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내게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성령이 내게 일러주시는 것뿐인데, 어느 성읍에서든지,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하기만 한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22-24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그를 만류하는 공동체 지체들에게 바울은 담대하게 이야기 합니다.
"가면 힘들 거 알고 있어요. 근데 복음 전하러 가는 건데 목숨이 아깝겠습니까?"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는 복음에 대한 '죽으면 죽으리라'의 태도. 이 정수가 잘 드러나 있는 사도행전의 구절들을 깊이 묵상하며 로고스호프에서의 두 번째 사역을 준비했었습니다. 9월 4일, 비행기가 저를 가나 땅에 내려놓을때에도 이 말씀을 되새겼었지요.
그리고 3주가 흘렀습니다. 타코라디(Takoradi) 항구의 전경을 바라보며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오늘, 저는 로고스호프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게 이 사도행전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오셨는지 새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네? 아무도 모른다고요?"
사무실에 앉은 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마주앉은 저의 상사(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과장'이라 하겠습니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제가 로고스호프에 다시 돌아온 결정적인 이유는 이 과장의 초대 때문이었습니다. 배에 프로젝트 워커(Project Worker)로 돌아와 제가 2019년부터 3년간 진행했던 '예술 문화사역(Creative Ministries)'을 다시 재개 및 진행시켜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출국을 준비하며 매일 몇 시간씩 매달리도록 했던 프로젝트가 되었지요.
그랬기에 로고스호프에 도착한 일주일 만에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출국 한달 전부터 진행되었던 사전 화상 회의를 통해 저의 업무에 대한 세세한 비전을 그려 주었던 과장이, 너무나도 바쁜 일정 때문에 저와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될 부장과 팀장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인 즉슨, 저와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은 저의 업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고, 회의 내용이 문서화 되지 않았기에, 저의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수많은 불필요한 설득과 미팅이 오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앞으로의 프로젝트에 큰 난항이 예상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우리는 가나의 타코라디(Takoradi)에 도착했습니다. 늘 그렇듯, 모든 선교사들이 갑판에 올라와 북을 치고 자기 나라 국기를 흔들며 새로운 항구에 대한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몇년 만의 광경인지라 제 마음도 덩달아 들떴지만, 지난 밤 알게 된 사실 때문에 아직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저를 초대하였지만 제대로 맞아 줄 준비를 하지 않았던 리더에 대한 실망감과, '나는 중요한 일을 하러 온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하는 일말의 교만함 위에, 저는 다음의 질문을 던져야만 했습니다.
배가 새로운 지역의 사역들을 준비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의 3개월의 전부를 사용해도 모자랄 이 시간에, 나의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시스템과 싸우고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가?
결국, 저는 남은 두달 반을 좌지우지할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물러나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남은 선택지 두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 초대를 받았던 내용대로 사역할 수 없는 현실에 불만을 표출하고 그대로 하선하여 귀국하거나 2) 남은 3개월을 채우기 위해 다른 부서에 가서 사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어컨 기사를 불러서 왔는데, 에어컨 고칠 필요가 없대요.
그럼 그 기사는 그냥 집에 가는 게 맞지 않나요?"
통화하며 부모님께 따지듯 물었습니다. 저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시는 부모님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습니다. 부모님 마음에도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만류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잠깐의 정적 후, 엄마는 믿음의 도전 한 마디를 꺼내셨습니다.
"엄마는 태희가 한국에서 로고스호프를 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걸 기억해. 그때 하나님께서 하셨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는 없을까?"
맞는 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로고스호프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단순히 제가 할 프로젝트만 놓고 기도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배 사역에 몸과 마음이 지친 사역자들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그 부흥에 참여하고 싶다는 갈망 또한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로고스호프 사역의 가장 중요한 이유와 목적: 아직 그리스도의 희망을 모르는 이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제가 어떤 부서에 있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는 순간, 제 안 깊은 곳으로부터 한국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예배하기 위한 것."
