 일정량을 다른 사람에게 팁으로 돌려주는 것)를 받는 게 공공연했는데요. 저는 그런 걸 몰랐고, 굳이 그래야 하나 싶었어요. 도리어 투명하게 수익을 나눠 가지니 팀 결속력이 더 좋아지면서 미친듯이 연습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답니다.
집요하게 한 박 한 박 맞춰가면서 연주 연습을 하니까 저희 팀 연주 합이 진짜 좋았어요. 서로 고개 한 번 까딱하면 바로 연주가 맞춰질 정도로, 집에 안 가고 연습했거든요. 그렇게 꾸준함이 빚어낸 탁월함, 조화로움 덕분에 여러 공연에서 저희 팀을 찾아주셨어요. 결국 탁월함은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밖에 없구나, 이 경험을 통해 명쾌하게 배웠던 것 같습니다.
Q. 시현 님의 10대, 20대 시절을 들으니 “버릴 경험이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듯합니다.
맞아요. 저도 ‘작은 경험이 쌓여야 큰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주변 친구들은 지금의 제가 ‘어떻게 창업을 할 수 있어?’라고 신기해하지만, 저에겐 마냥 어렵진 않았어요. 대학생 때 (사업자등록을 안 했을 뿐이지) 팀을 꾸리고 공연 기획을 하면서 사실상 사업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을 경험했으니까요.
성과를 함께 공유해야 팀을 끈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얻은 탁월함이 기회를 만든다는 것도 모두 지금까지 도움이 되는 경험이에요.
무작정 간 영국서 우여곡절 끝에 찾은 ‘진로 변경’
Q. 대학생 때 훨훨 날아다니셨던 시현 님도 졸업을 앞두고 고민이 많으셨을 듯해요. 그때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당시 대학원 준비를 하며 선택의 기로에 섰어요. 당시 선생님께선 저한테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했죠. 너는 다른 애들보다 학벌이 좋지 않으니 성공 못 할 것이다, 진흙탕 밭에서 시작했으니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해서 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헌데 제 생각은 달랐어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을 벗어나서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책을 통해 접했던, 훨씬 더 넓고 큰 세상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있었는데, 막상 악기 연습을 하느라 한 번도 긴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침 이러한 바람이 켜켜이 쌓일 때쯤 동남아시아로 3개월간 배낭 여행을 갈 기회가 생기면서 제 시야가 바뀌었어요.
Q. 시현 님의 시야가 여행을 통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그때 제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 했어요. 그런데 긴 여행을 갔으니 뼈저리게 깨달은 거예요. 언어를 알아야 내 세상이 커지겠구나.
그래서 어학연수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호주 비자까지 다 받아 놨어요. 헌데 이번에는 부모님께서 반대하셨어요. 지금까지 쭉 악기 공부를 시켰는데 갑자기 20대 중후반에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니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미국 유학’으로 어떻게든 절충안을 마련했는데, 이번에는 뉴욕에 체류하는 비자가 거절되면서 난항을 겪었어요.
그래서 결국 런던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영국 유학을 꿈꿨던 건 아니었지만, 면학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잖아요. 어학원 대다수에서 영국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다녀서였는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게 됐어요. 사실 엄마는 크게 반대하셨지만, 아버지의 도움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Q.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런던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셨나요?
유학을 준비할 때부터 워릭대학원이 아니면 안간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예전부터 막연하게 ‘예술 경영, 기획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실제로 공연 기획을 하면서 한 예술경영지원센터 웹진을 즐겨 읽었는데요. 거기서 제가 눈여겨본 기고자 이름 옆에 ‘워릭대학교 문화경영 전공’이라고 딱 써 있었거든요.
헌데 신기하게도 워릭대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하게 됐어요😂 제가 워릭대학교를 지망한다는 걸 알게 된 친구가 그 학교에 다니는 다른 친구를 소개해줬는데, 마침 그 친구가 문화경영 전공이었어요. 한참 제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듣더니 그러더라고요.
대신에 같은 대학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엔터프라이즈’(미디어 예술 창업) 과의 담당 교수님을 만나보라고 조언해줬어요. 학교 지원자들이 참석할 수 있는 오픈데이 때 런던에서 1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가서 문화경영 대학이 아니라 예술 창업 학과에 방문했고, (영어를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그 학과 특유의 바이브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Q. 갑자기 과를 바꿔야 했지만, 생각보다 결단이 수월하셨겠어요.
