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 뿐'

한강, 마크 로스코, 그리고 루이스 부르주아

2024.11.11 | 조회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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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텍스트힙 이전에 지적허영이 있었다
텍스트힙 이전에 지적허영이 있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달 여 지나가는 시점, 다시 한번 축하와 애정을 보냅니다. 덕분에 독서가 본격적으로 트렌드에 오른 것 같습니다. 텍스트힙이나 과시용 독서라는 단어가 신조어로 등장한 게 참 신기하고 즐겁습니다. 올해 성황을 이룬 도서전에서도 출판계의 빛과 소금이라는 표현이 화두가 되기도 했죠. 우리 모두 지적허영을 채우려다보면 언젠가는 예술적으로 충만해진 나를 만나게 되지 않겠어요?  덕분에 저도 미뤄둔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판권 페이지를 펼쳐보니 10월 말 찍어낸 따끈따끈한 52쇄더라고요. 작가는 시로 등단했지만 첫 시집이 나오는 데까지는 거진 20년이 걸렸죠. 그만큼 천천히 써내려갔을 시를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아, 소설에는 서사와 화자라도 있어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확보한 느낌인데, 시에는 정말 서정 특유의 1인칭 감정이 생생하게 와닿아요. 한강 작가의 글을 오랜만에 읽으니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아픈 기분이 들었습니다. (칭찬입니다)

눈 앞에서 타인의 고통을 목도하면 몸이 저절로 그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랄까요. 시의 화자는 삶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데 있어, 유난히 투명하고 얇은 피부를 갖고 태어난 사람 같아요. 일상을 마주할 때조차도 통각이 곤두서고, 타인의 고통을 보기만 해도 여린 속살이 쓸려 짓무르는 사람이요. 아침보다는 저녁, 새벽 가장 어두울 때를. 웃음보다는 눈물, 핏물을. 여름보다는 겨울을 생생하게 감각하는 이들. 앞으로 올 것들보다는 뒤로 지나가버린 것들, 탄생보다 죽음을 오랫동안 곱씹는 사람.


마크 로스코와 한강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1970 ⓒ markrothko.org
마크 로스코 <무제 Untitled> 1970 ⓒ markrothko.org

한강의 시집에는 '마크 로스코와 나'를 연결지은 두 편의 시가 실려있습니다. <마크 로스코와 나>는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지만,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 9개월 여의 시간을 / 다만 / 가끔 생각한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탄생과 죽음을 오가는 시집 속 화자의 수많은 생각과 말 중, 로스코로 이어지는 것은 두번째 시 <마크 로스코와 나 2>의 시작에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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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 한강 <마크 로스코와 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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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코가 바라던 대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담아낸 캔버스에 화자는 공감합니다. 그림을 마주한 순간에 화자는 그 앞에 서서 '내가 나라는 것도' 잊습니다. '물결처럼 만져지는, 스며오는, 번져오는' 로스코의 '피'의 색채, 어둠과 빛의 사이에서 그 감정을 온몸으로 감각합니다. 로스코의 유작 중 하나인 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로스코는 손목을 긋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요. 우리는 그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로스코의 '영혼의 피', 붉게 넘실대는 생명력에 잠식되는 순간을 화자와 함께 마주합니다.

마크 로스코 <로스코 채플 Rothko Chapel> Houston ⓒ mark-rothko.org
마크 로스코 <로스코 채플 Rothko Chapel> Houston ⓒ mark-rothko.org

회화는 경험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다. Painting is not about an experience. It is an experience.

마크 로스코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루이스 부르주아 <마망 Maman> 1999,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루이스 부르주아 <마망 Maman> 1999,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이미 죽은 먼 타인을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생생하게 경험하는 화자에게,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가까운 생은 얼마나 날 것으로 감각될까요. 꿈에서나마 차라리 죽어서 좋았던 생의 무게가 어떤 것일지 생각해봅니다. '난 죽어있었는데 /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 아, 죽어서 좋았는데 / 환했는데 솜털처럼 / 가벼웠는데'. 하지만 꿈에서 본 그 돌, 해맑고 고요한 어떤 생을 직접 목도하고 감각하려면 결국 우리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때 알았네 /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 그때 처음 아팠네 /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파란 돌).

