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결혼하고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한평생 매일 연습하던 피아노를 치지 못하여 미쳐버리는 줄 아셨다. 엄마의 자아를 정의하던 음악과 악기를 하루아침에 매 끼니 반복되는 설거지로 대체 해야 한다니. 그래서 이혼하고 바로 음악대학 박사 학위를 받으러 머나먼 미국 캔자스시티에 도망해 오듯 나를 데리고 가버렸다. 인구수 40만, 아시아계 인종은 1% 미만, 산과 물이 없는 허허벌판 그 땅이 내가 처음 기억하는 나의 고향이다.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그곳에서 보낸 나의 영유아기는 늘 배가 부른 듯, 충만하고 따뜻했던 기억이다. 정말 그랬던 것이 나는 귀국하기 전 대여섯 살 때까지 꽤 눈에 띄게 뚱뚱했었다. 치마를 입은 거울 속 자신을 가리키며 엄마에게, 나의 치맛단은 왜 앞뒤 높이가 같지 않고 앞이 들려 있냐고 물었다고 하니 말이다. 엄마는 웃음을 참으며 나의 배 동산에 걸려 붕 떠 있는 치맛단을 손으로 내려주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장을 보고 있는데, 식료품 통로 반대편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엄마에게 웃으며 다가오셨다. “My goodness, is this your daughter?” 엄마가 영유아를 낳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인다며 물어보시고는 “May I?” 엄마가 허락하기도 전에 쇼핑카트 유아 시트 밖으로 걸려 있던 나의 허벅지를 꼭 만져 보셨다고 한다. “She’s beautiful, just like a China doll.” 그렇게 감탄을 연발하시면 엄마는 “Thank you,” 하고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아기가 너무 뚱뚱해서 beautiful은 개뿔, 아기 돼지 같아 엄마는 스트레스였던 것도, China doll은 무슨, 우리는 한국에서 왔다는 것도, 그 순간에 이야기할 용기와 겨를은 없었다. 그 백인 동네에서 늘 어른들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두드리고, 허벅지를 만지곤 했다. 난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누가 다가오면, “Helloooo” 중부 특유의 억양으로 어미를 끌며, “My name is Sunny”라며 자랑스럽게 나 자신을 소개했다.
캔자스시티 우리 집, 흰색 피케 울타리 대문을 열면 다섯 평 정도의 시멘트 앞마당이 있었다. 그 앞마당에서 미국식 땅따먹기인 ‘Hopscotch’ 놀이하거나 비누 거품을 불며 시간을 보냈다. 앞마당을 지나 계단 몇 개를 오르면 앞문이 있었다. 계단 옆 화단에는 아주 작은 정원을 가꿨는데, 그곳에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깻잎 씨를 심었다. 여름이면 까칠까칠한 솜털이 나 있는 깻잎이 내 손바닥보다 더 크게, 넝쿨째 자라곤 했다.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날이면 엄마가 채반을 주며 깻잎을 따오라고 하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앞마당에 나가, 까치발을 쫑긋 들어 위 넝쿨에 있는 깻잎까지 채반 가득 따 주방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엄마가 “What a big girl you are” 하며 다 컸다고 칭찬해 주던 것이 어찌나 뿌듯했던지. 스스로 깻잎을 따 저녁 식사에 기여를 한 내 자신이 퍽 자랑스러웠다. 겨울이면 앞문 밑 계단 위까지 쌓인 폭설에 모자와 장갑을 챙겨, 마당에 나가 벌러덩 눈 속으로 누워 팔다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천사 모양의 ‘snow angel’을 마당에 그렸다. 내 키만 한 눈사람을 만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신나서 뛰어다니느라 목도리가 풀어지면, 엄마는 앞문 앞 계단 위에 서서 “Sunny, 감기 들릴라”라며 목도리를 다시 매라고 다그쳤다. 그 집에서 맞이했던 사계절이, 엄마와 나 단둘뿐이었던 가족과 집이, 나는 행복하고 충만했다.
거실에는 엄마의 검은색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동네에 고운 할머니로부터 산 그 피아노는 빈티지 악기였기 때문에, 콘서트홀에서 보는 화려하게 광나는 피아노가 아니라 먹처럼 묵묵하고 단아한 모습의 피아노였다. 피아노 앞에서 엄마는 음악 속을 깊게 여행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며 매일매일 수련했다. 나는 엄마의 피아노 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피아노의 낡은 나무 냄새와 엄마가 페달을 밟는 발짓이 나를 어떤 푸근함과 안전함으로 감쌌다. 피아노 다리맡에 바비인형들을 잔뜩 줄지어 놓고, 카펫에 누워 피아노 아래를 관찰하는 것은 나의 일상이었다. 엄마는 늘 피아노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듯하였는데, 특별히 어려운 악장의 부분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여 익히는 습관이 있었다. ‘쿵, 끽, 쿵’ 밟는 소리, 페달이 움직이는 소리를 반복하며, 마치 밑에 누워 있는 나를 태우고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갈 것만 같았다. 또 음악에 열중할 때면 엄마가 입으로 소리 내어 “따리라 라라” 음을 따라 강약을 표시하던 것도 그 기차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소리였다. 연습이 끝날 때까지는 엄마를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종종 엄마의 발밑에서 잠이 들었다.
시험기간이나 중요한 연주회가 지나면 엄마는 주방에서 나에게 포상을 만들어 주셨다. 미국 시골에 살면서 삼계탕이나 꼬리곰탕 같은 보양식을 해주시기도 하고, 내 체중이 걱정되어 자주는 아니지만 홈베이킹도 해주셨다. 그중 가장 황홀했던 메뉴는 ‘Swiss Roll Cake’이라 불리는 초코 롤케이크였다. 폭신한 초코 시트 속에 바닐라 휘핑크림을 가득 넣어 말아낸 케이크는 한입 먹는 순간 바닐라 향과 초코 향이 진하게 나며, 너무 빨리 입안에서 홀랑 사라지는 그런 매력의 디저트였다. “윙” 전동 휘핑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곧 달큼하고 녹진한 크림을 맛볼 수 있다는 신호로, 발을 동동, 심장을 콩닥거리게 할 만큼 신나고 설레는 신호였다. 휘핑이 다 되면, 엄마가 설거지를 도와달라며 휘핑 날을 떼어 주셨다. 나는 휘핑 날에 남아 있는 크림을 핥아 먹었다. 스테인리스 날들이 혀에 닿으며 생크림이 녹는 느낌이란! 나는 아직도 방금 휘핑한 크림을 먹을 때면, 그때의 황홀한 추억에 감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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