물론 영어 성적을 끌어올려서 입학 요건에 맞추는 게 참 쉽지 않았어요. 언어 공부를 빡세게 해본 적이 없으니 진짜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영국에서만큼은 진흙탕 밭에서 시작하지 않겠다는 오기가 있었어요. 대입 때 제대로 노력하지 않아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했다는 아쉬움이 컸으니까요.
결국 1년 가까이 영어 시험을 치르고 또 치러서 입학 직전에 점수를 만들 수 있었어요. 9월 입학이 확정된 후에도 3~4개월 미리 학교에 가서 논문 쓰는 방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죠.
Q. 간절함이 컸어요. 첫 수업은 어떠셨나요?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쇼킹했던 기억이 😂
Q. 우여곡절이 아직 끝나지 않았네요ㅎㅎㅎ
심지어 교수님이 30분간 발제를 하시고서 나머지 시간에는 토론을 하는 수업 위주였어요. 엄청 힘들었어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교수님께서 저를 따로 부르시더니 1대1 면담에서 이렇게 말씀해주셨어요.
무엇보다 제게 너무 와닿았던 조언은 “과정을 견디는 것이 창의성의 핵심”이라는 말이었어요. 그동안 저는 (아무리 스스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해도) 항상 남들과 비교 당하면서 ‘과정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여겨져 왔어요.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어요. 헌데 교수님의 저 조언이 제 인생의 관점을 바꿔줬어요.
가이드를 주지만 답을 가르치진 않는 방식들도 크게 와닿았어요. 가령 인턴십을 하더라도 담당자가 인턴을 인턴으로만 대하지 않았어요.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무언가를 만들어 봐. 하지만 그건 우리가 정해주지 않아.’ 주어진 목적을 기반으로 스스로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학교를 통해) 많이 접할 수 있었답니다.
Q. 과정을 견디는 것이라… 저에게도 와닿네요. 실제로 수업에서는 어떤 걸 배우셨나요?
창의성이란 무엇인지, 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가 돌아가는 산업에 대해 배웠어요. 특히 아이디어(예술)을 비즈니스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나누었지요.
수업 방식도 참 기억에 많이 남아요.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것보다도 역할극에 하거나 서로 악수, 포옹을 하면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는 식이었어요. 혹은 1시간동안 밖에 나가서 직접 돈을 벌어온 후 매출과 그 과정에 대해 정리하는 수업도 있었어요. ‘부딪치면 된다’는 걸 배우는 시간들이었어요.
공간 기획자로 입사하면서 겪은 방황의 시간들
Q. 입학이 있으면 졸업이 있죠. 영국에서 맞이하신 졸업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졸업 논문을 쓰면 진짜 많은 걸 배웠어요. 그때 ‘공간이 어떻게 예술가의 창의성에 영향을 미치는가’(How Space Affects Artist's Creative Process)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요. 인터뷰한 뮤지션들을 통해 씬의 성장에 있어 '살롱 바다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신인 아티스트들이 꾸준히 무대에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거나, 뒤풀이에서 자연스럽게 아티스트와 관객이 어우러질 수 있게 하거나,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등 공간을 구심점으로 예술가들의 창의성이 창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이때부터 막연하게 ‘내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참고 : 홍대 대표 클럽 '살롱 바다비'는 왜 문을 닫았을까)
Q. 그 꿈이 지금의 무릉으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로 공간 창업을 하진 않으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일단 취업 준비를 했어요. 이제는 돈을 벌어 가족들의 지원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스포티파이, 넷플릭스 같은 해외 기업부터 국내 기업들까지 폭넓게 지원하면서 대영박물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러다가) 마침 한국에서 전시 공간 기획을 할 수 있는 회사에 합격이 돼서 빠르게 한국행을 결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소 급하게 한 결정이었어요. 비자가 만료되어 한국으로 돌아오며 거의 입국과 동시에 지원한 전시 공간에 들어간 것이었죠. 얼른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도 컸고, 면접에서 떨어진 건들이 늘어나니 불안해서 한국에서 합격이 결정되자마자 바로 입사를 정했던 것 같아요.