고통을 증거하기 위해 삶을 선택한 화자에게는 '마르지 않은 눈물'과 '피 흐르는 눈'이 남아 있습니다.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 이제 잊었어'(피 흐르는 눈)요. '사는 것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화자의 삶에서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회상)지요. 꿈처럼 먼 세상의 고통은 '양심처럼 / 무슨 숙제처럼 / 명치 끝에 걸려 있었'(거울 저편의 겨울 2)습니다. 시시각각 죽음으로 가는 길목일 뿐인 남은 생에서 화자는 할수 있는 한 자신이 본 고통의 목격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그의 혀로, 언어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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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한강 <피 흐르는 눈 2>


루이스 부르주아와 한강

루이스 부르주아 <거미 Spider> 1997,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루이스 부르주아 <거미 Spider> 1997,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한강의 시집에서 루이스 부르주아와 같은 정신적 외상을 읽어냅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자신을 생존자로 여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전쟁, 자연 재해, 질병으로 인해 너무 자주 악화되는 인류의 '지옥 같은'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약속을 표현합니다." 1) 고통의 생존자이자 목격자로서 두 예술가에게 생과 가장 가까운 경험 중 하나가 있다면 엄마-되기의 체험이 아니었을까요. <효에게. 2002. 겨울>과 <괜찮아> 라는 엄마-되기에 대한 두 편의 시로 그 감정의 일부를 들여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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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중략)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한강 <효에게. 2002.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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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고통을 마주한 사람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목격하는 일은, 한강과 루이스 부르주아 같은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특히 엄마-되기의 경험은 소수자-되기의 경험과 직결됩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존재를 마주하는 일. 내 안에 사회적으로 체화된 모성의 문법을 더듬는 일. 거기서 한강의 화자는 고통으로 가득찬 어쩔 수 없는 생 앞에 자식과 나란히 서는 것을 택합니다. 부모와 자식을 떠나 각각의 사람-개체로서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죠. 

루이스 부르주아 <두렵다 I am afraid> 2009,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루이스 부르주아 <두렵다 I am afraid> 2009, 뉴사우스웨일스 아트 갤러리 AGNSW ⓒ Chloe

불완전하지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I am imperfect but I am lacking nothing.

루이스 부르주아

신이 아닌 한 우리는,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성애라는 사회적 합의와 환상은 끊임없이 엄마-되기의 경험을 강제하고 신격화 합니다. 한강의 시적 화자는 이를 담담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 뿐'이라며 자식을 개별적인 개체로 인정하고 엄마의 경험을 개인의 차원으로 환원합니다. 오히려 아이로부터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나아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두렵다' '잃어버렸다'고 고백하며, 그렇지만 한 개인으로서 엄마-되기의 경험이 '불완전하지만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남성의 생성들은 그토록 많은데 왜 남성-되기는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남성이 유달리 다수적인 반면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의 다수성은 남성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 아이, 그리고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파이다. 아마도 남성-기준과 관련한 여성의 특별한 위치가 소수파 그 자체인 모든 생성들이 여성-되기를 통과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들뢰즈/가타리, <천개의 고원>, 551쪽 2)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다. For her intense poetic prose that confronts historical traumas and exposes the fragility of human life.” 생의 가장 여린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과 폭력을 폭로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 자신과 직결된 면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괴로우리라 감히 상상해 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목소리와 연대의 가치가 낮게 느껴지는 시대에,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고 응원합니다.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 나에게 말을 붙이고 /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 오래 있을거야. /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 잘 모르겠어."(서시)


1) 일본 도쿄의 모리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Louise Bourgeois: 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 전시글에서 재인용했습니다. 

2) 해당 원문은 ‘되기devenir’의 실제적 기술에 관하여 라는 블로그 글에서 재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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