이 문장에 저는 정말 진심이었을까요? 이 예배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배에서 3년 사역한 '짬'이, 배 사역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업무적인 능력이… 제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배설물이 될 수 있을까요? 복음을 위해 내가 주장하고픈 모든 권리와 대우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배의 예술문화 사역을 책임지는 사역을 떠나, 다시 매일같이 그릇을 닦거나 변기를 청소하는 등의 단순 노동을 통한 사역을 시작한다 해도, ‘복음만 전할 수 있다면’ 저는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배에 남아 다른 부서에서 사역하겠다는 선택으로 바울이 말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자세를 살아내 볼 수 있다면, 이번 3개월의 시간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로운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다시 그릇을 닦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결국 저는 배를 떠나지 않고 로고스호프 사역자 300명과 방문자 100명의 세 끼 식사를 책임지는 갤리 Galley(배의 부엌) 부서로 옮겨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오전조는 오전 5시 55분, 오후조는 오후 12시 반에 근무를 시작해, 요리, 설거지, 행사 서빙, 갤리 청소 등을 도맡아 하며 배의 실제적인 사역에 이바지하는 부서입니다. 2019년 처음 배에 단기 사역자로 왔을 때 경험했던 저의 가장 첫번째 부서이기도 합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특별한 프로젝트를 위해 배에 초대받아 온' 사람이 자신들과 같은 부엌에서 그릇을 닦고 있으니, 사역자들이 많이들 그 이유를 묻습니다. 저는 이제 이 이유를 설명할 때 저에게 업무적인 실수를 범했던 그 리더들을 폄하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와 동시에, 저에게 주어진 '특별한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깊이 들어가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갤리에서 사역하지 않는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들을 붙잡고 있는 중입니다. 오전조에 편성된 날에는 오후 전체를 이용해 선상서점이나 항구도시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소통하고, 오후조에 편성된 날의 오전에는 배의 새로운 사역자들에게 선교 관련 훈련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갤리 내부에서 매일 사역하게 되었기에, 정기적으로 배 밖으로 나가는 아웃리치 사역인 Cday가 더욱 값진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아웃리치에서는 이곳 타코라디 기반으로 활약하는 NGO 단체와 함께 마을 곳곳의 하수구 및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을 했던 날인데요. 사역 시작 전 마을의 경찰서에 방문해 인사하는 자리에서, 경찰 서장과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경찰서장은 크리스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믿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열정이 뜨거운 남자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의 죄인됨을 말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겠소?" 라 물으며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찰서장에게, 저와 팀원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의 진리에 대한 간증을 이어나갔습니다. 한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야기 끝에 경찰서장은 기쁜 얼굴로 우리를 마을에 환영해 주었고, 저는 사역 시작도 전에 소중한 경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습니다.
비록 처음에 예상했던 프로젝트는 진행할 수 없게 되었지만, 65개국에서 온 300명의 사역자들과 함께 지내는 로고스호프에서는 어떤 사역이든 꿈꾸고 실행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바꾸어 배에 남기로 한 이후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와 열정을 십분 활용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쏠쏠한 재미를 경험하는 중입니다. 친해진 한국 형제님과 매일 저녁 만나 성경공부를 하기도 하고, 배의 찬양팀의 객원 보컬이나 기타리스트로 참여해 섬기기도 하고, 3년간 배에서 지냈던 '고인물'과도 같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새로운 사역자들과 커피를 마시며, 배를 통해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나누기도 합니다.
이렇게 쏠쏠한 은혜 속에서 배의 공동체와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저에게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작부터 반전과 함께한 반드의 로고스호프 두번째 이야기.
여러분과 계속해서 나누며 기도를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빠른 요약
기도제목
1. '저의 기대가 아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고 겸손히 섬길 수 있도록' 이라는 기도의 응답에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저의 뜻보다 먼저 둘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2. 업무적인 실수를 범한 당사자들에게 미워하는 마음보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리더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의 입술에 지혜를 더하셔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3.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사수할 수 있도록. 매일 아침과 저녁시간에 먼저 말씀과 기도로 내면을 채움으로 매일의 업무와 선교사역에 필요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사역 후원 계좌: 하나은행 31789045929407 (성함과 '후원'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주세요)
전화번호(카카오톡): 010-8791-8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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