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혼 후에도 완벽주의 성향을 버리지 않았다.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원을 다니며 늘 피아노도 잘 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자, 아이도 아빠의 도움 없이 밝게 잘 키워내는 엄마로 열심히 살았다. 같이 음악 대학원을 다니던 몇몇 한인들은 아이도 없고, 학비도 부모님 지원으로 유학을 왔는데, 성적과 실력은 엄마에게 늘 뒤처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희진 언니” 하며 엄마를 따라다니던 이모들은 엄마를 동경하기도 속으로는 질투하기도 했다. 어쩌면 당연했던 것이 미주리 주립대 음대에 엄마처럼 빡센 엘리트 코스로 음악을 수련해 온 학생은 없었다. 엄마와 함께 수련한 또래들은 뉴욕이나 독일의 저명한 음악학교에 입학했지, 이름도 긴 University of Missouri Kansas City(줄여서 UMKC)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이것은 엄마가 나를 키워내기 위하여 기꺼이 포기한 것이었다.
엄마를 따라다니던 이모들 중 엄마는 소영이 이모와 가깝게 지냈다. 그녀도 나보다 두 살 어린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이 었다. 이모는 엄마와는 달리 완벽주의자가 아니었다. 음악도, 공부도, 경력도 엄마보다는 스스로에게 관대히 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모의 이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모는 늘 혼자 아들 재선이를 키우고 있었다. 재선이는 내 베프이자 졸병으로, 재선이의 기저귀 찬 엉덩이를 쿡쿡 찌르며 그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던 기억이 많다. “Jason, 안 돼!” 그의 영어 이름을 빠르게 부르며 얼마나 명령했던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재선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런 나를 누나로 받아 주어서. 때로는 외롭고 우울했던 엄마의 유학 생활을 소영이 이모네 모자가 희극으로 만들어 주었다. 퉁퉁하고 하얀 백돼지 같았던 나와 달리, 재선이는 음식을 가려 먹어 마르고 까무잡잡한 편이었다. 한 번은 엄마가 재선이를 봐주다가 응가한 엉덩이를 씻겨주는데, 엉덩이 사잇살이 나와 비교해 너무 빈약하고 얕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내 엉덩이는 손을 제법 넣어야 씻을 수 있는데, 재선이 똥꼬는 표면에 있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재선이는 여느 남자아이같이 자동차와 트럭이라면 환장하며 좋아했었다. 침대 시트에는 소방차, 경찰차, 포크레인이 줄을 지어 있었고, 티셔츠에도 자동차가, 손에는 늘 바퀴 달린 작은 장난감이 쥐어져 있었다. 어느 날 우리 네 명은 재선이가 그나마 잘 먹었던 “얼럴러”를 먹으러 중식당에 갔다. “Noodle” 발음이 어려웠던 재선이는 국수를 “얼럴러”라고 불러 우리도 줄곧 국수를 “얼럴러”라 칭했다. 오랜만에 먹는 동양식 음식을 배불리 먹고 주차장을 걷고 있는데 저 멀리 큰 트럭 한 대가 보였다. 캔자스시티에는 고상한 중상층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았지만, 중식당이 있었던 동네에는 ‘redneck’이라고 불리는 보수적인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아시아인을 절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온 연놈들은 꺼져라.’가 그들의 정치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손수건을 두른 머리 밑, 육체노동과 음주로 시뻘게진 목이 나와 있는 아저씨들을 보면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아뿔싸, 주차장에서 만난 ‘redneck’ 아저씨가 큰 트럭의 주인이었다. 트럭을 본 재선이는 흥분하여 아저씨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big fuck, big fuck!” 크게 소리쳤다. “Truck” 발음이 안 돼, “fuck”이라고 발음하였다. 아시아계 아이가 백인 아저씨에게 손가락질하며 “천하의 X!”라고 반복하다니! 엄마와 소영이 이모는 일제히 손으로 재선이의 입과 얼굴을 감싸고 서둘러 차에 탔다. 우리는 차 문을 잠그는 순간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내 체중 때문에 엄마는 내가 먹는 것을 예민하게 관리하였다. 콜라는 초등학생이 돼서야 처음 마셨을 정도로 소위 ‘junk food’라고 불리는 가공식품을 특히 제한했었다. 한데 미국은 정크푸드의 성지였다. 음악대학원 연습실 복도에는 정크푸드가 가득 찬 자판기가 있었고, 어린이집에서도 설탕 함량이 높은 시리얼을 아침 식사로 주었다. 한 번은 금발의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친구가 마음대로 주방의 팬트리에 들어가 바구니 가득 담겨 있던 도넛을 한 봉지 꺼내, 도넛에 묻어져 있던 슈거파우더만 핥아 먹고 도넛은 쓰레기통에 버린 모습을 보았다. 마치 다른 별에 살고 있는 외계인을 본 느낌이었다. 설탕만 핥아 먹었던 친구는 나와 달리 상당히 말랐었다.