첫 회사 생활은 솔직히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5년 가까이 한국을 떠나 영국에서 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문화권에 살다가 한국 조직 문화에 나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죠.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피드백이 없고, (막연하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태도를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눈치껏 행동하며 ‘내 것’을 늘려가야 하는, 그런 유연함이 제게도 부족했던 시점이었고요.
Q. 고난의 사회생활이네요.
처음에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괜찮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3개월쯤 지나나니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어요. 맡은 일을 꾸준히 해서 사업을 키웠음에도 회사에서 인정 받지 못하니 억울하고 화가 났어요. 어느 날 실장 님이 저를 부르더니 ‘그만두라’고 하시더라고요. 명확한 이유가 없었어요.
결국 사무실에서 얼른 나와서 펑펑 울며 소리를 질렀어요. 그랬더니 갑자기 온몸에서 열꽃이 피어서 두드러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확 퍼졌어요. 내 몸이 나를 공격한 거예요. 아무리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도 열꽃이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요가와 명상을 시작하게 됐어요.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붙잡을 무언가 필요했어요.
Q. 듣기만 해도 답답하네요. 이후에는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요?
퇴사 후 무작정 여행을 떠났습니다. 홍콩 아트 바젤을 시작으로 상해, 일본 도쿄 북 페어까지 퇴직금을 모두 여행하는 데 썼어요. 이렇게 3개월간 쉬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했죠. 브랜드 에이전시와 협업하면서 10개월간 ‘콘텐츠 마케팅 아시아 포럼’이라는 컨퍼런스를 주최하는 디렉터로도 일했답니다.
(이후) 때마침 제 논문 주제와 연관이 있던 공간 비즈니스 회사를 입사하게 됐는데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때 코로나가 터졌어요. 회사도 힘들었고 모두가 힘들었죠. 입사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지인 추천으로 앱 콘텐츠(서비스)를 만드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어요.
Q. 프로 이직러셨네요😏
그러게요🙂 이때가 바야흐로 2022년입니다. 당시 모든 스타트업(사람)은 메타버스와 NFT에 현혹됐던 시점이어요.
여러모로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모르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러니 자존감도 낮아지고, 내가 ‘회사 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인가 싶고, 도망치듯 이직해 인생을 말아먹은(?!) 건 아닌가 싶었어요.
야근 후 퇴근하는 새벽에는 택시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릴 때마다 죽을 것 같았어요. 아저씨께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해도 손에 식은 땀을 쥐어야했죠.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는 길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의 심정이었어요. 무너질 것 같은 불안감이었어요.
Q. 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워요. 그때 어떤 심정이셨나요?
나 자신의 쓸모에 대해 의심했던 것 같아요. 인생의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죠. 지금까지 내 꿈을 지지해온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도 들고요. 이와 동시에 당시 정말 많은 외부 활동을 했어요. 와인, 독서, 글쓰기 등 회사가 아닌 외부에서라도 '나'를 증명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일상에 체한 상태가 이어졌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코로나19가 심각해지고 있던 시기에) 코로나19에 걸리면서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됐어요. 약 1달간 강제로 휴식기를 갖게 됐고, 오히려 그걸 기점으로 제 생활은 완전히 리셋 됐습니다.
모두 내려놓으니 보인 다음 선택지 : 사운드 배스
Q. 리셋이라... 정확히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기셨던 건지 더 들어보고 싶네요.
코로나19로 고역을 치르고서 명상룸을 찾았어요. 거기서 사운드배스를 받았어요. 사운드 배스란 (주로) 싱잉볼 소리와 진동으로 깊은 이완을 유도하는 명상방법인데요. 그날 조그마한 방에서 사운드배스로 명상을 하고서 마지막에 차를 마신 후 창 밖을 보니 햇살이 쫙 들어오더라고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Q. ‘나답고 싶다’는 마음으로 읽히네요.
다시금 한국을 벗어나보기로 결심했어요. (프리랜서로 꾸준히 일하면서) 대범하게도 대출을 받아서 코펜하겐, 독일, 이탈리아, 영국을 방문해 내추럴 와인이나 콤부차, 다도나 티 세레모니, 오프라인 공간 비즈니스를 살펴보는 리서치 트립을 하기로 마음 먹었죠.
