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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페이지, 한 때는 잘 나갔던 / 가연

2025.03.18 | 조회 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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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지가 있던 동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때 잘나가던 동네’라는 것. 동두천, 의정부, 춘천, 원주 등 미군기지를 품었던 동네는 기지를 중심으로 번화했던 기억이 존재한다. 의정부시 작은 동네에 1,500명 남짓되는 미군들이 매일 쏟아져나와 호황을 이루던 시절이 있었고 (이근평, 2021년 10월 14일, JTBC 뉴스룸), 춘천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며 하루에 1000불, 2000불 넘게 벌던 때도 있었다 (오세현, 2020년 6월 19일, 강원도민일보). 이들은 대부분 외환위기도 빗겨 갈 정도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던 동네였다 (정성욱 & 박다예, 2021년 1월 10일, 중부일보). 춘천의 경우, 캠프페이지 주변 소양로와 근화동, 명동에 미군들을 상대로 한 상권이 형성됐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와있던 시절’이다. 강원도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외국인 전용 술집, 양복점은 물론이고 난초촌, 장미촌, 백합촌 등 기지촌까지 들어섰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외국계 은행도 설치됐다.”

각 지역에 기지가 차지했던 지리적, 사회문화적 비중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군기지라는 외부 요인을 중심으로 도시가 기형적으로 발달했다가 쇠락했다는 공통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동두천의 경우 시 전체 면적의 42%에 해당하는 ‘노른자 땅’이 미군기지에 돌아갔고, 이에 따라 ‘미군 맞춤형’ 도시로 발전했다 (정성욱 & 박다예, 2021년 1월 10일, 중부일보). 그러나 반세기 넘게 유지되었던 상권은 미군의 철회로 급속히 흔들렸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이유로 동두천의 병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2004년에 발표된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라 전 기지가 반환될 예정이었다. 이때부터 상권이 쇠락하기 시작했던 동두천시는 미군기지 반환에 맞춰 도시 개발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2014년 한미 양국은 제46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전략상의 이유로 210화력여단이 한강 이북인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잔류하기로 돌연 결정했다. 도시 개발에 용이한 부지에 캠프 케이시가 잔류하면서, 동두천의 시계는 2014년에 멈췄다. 현재 동두천 외국인관광특구거리의 상점 220개 중 50개는 폐업한 상태이고, 영업하고 있는 상점들의 매출도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이근평, 2021년 10월 14일, JTBC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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