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걷고 있는 당신. 달려오던 자동차가 물웅덩이를 밟아 당신의 신체 일부에 흙탕물이 튀었습니다. 어디에 튀었을까요?
초등학교 6학년 영어 시간이었다. 담임은 (실명을 쓰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셨을 것 같다.) 여행하고 싶은 나라와 그 이유를 영어 스피치 숙제로 내주었다. 당시 유행했던 세계여행 프로그램에서 독일 여행을 감명 깊게 봤고, 머지않아 떠날 거라 믿으며 영어 사전을 뒤져 독일 여행에 대한 꿈을 조립해 갔다. 가엾게도 나는 친구들 앞에서 얼었다. 나보다 한 뼘 작은 교탁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숨고 싶었다. 더듬느라 혈안이 된 사람처럼 하나의 문장,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흉악할 정도로 혀를 씹고 턱을 비틀고 내려왔다. 담임은 말 더듬는 젊은이는 독일에 갈 수 없다는 망측한 평가를 줬고, 난 저머니고 젊은이고 간에 펑펑 울고 싶어졌다. ‘아, 내가 말더더더더듬이구나.’ 인식한 순간 수치가 온몸에 들러붙었다.
16화음 휴대전화를 돌리면 64화음으로 들을 수 있다는 스펀지식의 생활 정보가 공공연하게 떠돌던 때였다. 어른들은 인터넷보다는 방송과 신문을 신뢰했으며, 동네마다 특정 분야 전문가가 있어서 돈을 내고 그들에게 정보를 사기도 했다. 엄마는 신문이었는지, 친구의 소개였는지 말더듬을 뚝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명의를 찾았고, KTX를 타고 함께 광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엄마는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친구들과 놀 때 어땠는지 물었고, 나는 영어 시간에 있었던 젊은이 사건을 말하고 자꾸 친구들이 흉내 내서 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나를 말하면 엄마가 과자 하나를 입에 넣어줬다. 그러면 입안이 너무 달콤해서 아문 상처도 다시 도려내 엄마한테 보여주었다. 엄마는 꼭 지난 밤 나의 잠꼬대로 들었던 이야기처럼 적당한 리액션을 하며 들어주었다. (고작 서른세 살의 여자, 어떻게 울지 않았을까? 그래서일까… 곧 환갑의 그녀는 내가 어떤 말썽을 부려도 눈 하나 깜빡을 안 한다.)
시장의 끝, 상가 2층에 언어 교정 박사님의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기다랗고 낡은 검정 가죽 소파에 앉아 사무실을 270도로 관찰했다. 작은 환들이 담긴 유리병과 테이프, 두치와 뿌꾸에 나오는 마빈 박사를 닮은 어수룩해 보이는 아저씨, 빼곡하게 꽂힌 책들. 몸이 다 자라고 나서도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자주 악몽으로 재생되곤 했다. 박사님은 먼저 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며 지하철 훈련을 제안했다. (오! 지하철 훈련?)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맘껏 더듬으며) 한 칸 한 칸 전진하는 방법이었다. (오! 저 그냥 평생 더듬을래요.) 그리고 그는 간의 힘을 돋워준다는 염소똥같이 생긴 한약 환과 언어 교정을 위한 테이프를 책상 위로 슬쩍 올렸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나는 ‘약을 잘 먹고 테이프를 성실하게 보면 다 낫겠구나.’, ‘내가 잠시 지나갈 병을 앓는 중이었구나.’, ‘박사님 짱이다.’ 그런 생각을 반복했다.

