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미국 하이틴 영화에는 전형적인 클리셰가 하나 있다. 첫 데이트를 앞둔 남학생이 여자친구의 집 앞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초인종 소리에 문이 열리면, 정장을 차려입었으나 어딘지 어색하고 서툰 청년이 꽃다발을 든 채 멋쩍은 미소로 서 있다. 뻔하디뻔한 이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꽃다발에는 어색함을 풀어줄, 평범한 누군가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작지만 꽤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꽃에는 로맨스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 꽃 한 송이를 두는 것만으로도 공간은 금세 특별해진다. 그래서 난 아내와 여행을 할 때 꼭 현지에서 꽃을 한 다발 사서 선물한다.
부끄러움이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안다. 나 또한 꽃을 숨기듯 뒤로 감추거나 가방에 넣어본 적이 있으니까. 꽃을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여성들의 시선도 이해한다. 먹을 수도 없고 금방 시들어버릴 것에 돈을 쓰는 게 낭비처럼 보일지 모른다. 낭만의 형태는 제각각이니 그 마음을 존중한다. 의심은 살짝 접어두고 이번만큼은 가볍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당신이 꽃에 흥미가 없거나 괜히 부끄럽거나, 심지어 꽃을 싫어하더라도! 여행할 때만큼은 꽃을 사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순한 기분전환을 떠나서 생각보다 실용적인 이점도 크기 때문이다. 여행지의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카메라 앞에 서면 굳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때 화사한 꽃다발은 유용하다. 우리는 전문 모델이 아니기에 사진 찍히는 모습과 자세가 어색하다. 지금 내 손을 어디에 둘지, 어떤 자세를 취할 지 모를 때는 현지 감성 가득한 꽃다발을 가볍게 쥐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자세가 자연스러워지고 사진 전체에 화사한 생기가 돈다.
유럽에 가면 현지 시장에서 무심하게 값싼 종이나 날짜 지난 현지 신문으로 감싼 노란색 유채꽃 한 다발을 구매해서 품 안에 들고 다니며 향도 수시로 맡아보고, 예쁜 카페에서 다른 오브제와 사진도 찍어보자. 꽃은 여행 기분을 제대로 자아내는 훌륭한 소품이 되어줄 것이다.
커플 여행을 하는 남자들이라면 더더욱 꽃의 힘을 빌려볼 만하다. 낯선 곳에선 시차와 피로 때문에 사소한 일로도 날이 서기 쉽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면 꽃 한 다발과 함께 슬쩍 다가가 보면 어떨까? 길을 걷다 꽃집이 보이면 겉으로는 무심한 척 속으로는 용기를 내어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의 꽃을 애인에게 선물해보자. 꽃을 사려는데 옆에서 애인이 투덜대더라도 한 번쯤 우겨서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자.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싸우면 너무 아깝잖아. 예쁜 꽃 보고 기분 풀어줘.”라고 말해보자. 설마 꽃에 침을 뱉을 여자가 있을까…(있다면 미안하다) 분명 못 이기는 척 향기를 맡아보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을 것이다.
게다가 커플이 꽃다발을 들고 다니면 지나가는 유럽 현지 사람들이 굉장히 호의가 담긴 눈빛을 보내온다. “오, 멀리 여행와서 레이디에게 꽃도 주고 말이지. 요즘 보기 드문 멋진 청년이구만”하면서 당신을 기특하게 바라볼 것이다. (특히 중년 여성분들이)
어렵사리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평소 안 사던 꽃을 선물했는데 아내/여자친구와 화해하지도 못하고 사진도 예쁘게 찍지 못하고, 현지 사람들의 호감 어린 눈빛도 받지 못했다면 미안하다. 세상일이 꽃다발 하나로 다 풀리지는 않는다.
만약 여전히 애인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꽃으로는 수습 안 될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지도. 꽃은 여행의 피로와 서운함을 녹여주는 빙판길 위의 ‘염화칼슘’ 같은 존재다. 이미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면 임시방편일 뿐이겠지만, 적어도 미끄러운 길을 조금은 안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짧은 경력의 유부남이지만, 꽃 선물로 아내의 마음속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본 경험이 꽤 있어서 하는 소리다. 곧 더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아, 더 실용적인 팁을 들고 돌아오겠다.
추신: 만약 애인이 좋아하는 색을 모른다면, 꽃을 사기 전에 그것부터 파악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 제 아내는 노란색과 주황색을 좋아해서 저는 주로 해바라기나 프리지아, 튤립을 공략하곤 합니다. 슬쩍 미리 물어보고 깊이 새겨두세요. 언젠가 저에게 고마워할 날이 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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