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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페이지, 이제는 새롭게 불러야 할 이름 / 가연

2025.03.18 | 조회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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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슬래시

평화와 커먼즈의 렌즈로 세상을 봅니다.

국가기록원은 한국전쟁 중 한국군과 유엔군 전사자를 약 77만명, 북한군 전사자 약 60만명, 중공군 약 97만명, 민간인 사망자 약 99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합산하면 한국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333만명에 달한다. 집계되지 않은 죽음까지 헤아리면 더 많은 이들이 한국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강원도 춘천시 평화로, 15년 전에는 미군기지 였던 곳의 이름은 캠프페이지(Camp Page)다. 이 미군기지의 이름은 1950년 12월 10일, 한국전쟁 중 전사한 존 U.D. 페이지 미 육군 중령의 이름이다. 의정부의 '캠프레드클라우드', 대구의 '캠프워커'와 같은 다른 주한 미군 기지들의 이름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의 이름을 땄다. 한반도 곳곳은 미국의 세계 패권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 이름을 내어주고, 미국 땅이 되어 반세기를 살았다.  전쟁에서 죽음을 맞고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의 이름으로 남은 그 사람의 삶을 생각하며 이름조차 남지 않은 수 많은 존재들을 애도한다. 

춘천역 앞, 소양동과 근화동에 위치한 반환된 미군기지 캠프페이지는 약 21만 3천평으로 축구장 106개와 맘먹는 광활한 땅이다. 왜 하필이면 춘천에 미군기지를 세웠을까? 춘천은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던 냉전시대에 미국의 동아시아 제국 설립을 위한 전략적 요지이자 중동부전선을 담당하는 최전방 보루였다. 소련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미국의 군사력을 집중시키는 ‘전진 전략’에 따른 결정이었다. 또한 춘천은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충돌했던 '춘천전투'의 격전지이도 하다. 춘천전투 이후 북이 점령했던 서울을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하고, 그 다음 해인 1951년 3월부터 미8군은 군수품을 공급하는 비행장 활주로를 근화동 일원에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제4미사일사령부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 등이 춘천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1958년에는 캠프페이지가 들어섰다. 미국이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반도를 수호해준다는 목적이었다. 냉전시대에 드리워진 미국의 안보우산 아래 춘천 캠프페이지의 시작이 있다.    

미군기지, 기지촌...도시 발전을 위해 가려져야 했던 땅

군사 안보에 따른 전략적인 이유로 세워진 캠프페이지는 2005년에 반환되기 전까지 약 50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다른 군부대가 그렇듯이, 캠프페이지 또한 카투사나 교수 등 춘천 시민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지에 드나들 수 없었다. 다만, 캠프페이지 동쪽에 접하고 있는 소양동에 미군을 위한 유흥가와 암시장이 형성되어 오랜 기간 춘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기준으로 1억원이 넘는 경제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물론, 기지촌을 중심으로 미군-양공주의 관계가 형성되어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균열을 냈다. 정충실의 ‘춘천, 기지촌’ 연구에 따르면,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담배를 피며, 한국 남성들을 조롱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공주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당시 남성들에게 반미감정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캠프페이지, 미군, 기지촌의 존재는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히 가려졌다. 정충실은 ‘춘천시 발행의 통계연보나 도시계획에서도 캠프페이지는 표시되거나 고려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일부 지도에서는 캠프페이지 부분에 실재하지 않는 도로를 복잡하게 그려 넣어 일반 시가지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강원일보 등의 지역 언론에서도 소양동 일대는 단순히 홍등가로만 언급할 뿐이며, 캠프페이지의 영향력에 비해 관련 기사 수도 아주 적다. 이는 박정희 정권 아래 근대화가 시행되던 70년대에 '산업현장의 근면한 노동'이 아닌, 캠프페이지 주변의 윤락가와 암시장 등을 통한 이윤획득 및 이를 통해 형성된 관계들은 가려져야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춘천에서 추진했던 이미지 쇄신 운동도 ‘캠프페이지 가리기’에 한 몫 했다. 춘천시는 기지 도시라는 이미지 대신 관광도시, 교육도시, 공업도시로의 기획을 시작했다. 따라서 관광·교육·공업과 관련된 지역인 춘천 동남쪽(동쪽으로 후평동, 효자동 일대, 남쪽은 공지천, 삼천동 일대)은 지속적으로 개발된 반면, 춘천의 서쪽에 위치한 캠프페이지와 소양동은 개발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배제된 캠프페이지와 소양동 일대는 2005년 기지 반환이후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다. 

공터 혹은 공유지, 여전히 불투명한 공간

1972년까지 7만 명에 육박하던 주한 미군은 2002년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 Land Partnership Plan)에 따른 미군기지 재배치로 반환이 시작되면서 28,500명으로 축소되었다. LPP는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100여 개 미군기지를 2개 권역(평택·오산/부산·대구)으로 집중 재배치하여, 주한미군의 역할을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등의 동북아 지역 방위까지 확대시키는 계획이다. 이 흐름에 따라 춘천 캠프페이지에 주둔하던 미군은 원주 캠프롱으로 이전한다. 