특히 런던에 다시 방문하고 싶었어요. 10년간 해온 방황의 매듭이 필요했거든요.
Q. ‘차’에 관한 주제들을 많이 살펴보셨네요. 왜 차에 주목하셨을까요?
해외 리서치를 하며 당시 관심 있었던 건 '발효'였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콤부차에 빠져들게 됐는데요. 콤부차를 만드는 가장 기본인 '차'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차 문화에도 빠지게 됐습니다.
어린시절 엄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다도를 접한 것도 한 몫 해요. 당시 엄마는 항상 일로 바쁘셨는데요. 주말이면 어린 저와 동생을 앉혀놓고 배워온 다도를 실습하셨어요. 그래서 잎차를 마시는 일이 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죠.
더욱이 해외 리서치를 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시대'에서 '차를 즐기는 시대'로 변화할 것 같다는 흐름을 읽을 수 있었어. 제 관심이 크게 뻗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 공간이 주는 쉼과 여유를 모두가 원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답니다.
Q. 약 5년 만에 영국 런던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어떠셨나요?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 전까지는 리서치 트립에 걸맞게 무조건 다 보고 공부해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어요. 헌데 제가 살았던 동네에 오니 긴장이 풀리더라고요. 사람들이 여유롭게 웃는 소리까지 명료하게 들렸어요.
일단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서 다음 날 런던에 있는 테이트 모던 브릿지에 갔어요. 다리 위에 딱 서니까 새삼스럽게 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어요.
폭풍 같았던 10대와 20대 초반 시절, 영국에서의 5년, 이후 한국에서 방황한 5년까지. 그 전까지는 영어 한 마디 못 하던 아이가 지금의 나로 성장했다고 돌이켜 보니 ‘나 잘 살아왔구나’ 한 마디가 참 크게 느껴졌어요. 조급한 나머지 내게 맞지 않은 틀에 나를 맞추느라 애썼던 걸 깨달으니 펑펑 눈물이 났어요. 다리 위에서 엄청 울었어요.
Q. 시현 님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을 10년 만에, 다시 찾은 런던에서 맞이하셨어요. 이후 한국에 돌아오셔서는 어떤 결정을 하셨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제 공간을 물색하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쉬지 않는 이상 쉴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예감이 들었거든요. 이러한 가설에 비춰봤을 때 쉼을 주는 시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봤어요.
그래서 (대출로 목돈이 남아있을 때) 공간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공간 비즈니스는 공간을 계약했다고 해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컨셉을 정하고 인테리어를 하면서 내부 공간을 콘텐츠로 채우는 데도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해요. 더 늦기 전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덜컥 보증금을 약속하고 지금의 연희동 공간을 계약했습니다.
무릉 공간의 핵심을 정하는 데도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첫 시작점은 웰니스 콘텐츠를 다룰 수 있는 브랜드 에이전시였어요. 오프라인만으로는 비즈니스 확장성이 없다는 걸 이전 회사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콘텐츠로 승부를 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허나 ‘아는 것’과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운영하면서 깨달았어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한 도원경”이라는 컨셉은 명확했지만, 이 컨셉을 경험하기 위한 콘텐츠에 뾰족함(핵심)이 없었던 거죠.
더욱이 11월 오픈 후 3개월은 보증금 마련하는 데 급급했어요. 외주 프로젝트 5~7개를 동시에 돌리면서 무릉도 운영해야 했으니까요. 웰니스 스튜디오인데 대표가 매일 2시간도 잠을 못 자니 건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단은요. 이제 대충 눈치채셨죠? 무릉을 잠시 닫고 발리로 여행을 갔습니다.
무릉을 시작할 때도 스스로 세운 원칙이 있어요. “월세가 아까워 스스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었죠. 보름 동안 발리에서 마음껏 요가하고 명상을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 브레스워크(Breathwork) 세션을 통해 힌트를 얻게 됐습니다.
