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올해 2월, 필리핀과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따라 필리핀 내 군기지 4곳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군은 기존에 필리핀에서 사용하고 있던 군사 시설 5곳에 더해 추가로 4곳의 기지 또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인데요. 도대체 미군이 말하는 필리핀 기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은 미국의 군사기지 접근권 요청에 대해 “(미필) 동맹 현대화를 위한 노력의 일부분일 뿐이며, 중국이 서필리핀해에 대한 불법적 주장을 계속하고 있어 특별히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접근권을 얻은 기지 4곳의 위치는 두 달이 넘도록 비밀에 부쳤는데요. 필리핀 국방부는 4월 3일이 되어서야 미군이 추가로 확보한 군사기지를 공개했습니다.* 이 발표는 미국과 필리핀 군대의 대규모 연합 훈련인 ‘바리카탄(Balikatan)’ 훈련**을 일주일가량 앞둔 시기에 이루어져서 역내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한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필리핀 내 미군 주둔과 핵무기 사용 반대 활동을 조직하고 있는 코라존 파브로스(Corazon Valdez Fabros, 이하 코라)는 온라인으로 진행된 더슬래시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이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위협’이라고 말합니다. 2023년 들어 일본과 한국은 물론 오스트레일리아와 필리핀은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한 층 강화하고 있고, 미군기지를 개선 및 확대하기 위해 더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정부 또한 4월 3일, 미군이 사용할 기지 4곳의 위치를 밝히며, 미군이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군사 기지 ‘인프라 투자’에 8,200만 달러가 넘게 ‘자금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코라는 이러한 국방 예산 투입을 통한 군 시설 현대화는 결국 필리핀 내 미군기지 설치를 위한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설들은 실제로 미국이 독점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필리핀 정부도 시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할 권한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필리핀의 신헌법이 ‘미군은 필리핀에서 자체기지를 운영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87년에 국민투표를 통해 개정된 이 헌법 기반으로 사실상 미군은 1992년에 필리핀에서 철수한 상태입니다. 물론, 1999년에 방문군지위협정(VFA)으로 미-필 합동 군사훈련이 가능하게 되었고, 2014년에는 앞서 언급했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체결하면서 미군이 필리핀에 중장기 주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개 군사기지도 제공 받았죠. 하지만 여전히 외국군의 주둔은 필리핀 헌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미국이 미군기지(base)를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된 위치(agreed location)’를 ‘사용’한다고 강조하는 속내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미군은 필리핀 헌법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헌법은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필리핀 기지라고 고집하는 거에요. 헌법 조항을 우회하는 방법인 거지요.”
코라는 미국이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벌어질 ‘만약의 사태’에서 필리핀의 ‘안보’를 지켜주기 위해, 필리핀 기지의 추가 사용을 요청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표현’이라고 짚습니다.
“필리핀의 국방 안보를 위해서라고요? 그러면 왜 미군은 모두 대만에 가까운 필리핀 북부에만 주둔하나요? 기지 위치도 필리핀의 선택이 아니에요. 미국의 선택으로 정해졌어요.”
큰 미군기지가 위치한 수빅(Subic)이나 클락(Clark)은 오래도록 원주민이 거주하던 지역이지만, 기지를 세우며 주민의 동의나 협의 절차가 포함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단지, 지리적으로 다양한 군사 훈련에 적합한지 여부만 고려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결정할 뿐이죠.
“지역 주민의 동의나 협의는 절차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투명성이 없습니다. 항상 정부 간의 협상만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필리핀의 미군 기지 문제에 대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목적이 교묘하게 왜곡되어 미군 기지가 아닌 필리핀 기지라는 이름 아래 숨어있다고 생각해요.”