춘천에서는 2002년 LPP 서명 이전에 기지 반환 운동을 위한 굵직한 흐름이 형성되었다. 1999년 9월에 처음 촉발된 기지 반환 운동은 2001년 춘천시민모임 결성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결성된 춘천시민모임을 중심으로 2003년~2010년까지 캠프페이지 '헬기 소음 손해배상 집단소송', 2005년에는 '캠프페이지 무상 양여 10만 서명 운동' 등 캠프페이지를 대상으로 춘천 시민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29일, 기지가 폐쇄되었고, 무너진 담벼락 너머로 캠프페이지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반세기 이상 가려져 있던 그 땅은 시민들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캠프페이지 무상 양여를 외쳤던 10만 춘천 시민들의 목소리는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고, 춘천시는 캠프페이지 매입비용 1,217억 원을 5년에 걸쳐 지불했다.

캠프페이지 기지 폐쇄식 이후, 환경오염조사 및 환경 정화 작업이 진행됐지만, 그 과정은 불투명했다. 2005년에 캠프페이지 부지에 대한 첫 환경오염 조사가 이루어고도, 군사기밀이라는 이유로 그 결과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이후 2006년에 녹색연합이 환경부 문건을 공개하며, 부지 내 토양 오염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공론화했다. 땅 밑에는 활주로로 이용했던 아스콘층이 남아있었고, 유류 오염 물질도 남아 있어, 그대로 두면 식물이 자라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한 차례 더 토양 오염 조사와 정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2011년 국방부에 최종 반환되었다. 

2013년에는 민간에 개방되었으나, 7년이 지난 2020년까지 공터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2020년 5월, 캠프페이지 부지 개발을 위한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토양 내 기름띠와 폐아스콘층이 발견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1m 아래 땅 속에 묻혀있던 기름통 30여개가 발견되었다. 토양 오염 정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이에 춘천시민연대 등 춘천의 시민사회와 지자체가 비교적 빠르게 대응했고, 2020년 11월 말에 ‘토양오염 재검증을 위한 민간 재검증단’을 구성했다. 이후 민간 검증단은 세 차례의 정례 회의를 거쳐 재검증 및 재정화 작업을 위한 수순을 거쳤고, 한 차례 재검증 착수가 연기되었으나, 2021년 3월 16일에 토양오염 재검증에 착수했다. 그러나 재검증 착수 직후 유류 오염 의심토양이 발견되었고, 시료 분석 결과 2곳에서 법정 기준치의 14배를 웃도는 오염물질이 발견됐다.

토양 오염과 부실정화에 대한 책임, 그리고 재정화 비용을 놓고 국방부와 환경부, 춘천시와 춘천 시민사회는 한동안 씨름했다. 그러나 정작 50년간 캠프페이지를 사용한 주한미군은 이 갈등에서 면제되었다. 결국 지난 8월 18일, 1차 부지 재정화 비용인 31억원은 국방부에서 부담하기로 결정됐고, 춘천시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약 2년간 오염된 토양을 모두 기지 밖으로 반출해 처리하는 대대적인 재정화 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반환된 공간에서 장소가 되려면

캠프페이지는 2013년 시민에게 개방된 이후, 주로 단발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반환된 미군기지 혹은 옛 캠프페이지 터는 한 때 춘천 닭갈비 축제, 춘천 마임 축제 행사장으로 사용되거나, 미군이 사용하던 물탱크를 활용하여 물놀이장으로 개방되었다. 메밀꽃밭을 조성하여 관광객 유치를 노렸던 시기도 있었으나, 결국은 부지 한 편에 드라마 세트장과 체육관, 육아종합지원센터가 들어선 것이 실질적인 부지사용의 전부다. 캠프페이지는 50년 넘게 춘천에 존재했지만, 그 땅에 춘천 사람들의 발길이 허용된 시기는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지역의 발길이 닿지 못했던 그 곳은, 아직도 ‘공간(空間)’으로 남아있다. 

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라는 책에서 공간과 장소의 차이점을 짚어낸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어 가치가 부여되면서 ‘장소’가 된다. 공간은 움직이는 곳이지만, 장소는 ‘정지’가 일어나는 곳이다. 움직이다가 멈추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곳이 장소다. 이런 관점에서 캠프페이지는 지역의 경험과 삶이 녹아들 기회가 대부분 배제되었기에 ‘공간’이다. 

본래 앞뜰이라는 의미의 앞두루 또는 전평이라고 불리던 곳은 무궁화나무가 많은 지역라고 해서 근화(槿花)동으로 불렸다. 캠프페이지라는 이름이 붙고 나서는 오랜 시간 '미군기지' 혹은 근화동 부근으로 에둘러 불리거나, 때로는 지도에서 지워진 채 지역에서 분리되어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는 텅 비어있는 땅으로, 재생되기에는 많은 노력과 자본이 투입되어야하는 오염된 반환지로 남았다. 

공간이 장소가 되려면 지역의 경험과 삶이 녹아들어 다양한 의미가 되살아나야 한다. 옛 어른들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생활신조를 반영하여 집에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지역의 삶과 가치를 담아 캠프페이지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야한다. 지역 사람들이 오다가다 멈추어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캠프페이지라는 땅에 경험이 축적되어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길 바란다. 그렇게 캠프페이지가 춘천이라는 지역에 뚜렷이 존재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땅 속 깊이 박혀 있는 안보의 역사를 되뇌고, 시민들이 오랜 기간 땅을 밟으며 캠프페이지라는 공간의 장소성을 곱씹는 작업이 일어나길 바란다. 그러면서 춘천이라는 지역의 역동에 맞게 땅의 효용성이 차츰차츰 회복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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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연

피스모모에서 평화와 저널리즘의 교차점을 모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갈등전환, 평화저널리즘, 소통을 키워드로 저널리즘을 통한 평화세우기의 비전을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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