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지난 레터에 이어 케이팝 이야기를 들고 찾아온 클로이입니다. 케이팝에 관심이 있는 구독자 님이라면 팬미팅에서 하니가 부른 ‘푸른 산호초’ 무대를 한번쯤은 보았을 거 같아요. (좋은 의미로, 저는 정말 많이 봤어요!) 일본 데뷔 더블 싱글 <슈퍼내추럴 Supernatural>을 발매하고 도쿄돔 팬미팅을 성황리에 마친 뉴진스의 행보가 여러 모로 눈에 띄는 지난 2주였습니다.
어도어 민희진 대표가 이전 기자회견에서 언급하면서 더욱 주목받았던 뉴진스의 이번 컴백. 5월에 한국에서 먼저 발매된 더블 싱글 <하우 스윗 How Sweet>에 이어, 6월에 일본에서 발매된 데뷔 더블 싱글 <슈퍼내추럴>이 세간에서 꽤 회자되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큐레이팅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의 관점에서 뉴진스의 이번 앨범 기획과 프로모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큐레이팅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뉴진스 총괄 프로듀서인 민희진 대표는 <슈퍼내추럴> 앨범 발매를 알리며, 일본의 유명 현대 미술가 중 하나인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협업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뉴진스 멤버들의 사진, 파워퍼프걸 캐릭터와 같은 레퍼런스 이미지와 이를 바탕으로 키비주얼을 작업 중인 민 대표와 다카시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발매된 앨범 패키지에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카이카이 키키 Kaikai Kiki 꽃 이미지 Flower(Superflat) 가 전면에 사용되었고, 앨범 굿즈로 해당 이미지가 인쇄된 가방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앨범 수록곡 ‘Right now’ 뮤직비디오에도 다카시의 꽃 이미지가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는 등 앨범 콘셉트의 시각적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이 협업 결과물을 보면서 미술 작가로서의 다카시와 그의 작품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고, 한편으로는 케이팝 프로듀서와 미술 작가의 앨범 협업이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큐레이팅 Curating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Creative Directing 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놓고 보면, 미술에서의 전시 기획과 케이팝의 앨범 기획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콘셉트를 기획하고, 레퍼런스 리서치를 진행하고, 알맞은 아티스트/팀원이 모여 전시 또는 앨범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하나의 결과물을 특정 시기에 선보인다는 점에서요.
태도가 형식이 될 때, 과정이 예술이 될 때
큐레이터라는 말을 들으면 미술관에서 우수한 작가 혹은 작품을 뽑아 전시하는 기획자를 떠올릴텐데요. 물론 큐레이터는 전시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보고 작가를 선정하고 컨택하지만, 실제 주제 전시를 준비하다보면 기획자와 작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경험이 흔하거든요. 작가에게 전시의 기획 의도와 레퍼런스를 설명하면서 또 전시에 맞는 새로운 작품을 의뢰하면서 제작 과정에서 끊임없이 소통하게 되죠.
큐레이팅을 하나의 창작물로 인식하게 만든 큐레이터로 흔히 하랄드 제만 Harald Szeemann 을 이야기합니다. 하랄드 제만은 1969년 스위스의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태도가 형식이 될 때 When attitudes become form> 전시를 기획했는데, 요셉 보이스 등의 작가와 함께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그 과정을 전시장에 선보였습니다. 이때 즈음부터 전시 기획의 과정도 하나의 예술로, 전시 자체도 큐레이터의 창작물이자 작품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고 봐요. 1)
유능한 기획자는 협업 아티스트/팀을 선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영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고 그 과정을 하나의 예술로 만듭니다. 보다 일찍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연구한 광고 업계의 표현을 빌리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창작을 책임지고 구성원에게 콘셉트 찾기와 시각화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지는 생산자요 행위자이며 송신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2)
민 대표는 스스로를 프로듀서라 지칭하면서 의사결정권자로서 프로듀싱을 할 때의 장점으로 ‘언제 무엇을 할지 총체적 관점에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언급했는데요. 뉴진스의 일본 데뷔를 준비하며 무라카미 다카시나 후지와라 히로시 등 1990년~2000년대를 휩쓴 일본 문화 아이콘과 협업하고, 팬미팅에서 ‘푸른 산호초’ ‘플라스틱 러브’ 등의 일본 곡 커버를 선보이며 이슈화에 성공하면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강점을 유감없이 활용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뉴진스의 콘셉트 기획에 대해 얘기할 때 노스텔지어, 특히 ‘경험해본 적 없는 것에 대한 향수(링크)’는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워드인데요. 한국에서는 흔히 ‘응답하라’ 시리즈로 대표되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향수의 대척점에서, 특정되지 않은 시공간에서 열화된 이미지로 제시되는 과거와 그리움이라고 느껴져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는 의견도 보입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한 (근)과거는 그렇지 않았는데, 왜 존재한 적 없는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거냐”는 것이죠.
기획자의 관점에서 보면 뉴진스는 구체적인 세계관과 같은 ‘서사’에 기대어 있다기보다 사랑이나 젊음 같이 소녀소년의 보편적인 ‘서정’을 이야기하는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 앨범 그리고 이번 앨범의 촬영 콘셉트에서 느껴지는 소위 “여름이었다” 혹은 “첫사랑 기억 조작단”의 바이브랄까요.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처럼 주인공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선택적이고 감각적인 회상 기억으로 채워지게 될 것 같은 느낌을 주죠.
뉴진스의 하입보이 Hype boy 가사를 빌리자면 “내 지난 날들은 눈 뜨면 잊는 꿈”이며 지금 이 사랑의 순간과 감정을 충실하게 전달합니다. 하니가 부른 푸른 산호초의 가사에도 “당신과 만날 때마다 모든 걸 잊어버려요”와 같이 유사한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같은 서정적 문법은 보편적인 공통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어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감성적으로) 더 가까이에 있습니다.”
게다가 우린 문화적으로 미디어를 통해 이미 많은 간접 경험과 대체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으니까요. 뉴진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에는 보다 멀게는 동화적인, 보다 가깝게는 만화적인 모티프와 시퀀스가 자주 사용됩니다. 슈퍼내추럴 뮤직비디오 속의 도시는 세기말 애니메이션이나 '미래도시 그리기 대회' 출품작처럼 현실을 긍정적으로 비트는 (근)미래스럽죠.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미소녀의 외양과 토끼탈을 쓴 인영은 공상 과학 만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거 같고요. 이런 시각 이미지는 누구도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본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곤 하죠.
이런 뉴진스의 키워드가 새롭지 않다고 느낄지라도, 현재의 미감에 맞게 잘 연출된 동경과 로망의 클리셰-키비주얼은 그 자체로 새로운 만족과 감흥을 줍니다. 비주얼 콘셉트를 위해 키워드를 도출하고, 레퍼런스 리서치를 진행하고, 촬영 콘셉트와 그래픽 디자인을 기획하는 것은 결국 큐레이팅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의 영역이니까요. 다카시와 히로시를 아는 사람도 혹은 모르는 사람도 보기에 '좋은', 어쩐지 사랑스러운 소녀들을 뉴진스(팀)는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오창일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모델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행위자 관점으로 본 연구> 디자인학연구 100호 Vol.25 No.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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