미군의 ‘카모플라쥬(camoflage, 위장술)’가 가능한 데에는 미디어를 통해 필리핀 내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반중 담론도 크게 자리합니다. 중국과 필리핀은 서필리핀해(남중국해)의 영토주권을 놓고 수년간 갈등을 빚고 있는데요. 필리핀의 디지털 허위정보에 대한 한 연구는 유엔 상설중재재판소가 2016년에 내린 판결을 중국이 무시했던 것과 중국 이민자 수 증가, 영토주권 분쟁 지역에서 일어나는 중국과의 충돌을 소셜미디어에서 허위/과장하여 유포하는 것 등이 필리핀 내 반중 감정을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또한 중국에 대한 허위 정보를 정치권이 유권자를 사로잡는 데 이용하면서 사회적인 분열로 이어지고 있다고 덧붙입니다.
“반중 담론이라고 부르는 허위 정보로 인한 ‘레드 스케어(red scare)****’입니다. 이런 담론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어요.”
필리핀 여론조사기관 펄스 아시아가 2022년 6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필리핀 응답자 중 33%만이 중국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한 반면, 89%가 미국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했고, 84%가 “미국과 협력해 남중국해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답한 것을 보면, 중국에 대한 반감이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구조를 떠받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은 9개의 ‘합의된 위치’에 미군이 들어오지만, 9개로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계속 운동을 쌓아나가야 하는 이유에요.”
코라는 모두가 서로의 안보를 지키는 ‘공동안보’를 위한 미군 기지 대응 운동이 이전만큼 쉽지는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미국과 결탁한 독재 정권을 몰아내자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80년대나 90년대에 비해서는 말이죠. 오히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모두의 사고방식과 일상에 군사주의가 스며들어 있다고요. 그러나, 그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창의적인 목표로 운동을 ‘쌓아 가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은 이전보다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리고 필리핀뿐만 아니라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한국 등의 넓은 지역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요. 그래서 그 드러나지 않은 것,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모두의 힘으로 알아차리고, 널리 공유하는 작업이 더 절실히 필요한 때 입니다.
“우리 지역에서 아주 강력하고 단합된 힘을 만들어야 해요. 이런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죠? 맞아요. 계속되는 작업입니다.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더이상 여기에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계속 쌓아 가야 합니다.”
*필리핀 국방부는 루손섬 최북단 카가얀주에 있는 카밀로 오아시스 해군기지, 랄로 국제공항, 북부 이사벨라주의 멜초 델라 크루즈 육군기지, 그리고 팔라완섬 서부에 위치한 발라바크섬이 미군이 추가로 확보한 군사기지라고 밝혔다.
**제38차 미국-필리핀 간 『바리카탄(Balikatan) 연합군사훈련』은 4월 11일부터 28일간 북부 루손섬 등에서 실시되었다. 이 군사훈련에는 필리핀군 약 5,400명과 미군 약 12,200명이 참가하여, 2022년(총 약 9천명)에 비해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훈련의 주된 목적은 미군과 필리핀군 간 상호작전 운용성(interoperability)을 재확인하고, 해양안보작전과 상륙작전 능력 강화하는 것으로, 도시와 정글에서의 특수작전과 사이버 방어훈련, 대테러작전과 인도주의 지원(HA), 재난구조(DR) 작전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출처: 한국군사문제연구원)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에 따르면 미국은 필리핀군이 제공한 ‘합의된 위치’에 핵무기를 제외한 무기를 저장하고, 시설을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다. 사실상 필리핀 군사 기지 내에 미국 ‘사이트(sites)’를 배치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은 이 협정에 따라 필리핀에 ‘임대료 또는 이와 유사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
****적색공포. 공산주의에 대한 히스테리적 공포를 뜻한다. 여기서는 중국에 대한 혐오 감정을 말한다.
참고자료
“U.S. reaches military base access agreement in the Philippines”, Washington Post, 2023년 2월 2일(2023년 7월 3일 검색)
“Preparing for War in the South China Sea”, The Nation, 2023년 4월 7일(2023년 7월 3일 검색)
/가연
피스모모에서 평화와 저널리즘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갈등전환, 평화저널리즘, 소통을 키워드로 저널리즘을 통한 평화세우기의 비전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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