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일주일에 한 번 음악단어편지를 보내는 저는 영기획을 운영하는 하박국입니다.
인터넷에서 ‘인셉션 동네’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미지가 하나 있습니다.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의 이미지예요.
이곳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내내 제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진의 제일 꼭대기 어딘가의 반지하에 살았어요. 그리고 얄궂게도 다니던 초등학교는 사진의 제일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가난의 상징과도 같은 동네에 살며 당연히 누군가 차에 태워 학교까지 데려다줄 일도 없고, 두 곳 사이를 다니는 대중교통도 없었어요. 그냥 매일 언덕을 걸어 오르고 내리며 학교에 다녔지요. 당시에는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겨울이 되면 좀 위험하긴 했는데 아이들이 그런 걸 알 리 있나요. 눈이 오면 쌀 포대로 눈썰매를 만들어 타고 길이 얼면 어머니께 당시 유행하던 바닥에 스파이크가 박힌 신발을 사달라 졸라 신고. 가끔 반에 깁스한 애가 보이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죠.
그때는 잘 몰랐는데, 특별히 다른 아이들과 스포츠를 즐기지도 않고 생활 운동이라는 게 보급되기도 전이었던 저 시기의 제게 등하교를 하며 언덕을 걷는 건 큰 운동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걷기는 당시 제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동네 서점엔 ‘꼬마 흡혈귀’ 시리즈가 3권까지 밖에 없는데 옆 동네의 큰 서점엔 이후 시리즈가 있었거든요. 학교를 마치고 아무렇지 않게 걸어 옆 동네까지 걸어 새 시리즈를 사 집에 돌아오면 얼마나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던지요. 제가 살던 집과 한참 멀리 있던 주공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도 역시 걸어서 놀다 왔어요. 떡꼬치, 오뎅, 쭈쭈바 같은 길거리 음식을 사 먹으며. 그냥 다 흐려진 추억이라 그런 걸지 모르지만 걷는 동안은 별로 힘든 일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 가파른 경사의 꼭대기 동네에 살던 꼬마는 어른이 되어서도 경사가 가파른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재개발전에도 살던 북아현동에 재개발 후에도 살게 되었는데요. 재개발로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지을 수는 있었지만 경사를 깎을 수는 없었나 봐요. 매일 ‘인셉션 동네’를 아무렇지 않게 오르던 꼬마였던 저는 어느새 언덕을 오르기 전 한숨부터 쉬는 중년이 됐습니다. 비단 경사진 언덕뿐 아니라 평소 길을 걸을 때도 언젠가부터 걸음걸이가 부쩍 느려진 걸 느껴요. 전에는 걸음걸이가 빠른 편이라 주변 사람과 걷는 속도를 잘 못 맞추곤 했었거든요. 근데 이제는 제가 상대방이 나 때문에 일부러 늦게 걷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걸음 속도만큼 세상과 저와의 상대적인 속도도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전에는 앞질러 갈 수도 없으면서 세상을 추월할 듯 성큼성큼 걸었다면 지금은 세상은 저 멀리 가 있는데 저는 뒤처지지 않으려 애써 걷는 것 같달까요.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뛰기는 커녕 걷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피쉬만즈는 1987년 결성되어 1999년 해체된 그룹입니다. 딱 제가 한참 걸어 다닐 때 활동하고 성인이 되기 직전에 해체했어요. 피쉬만즈의 커버 이미지 중에는 유독 걷는 이미지가 많아요. ‘Walkin’’이라는 곡과 ‘Walking in the Rhythm’ 등 곡 제목에서도 걷고 있고요. 재미있는 건 ‘Walkin’이라는 곡은 피쉬만즈의 초기 시절 발매되고 ‘Walking in the Rhythm’은 그보다 한참 후에 나왔는데 곡의 bpm이 ‘Walkin’’보다 ‘Walking in the Rhythm’이 더 느려요. 이들도 저처럼 허벅지 근육과 무릎 관절의 퇴화를 겪고 걸음걸이가 느려진 걸까요? 뭐가 되었든 저는 이들의 곡 ‘Walking in the Rhythm’을 좋아합니다. 귀에서 들리는 리듬에 맞춰 걷는 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이 곡의 가사는 이래요.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 노래하듯이 노래하듯이 걷고 싶다.”
작업실에서 늦은 시각까지 뉴스레터를 쓰고 있으면 통유리를 통해 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뛰어 노는 아이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청년, 걸음 보조기와 함께 몇 번이고 골목을 지나는 노인까지. 그저 모두 각자의 속도로 걷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전처럼 빠르게 걷지는 못하지만 덕분에 전에는 지나치던 걸 볼 수 있게 됐다고 믿어요. ‘Walking in the Rhythm’의 가사처럼 오늘도 내일도 한 걸음 두 걸음 걷습니다. “내 마음의 리듬을 믿고”. 다음주 화요일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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