Q. 개인적으로도 와닿는 문장들이에요. 브랜드가 되는 건 분명 어렵겠지만, 가장 나답게 오래 하고 싶은 일은 사실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나와 솔직하게 마주하니 내가 갖은 것에 대한 감사함이 그제서야 보이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악기)에 대해 알아차린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더욱이 그 꿈을 응원하고 도움을 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말이죠.
그러면서 스스로를 부정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무릉의 방향을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됐습니다.
Q. 그렇게 결정하면서 시현 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사업을 하면서 겪은 여타 불안함에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었어요.
창업 초반에는 (지인들이 찾아오는 시기가 지나면) 매출이 떨어지고 불안해지잖아요. 나도 ‘찻잎’을 제품으로 판매해야 하나, 전시라도 열어야 하나, 브랜드 협업을 해야 하나 등등. 하지만 (무릉의 방향을 정하면서) 오래가는 브랜드는 저마다 아이덴티티를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게 보다 명확해졌어요.
또한 이제는 ‘사운드 테라피스트’라고 저를 소개해요.
예전에는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어 주저했지만, 이제는 저에 대한 관점을 바꿨어요. 소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힐링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요. 꼭 전문적인 치료가 아니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위로를 주지 않을까요? 이 방향으로 저 스스로 깊어지고 싶답니다.
Q. 근사한 변화네요. 앞으로 무릉을 통해 시현 님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가요?
요즘 저의 화두는 ‘동기화’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주변에서 다양한, 부정적인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다시 자기 의심이 샘솟아서 딴짓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브랜드의 결에 맞춰 (1) 대쪽 같은 마음으로, 어떤 희망을 바라보며 사업을 이끌지에 대한 고민과 (2)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지켜내야 브랜드가 된다는 믿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원경”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앞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해방감을 줘야 할지, 그걸 어떻게 다양하게 풀어낼지 발견하는 게 제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랍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사운드가 자리잡고 있겠죠. 다만 (브랜드를 만들면서) 생각이 갇히진 않도록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쏟을 듯합니다.
아웃트로 : 10년 뒤에 칭찬할 만한 오늘을 살려면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해요. 적어도 고통과 권태 중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삶이라는 의미니까요. 고통에서 권태로 바뀌고, 권태롭다가 고통의 운동력을 마주하는 것. 그 사이를 오가는 과정이 곧 삶에서 우리가 겪는 변화 아닐까요. 그러한 변화 없이 시간의 흐름도 없는 법. 그러니 이 움직임은 그리 나쁘지 않은 겁니다.
때로는 예술가 반 고흐의 글귀에서 저 진자운동을 발견하곤 합니다.
쇼펜하우어와 반 고흐의 차이점이 있다면 반 고흐는 이 진자운동을 통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는 겁니다.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그걸 통해 나다워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따라 계속 그림을 그리는 선택을 했고요. 삶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진자운동이라도 그 진자가 그리는 방향이 있다면 그 궤적은 조금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시현 님 삶의 이야기를 쭉 정리하며 문득 시현 님의 진자운동은 어떠했고, 앞으로 어떠할까 떠올립니다.
사운드 테라피라는 ‘나다움’을 찾은 후 시현 님은 무릉을 설립했습니다. 비록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게 쉽지 않더라도, 때론 나태하다가 불안하길 반복하더라도 지금의 시현 님은 30년 중 가장 평안한 진자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에 대한 시현 님의 답변에서 보다 선명한 방향성, 시현님다운 색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좌충우돌, 발견과 방황 끝에 ‘나다운 나’를 정의하기 시작한 시현 님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팍팍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심성, 인간 본능대로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풍요로움, 그러한 치유의 경험을 주기 위해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할 줄 아는 현실 감각까지. 시현 님은 드디어 평형대 위에서 균형을 맞추게 됐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10년 뒤에도 칭찬한 만한 오늘을 살고 있나요? 그 기준이 될 ‘나다움’을 성실히 찾고 있나요?
비록 삶이 권태와 고통 사이에서 별 의미 없이 오가는 시간일 뿐이라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무늬가 새겨집니다. 어린 시절 발견한 나다움을 새롭게 해석한 시현 님의 삶을 통해 ‘다른 진자운동’의 가능성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오늘 여러분을 가장 ‘나답게 하는 리듬’이 무엇인지 되짚어보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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