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관적 진상조사와 책임자 엄중 문책, 재발 방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도대체 뭐 하는 조직인가
윤석열의 내란 시도에 이어, 이번에는 투표용지 부족 사태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는 일이 자꾸 벌어지자, 사람들의 한숨과 분노가 커지고 있습니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라”던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정작 투표하러 온 유권자들에게 용지 한 장 쥐어주는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제(8일)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지방선거 당일 투표용지 부족 투표소가 총 91곳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투표용지가 100장 이상 모자랐던 곳도 많았고,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최대 436장(서울 송파구 잠실4동 제7투표소)까지 부족했던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선관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송파구에서 미개표 투표함이 개표 이후 뒤늦게 발견되었다거나, 선관위가 투표소 현장에 유권자 개인정보가 포함된 선거 물품을 누락하고 떠났다는 둥 여러 후속 언론 보도들도 줄을 이었습니다. 오늘(9일)은 아예 청주에서 선거인 명부에 1,295명이 누락되었다는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온갖 괴담과 뻔한 가짜뉴스들까지 접하다보면, 이런 사태를 초래할 바에야 선관위라는 조직 자체가 대체 왜 있는지 근본적 의문이 듭니다. 이들에게 진정 민주주의네 선거네 하는 것이 중요하기나 했던 것일까요?
이미 밝혀진 얘기들만 보아도 선관위는 그저 세금루팡, 월급루팡이었습니다. 지방선거 당일, 투표소를 지키던 일반 공무원들이 오후 2시쯤부터 투표용지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조치를 요청했지만 선관위는 수수방관했습니다. 애초에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이유도, 비용 절감을 위해 4년 전부터 연구를 통해 낸 ‘묘책’ 에 따라 유권자 수의 50%만 인쇄해 여유 없이 배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관위가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비용 몇 푼 아껴보겠다고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선거에서 특정 진영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상황이 되면, 투표율이 예상보다 갑자기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관위에서는 가장 바빠야 할 선거철마다 대거 휴직자가 발생하는 것이 관행이었다는 얘기까지 들립니다. 이러니 2022년 대선(소쿠리 투표 논란), 2025년 대선(투표용지 식당 반출 논란) 등 선거철마다 이미 온갖 잡음이 반복된 것도 그럴 만해서 그랬구나 싶습니다.
선거의 최소한의 의미조차 무너지지 않도록
이번 사건의 진상은 정말 철저히 조사되어야 합니다. 보통선거권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이 오랜 역사 동안 싸워 얻은 소중한 권리입니다. 투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전에 정해진 기간과 장소에 간다면 누구나 외부의 방해나 간섭 없이 투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투표로 표현된 사람들의 의사는 조작되어서는 안 되고, 투표 결과 역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합니다. 이는 최소한의 기준선입니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나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후보자가 되더라도 이미 각각이 지니고 있는 자원과 조직, 영향력이 달라 유권자들 다수에게 자기 뜻을 알리고 설득할 기회가 공평한 것도 아닙니다.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도, 이미 사회 도처에서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 앞에서 눈치를 보기 일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라는 절차 자체까지 엉망으로 운영된다면, 정말이지 민주주의란 껍데기조차 없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선거관리위원회는, 그런 최저선을 지켜야 할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닥을 무너뜨리는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실무자부터 의사결정권자까지 낱낱이 모두 밝히고,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이든 오민석 서울시선관위원장이든 사퇴했다고 끝날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사전에 파악하고 방지할 체계가 지금까지 있었는지, 없었다면 이유는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이런 일을 막을 것인지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고 객관적인 진상조사 결과 투표권 침해가 심각했던 것으로 밝혀지는 지역이 있다면, 해당 지역 관련 선거에 한정하여 다시 선거를 치러야 할지의 문제도 그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토론해 직접 결정할 수 있도록 열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음모론과 정파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조사를 요구해야
그런데 제대로 대책을 세우려면, 제대로 된 조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번 선거의 가장 큰 이해관계자였던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당의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엄정한 독립적 조사를 요구해야 하고, 그들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세간의 음모론들에도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 관점이 필요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시작된 선관위 진상규명위원회 차원의 자체 조사든, 차후 이루어질 국정조사나 특검의 조사든 모두 편향과 정략적 왜곡이 없는지 철저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국민의힘(특히 친윤)과 극우들은 이번 사건이 민주당 정부의 이익에 따라 선관위가 부정선거를 하려던 것이라고 사태를 몰고 가려 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부정선거를 기획한 세력이 있다면 그들이 유권자들에게 투표용지가 모자란다고 직접 알려 논란을 자초하는 방법을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그랬던 것처럼, 몰래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든 투표함에 조작된 기표된 용지를 집어넣든 ‘걸리지 않을’ 방법을 택해야 그들은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표 조작이란, 승리할 자신감이 없는 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기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언론도 민주당 자신도 심지어 출구조사 결과도 모두 민주당의 낙승을 예측했습니다. 어차피 다수 지역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민주당이 굳이 왜 그런 위험한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이런 점 때문에, 소위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역(逆)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이나 선관위 내부에서 극우에 포섭된 세력이, 민주당이 승리할 수 있는 선거의 정당성을 깎아내리고 부정선거 논란으로 극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일부러 이런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 역시 객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윤석열이 임명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그가 선관위원장이 될 자격을 갖추도록 대법관에 임명한 것은 김명수 대법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또, 노태악 선관위원장은 윤석열의 내란 당시 부정선거 음모론에 따라 처단 대상 리스트 중 상위권에 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음모론들을 모두 걷어내고, 지금까지 드러난 확실한 사실관계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의 규모와 경위에 대해서는 조사가 더 필요하지만, 투표의 신뢰성을 실추시키는 부실투표가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 “선관위 운영 등 선거관리 제도의 심각한 허점과 책임자들의 무능이 드러났다”. 즉, 선관위라는 관료적 행정기구의 오랜 방만함이, “사실 너희들 국민의 뜻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무의식 속 진심을 언뜻 드러낸 것입니다.
