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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페이지, 한 때는 잘 나갔던 / 가연

2025.03.18 | 조회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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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슬래시

평화와 커먼즈의 렌즈로 세상을 봅니다.

미군기지가 있던 동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때 잘나가던 동네’라는 것. 동두천, 의정부, 춘천, 원주 등 미군기지를 품었던 동네는 기지를 중심으로 번화했던 기억이 존재한다. 의정부시 작은 동네에 1,500명 남짓되는 미군들이 매일 쏟아져나와 호황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고 (이근평, 2021년 10월 14일, JTBC 뉴스룸), 춘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하루에 1000불, 2000불 넘게 벌던 때도 있었다 (오세현, 2020년 6월 19일, 강원도민일보). 이들은 대부분 외환위기도 빗겨 갈 정도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던 동네였다 (정성욱 & 박다예, 2021년 1월 10일, 중부일보). 춘천의 경우, 캠프페이지 주변 소양로와 근화동, 명동에 미군들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됐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와있던 시절’이다. 강원도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외국인 전용 술집, 양복점은 물론이고 난초촌, 장미촌, 백합촌 등 기지촌까지 들어섰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외국계 은행도 설치됐다.”

각 지역에 기지가 차지했던 지리적, 사회문화적 비중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군기지라는 외부 요인을 중심으로 도시가 기형적으로 발달했다가 쇠락했다는 공통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동두천의 경우 시 전체 면적의 42%에 해당하는 ‘노른자 땅’이 미군기지에 돌아갔고, 이에 따라 ‘미군 맞춤형’ 도시로 발전했다 (정성욱 & 박다예, 2021년 1월 10일, 중부일보). 그러나 반세기 넘게 유지되었던 상권은 미군의 철회로 급속히 흔들렸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이유로 동두천의 병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2004년에 발표된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라 전 기지가 반환될 예정이었다. 이때부터 상권이 쇠락하기 시작했던 동두천시는 미군기지 반환에 맞춰 도시 개발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014년 한미 양국은 제46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전략상의 이유로 210화력여단이 한강 이북인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잔류하기로 돌연 결정했다. 도시 개발에 용이한 부지에 캠프 케이시가 잔류하면서, 동두천의 시계는 2014년에 멈췄다. 현재 동두천 외국인관광특구거리의 상점 220개 중 50개는 폐업한 상태이고, 영업하고 있는 상점들의 매출도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이근평, 2021년 10월 14일, JTBC 뉴스룸).

춘천의 경우 동두천시보다 미군기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작지만, 사회경제적 의존도는 적지 않았다. 캠프페이지 주변 서쪽 소양동과 근화동 일대는 1980년대까지 상권이 크게 발달했다가 주한미군의 철수에 따라 1990년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춘천시는 도시계획·개발 과정에서 군사기지와 기지촌의 이미지를 지우고 관광·공업·교육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소양동의 반대 방향인 남동쪽으로 도시를 확장했다(춘천, 기지촌, 정충실, 한국학연구 제68집). 이 과정에서 서쪽 소양동과 근화동 일대는 개발에서 소외된 채 방치되었고, 2005년 캠프페이지 반환 이후 급속도로 슬럼화되었다. 특히 동 면적의 절반 이상을 캠프페이지 부지가 차지하고 있는 근화동은 2010년 캠프페이지를 관통하는 평화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신도심과 단절되었고, 춘천시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 되었다.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되는 해였던 2015년의 춘천시 조사에 따르면, 근화·소양지역의 노인인구 비율은 30.8%로 춘천시 평균인 18.9%에 비해 11.9%p 높았으며 기초수급자 비율은 8.7%로 춘천시 평균(4.9%)의 두배였다.

국가안보 덕분에 불안해진 인간안보

주한미군은 전통적인 국가 안보 개념에 따라 ‘전략적인 군사 요충지’에 자리 잡는다. 한강 이북의 동두천과 의정부가 북한의 공격에 대응하기 적절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미군기지가 자리를 틀었다. 춘천 또한 냉전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증명된 최전방 요충지였기에 주한미군 부지로 선택됐다. 이때 지역은 미군기지가 자리 잡는 데 감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국가 안보’상의 결정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언제든지 공격해 올 수 있다는 공포심이 강력하게 작용했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미국이 변경한 군사 안보 전략에 따라 주한미군 기지가 재배치되면서, 기지는 새로운 전략적 거점으로 이동했다. 이때 지역은 미군기지가 떠나거나 남는 데 목소리를 낼 수는 있었지만, 그 소리는 이내 공허하게 흩어졌다. 여전히 ‘국가 안보’라는 명목하에 ‘불명확하고’, ‘급작스럽게’,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지역에 통보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가 안보 구조에서 지역은 일방적으로 선택되고, 소비되고, 버려졌다. 미군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여러 ‘불안’이 남겨졌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인간개발보고서 1994>에서 발표한 ‘인간 안보’에 따르면, 군사적 측면의 위협뿐만 아니라, 국가 내 혹은 국가간에 발생하는 다양한 차원의 위협으로 인해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안보의 문제로 인식한다. 비록 인간 안보가 국가 이외의 존재를 안보의 주체로 열어놓지 못하고, 비인간 존재를 안보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지만, 미군기지 반환에 얽혀 발생하는 여러 지역 문제를 안보의 차원으로 조명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인간 안보가 제시하는 안보 영역은 다음 7가지다. 경제, 식량, 건강, 환경, 개인 안전(고문·전쟁·탄압·범죄·젠더폭력·아동학대 등), 공동체 차원의 안전, 정치. 이를 기준으로 볼 때, 동두천과 의정부, 춘천 등의 지역은 경제, 건강, 환경, 개인, 공동체 차원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앞서 서술한 경제 불안은 물론이고, 기지 반환 이후 드러난 심각한 오염문제로 건강 안전 및 환경 안전이 침해되었으며, 대부분 물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기지촌에서 발생했을 젠더 폭력은 개인의 안보를 흔들었고, 슬럼화된 미군기지 터는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군은 누구로부터 누구를 안전하게 했는가? 안전을 위해 주둔했던 미군이 떠난 자리에는 왜 불안만 남았는가?

그리고 남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주한미군 만오천여 명이 떠난 동두천은 현재 정부 주도의 산업단지 조성을 계획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춘천 캠프페이지 반환 이후에 낙후된 채 방치되었던 근화동 일대는 100억 규모의 도시재생사업 지역으로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만 6년간 개발이 진행됐지만, 시민들은 그 실효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환된 캠프페이지도 방치된 지 10여 년 만에 새로운 공간으로 되살아날 기회가 열리는 듯했으나, 뒤늦게 밝혀진 토양 오염문제로 발이 묶였다. 미군기지는 국제 이슈이자 지역 이슈다. 그러나 기름에 뒤섞인 채 방치된 59만여 제곱미터의 넓은 공터는 지역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짓눌렀던 캠프페이지 터에는 뿌리가 강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토끼풀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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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연

피스모모에서 평화와 저널리즘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갈등전환, 평화저널리즘, 소통을 키워드로 저널리즘을 통한 평화세우기의 비전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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