나의 정크푸드 욕망을 아낌없이 풀어주었던 것은 소영이 이모였다. 이모 집에는 우리 집과 다르게 가공식품이 종류별로 많았다. 짜고 매콤한 미국식 육포인 ‘beef jerky’를 비롯한 형형색색의 과자 봉지들이 즐비했다. 엄마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려 외박하는 날이면 나를 이모 집에 맡겼었는데, 하룻밤만 자야 한다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재선이는 밥도 과자도 잘 안 먹다 보니, 주는 대로 다 잘 받아먹는 내가 이모는 예뻤나 보다. 가끔은 내가 자기 딸 같다고 나에게 윙크를 날리던 이모였다. 그래서 엄마의 핀잔을 무릅쓰고라도 나에게 자꾸 먹을 것을 주셨던 것 같다. 어느 날에는 한인 교회에서 나와 재선이를 종종 돌봐 주던 리해 언니까지 소영이 이모네 놀러 와 더 흥분해 있었다. 우리는 다 같이 소파에 누워서 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았다. 피자 위에 맺힌 기름을 냅킨으로 꾹꾹 눌러 닦아 내게 주는 엄마와 달리, 이모는 피자 상자 뚜껑을 열고 “써니야 먹자,”라고 간단히 말했다. 그날 밤 내 배는 꿀을 잔뜩 먹어 취해 잠에 든 위니더푸의 배처럼 둥글게 솟아 있었다.
하룻밤에 너무 많은 쾌락을 끌어다 쓴 걸까? 나는 꿈속에서 계속 오줌이 마렵고 추워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그리곤 옳다구나 화장실을 찾아 바로 팬티를 벗어 내리고 변기에 앉아 오줌을 누자, 엉덩이와 등이 뜨끈하고 축축하게 젖어 오며 잠에서 깼다. 2층 침대에 잔뜩 눈 오줌은 1층 침대에서 자고 있던 리해 언니 머리맡까지 떨어졌다. “Sunny?” 잠에서 깬 리해 언니는 쿰쿰하고 찌릿한 오줌 냄새를 맡자마자 소영이 이모를 불렀다. 그렇게 우리 셋은 깜깜한 침실에서 이불과 시트를 싹 다 걷어 세탁실로 가지고 갔다. 그 밤의 깊음이 세탁실의 하얀색 형광등 불빛과 대비되었다. 엄마도 없는데 실수를 했으니 창피할 만한데, 나는 빨래를 돌릴 때도 그저 즐겁고 웃겼던 기억이 있다. 리해 언니는 소리 내 웃고 박수까지 치며 자기가 내 오줌을 맞아 잠에서 깬 이야기를 하였다. 소영이 이모는 한순간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를 혼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 같았지만, 금세 이모 특유의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야 써니야,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자” 하면서 나에게 윙크하셨다. 재선이는 다른 방에서 자고 있어서, 나는 오줌을 싼 덕분에 소영이 이모와 리해 언니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내심 기뻤다. 이 밤이 지나가는 것이 아까웠다. 재선이의 잠옷이 나에게 맞을 리 없어서, 나는 소영이 이모의 UMKC학교 티셔츠를 원피스처럼 입고 소파에서 다시 잠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엄마와 이모는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이었다. 그렇게 어린데, 아이를 혼자 키우며 박사 학위를 땄다. 어쩌면 이모도 엄마처럼, 그 모든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 삭막하고 힘들어서 오줌 싼 이불 정도야 가볍게 빨아내었던 것 같다. 박사 과정의 모든 과제가 뇌에 쥐가 나게 어렵고, 교수님의 연주 평가는 치가 떨리게 무섭고, 애들 아빠를 생각하면 배신감과 분노와 자기연민이 치밀어 올라, 일상의 작은 실수는 그저 애교로 웃어넘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모는 엄마보다는 그 유머를 쉽게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이모로부터 인생, 조금은 개겨도 된다는 배짱을 배웠다. Frank Sinatra의 재즈 곡 <You Make Me Feel So Young>을 들을 때면 나는 소영이 이모를 생각한다. “So young, so young,” 이모의 영어 이름을 반복하는 노랫말을 듣노라면, 엄마와는 달리 스스로와 남에게 조금은 더 관대하고 짓궂었던 이모의 마음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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