극우는 지금 말 보탤 자격 없다
한편, 이 사건의 심각성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 일부는 이번 사건이 “좌우를 떠난 문제”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유권자 각자의 정치 성향을 넘어선, 민주적 절차의 기본 신뢰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취지로서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자들, 이 말이 적용될 자격도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로 장동혁, 전한길, 이진숙 같은 극우세력이 그들입니다. 투표에서 수백 표, 수천 표 민의가 훼손되는 것에 이토록 항의하는 자들이, 5천만 명의 민주적 권리가 위협받은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옹호한다는 것이 말이 되질 않습니다. 게다가 윤석열 내란의 논리적 근거가 바로 극우의 부정선거론이었다는 점에서, 지금 상황에서 극우세력이 민주주의를 지키자며 부정선거론을 내세우는 것에 더더욱 소름이 돋습니다. 윤석열은 지난 총선이 부정선거였다며 내란으로 국회를 무력화할 것을 계획했고, 이후 비상입법기구를 통해 입법권과 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뒤 장기 독재를 하려했습니다. 이를 위해 북한에 무인기를 띄워 도발하고, 내란 직후 더불어민주당 소속은 물론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까지 포함하는 다수의 정치인, 노동조합 대표자, 언론인 등도 ‘살생부’를 만들어 체포하려 했습니다. 결국 극우들에게 민주주의란 전두환 정권 하의 체육관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무엇보다, 사실 극우들에게 지금 이 사안은 전혀 “좌우를 떠나”있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 사건을 이용해 민주당 정부를 공격하고, 국힘 내부의 절윤 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윤석열과 내란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오래도록 내세워온 궁색하고 비과학적인 부정선거 음모론이 올바랐다고 우기기 위해 이 쟁점을 이용하려 할 뿐입니다. 정작 자신들이 내세워 온 부정선거론은 1) 선관위가 사전투표함을 바꿔치기했다, 2) 선관위 내부 서버와 선관인 명부 시스템이 해킹되었다, 3) 전자개표기가 오류를 일으키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4) 선관위가 투표지를 위조하고 있다는 따위의 내용으로,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사실관계와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사건의 진상 파악이나 대책 수립에 사실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그저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 것, 그럼으로써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를 기초부터 더 후퇴시키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진보좌파 활동가들의 과제
진보좌파 활동가들은, 이번 선거관리위원회의 만행에 대해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계속 분명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극우들이 내세우는 ‘부정선거’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이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이재명 정부가 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나 선거 운영 과정의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그 또한 분명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상 규명과 문책, 대책 수립 과정에서 더 타당한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좌파들이 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 하는 사람들 중 더 많은 이들이 극우의 주장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쟁점을 초기부터 이슈로 띄우고 적극적으로 키우려 한 것은 극우 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관위가 벌인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점점 더 많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목소리 내는 사람들, 특히 청년세대 남성 다수를 극우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재명 대통령 자신도 바로 이런 점을 포착했기 때문에, 기존의 미온적 입장을 철회하고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대학가에서 연이어 발표되는 시국선언들의 다수는 부정선거를 주장하거나 재선거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2030 청년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웹사이트 커뮤니티들에서도 극우와는 선을 긋고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습니다. 올림픽공원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위는 극우들의 주도력이 종종 드러나고 점점 더 그런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듯 하지만, 그곳에서조차 구호와 시위 방식을 둘러싸고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습니다(태극기는 되지만 성조기는 안 된다거나, 재선거는 요구할 수 있지만 부정선거 구호는 외치지 말아야 한다거나, 극우 유명인이나 정치인들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말자거나 등등. 물론 그곳에서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꽤 우파적인 축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좌파들이 관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좌파의 섣부른 오해와 단정이야말로, 이 문제에 꽂혀있는 청년 세대를 극우 세력에 더 가깝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절차적 공정성”을 시대정신으로 여기게 된 다수의 청년들, 특히 탈(脫)정치와 반(反)민주당을 자신의 모순된 기본 정서로 간직한 그들이, 이번 사건에서 다른 세대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극우와 거리를 두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표현할 수 있도록 사태에 개입해야 합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런 쟁점에서도, 좌파들이 그들과 함께 같은 지점에서 분노하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극우가 활개치는 것을 막는 일은, 오롯이 그러한 일을 분명히 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유연성과 단호함을 모두 발휘할 때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VF]
다가오는 베프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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