흙탕물이 어디에 튀었을까? 슬깃 웃으며 ‘입’이라고 입력했다. 휴대전화 16화음만큼이나 단출해 보이던 플래시 심리테스트는 이런 답변을 내밀었다. ‘당신의 컴플렉스는 [입]이군요.’ 맞는 말이었다. 광주에 다녀오고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환을 먹어봤지만, 없던 변비만 생겼고(에휴), 학원과 구몬 압박에도 불구하고 비디오를 시청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말더듬이 인생의 전환은 의외의 장소 이마트에서 맞았다. 몇 가지만 골라서 나오면 되니 바구니 들자니까 떼쟁이였던 동생은 굳이 굳이 쇼핑카트를 끌어야겠다며 고집을 부리다가 혼자 집으로 가버렸다. 어린아이가 겁에 질려 금방 돌아오겠지 하고 내버려두었는데 독불장군 같은 녀석이 집까지 버스로 20분이나 걸리는 곳에서 혼자 길을 나서버렸다.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부모님은 경찰과 함께 동네를 수색하고, 난 집으로 걸려 오는 연락을 받는 역할을 맡았다. 신병훈련소보다 무서운 두 시간이었다. 동네 자장면집에 주문 전화를 할 때면 입술이 바짝 마르고 사지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 만큼 전화 공포증이 심했던 때였다. (여느 평범한 말더듬이처럼 그랬다.) 아무 전화도 걸려 오지 않았지만 “여보세요.”를 연습하느라 혀 반 토막이 피로 물들고 턱이 부었다.
동생은 자주 타고 다니던 버스들을 보고 집을 찾아왔다. 신화 속 주인공처럼 동생은 무용담을 늘어놓았고, 엄마는 동생을 두들길 준비를 했고, 방 한 켠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내 능력을 믿어볼 때야. 두 눈을 감고 뛰어내릴 테야. 중력을 벗어나. 중력을 거슬러볼래. 아무도 날 끌어내릴 순 없어.”
동생이 사라진 두 시간 동안 ‘가족조차 지킬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수치심이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동생의 귀환한 순간, 한심했던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용기로 무장한 내가 된 것 같았다.
고깔모자 쓰고 빗자루 타고 뛰어내린 곳은 ‘어린이 병영 체험’이었다. 두 글자로 요약하면 ‘고난’이었다. 6학년인 데다가 덩치가 좋다는 이유로(사실 뚱뚱) 분대장이 되었는데 평소보다 수백 배 더 말을 많이 해야 했다. 거기에선 어른을 만나면 목례가 아니라 ‘충성!’을 내뱉어야 하는데 된소리가 어려워서 하루에 오천 번 정도 더듬었다. (사흘쯤 흐르니까 자연스럽게 더듬으면서 추추충성!했다.) 매일 저녁에는 점호를 해야 하는데 약식으로 한다고 해도 내겐 너무나도 길어서 더듬지 않으려고 운율을 붙여 노래 부르듯이 말하다가 어떤 아저씨(아마도 소대장)한테 혼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기들 덕분이었다. 내가 말을 더듬거나 말거나 자기들한테는 분대장이었고, 언제나 내 말을 법처럼 따라줬다. 사람들은 내 입에 관심 없다는 것, 그때 옅게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선 ‘소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책을 한 권 골라 읽어 내려가면서 쉽게 낼 수 있는 소리와 어려운 소리를 써 내려갔다. 지독하게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 끝에 예사소리는 쉽고 된소리와 거센소리는 어렵다는 공통점을 찾았다. 그리고 호흡 조절을 하며 첫 음을 길게 뱉기 시작했고, 세상에 비슷한 의미를 갖는 낱말이 정말 많아서 굳이 ‘빨강’이라고 안 하고 ‘붉은색’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사람이면 태클 안 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안 사실인데 마빈 박사님 테이프에도 같은 내용이 있었다.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재빠르게 피했다면 흙탕물을 피할 수 있었을까? 스물, 국회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창에 ‘말더듬증 유전 관계’를 써본 날이 선명하다. 검색 버튼은 끝내 누르지 못했다. 아무라도 미워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유당불내증, 탈모 혹은 여드름처럼 유전을 탓하는 일(저의 146대손 할아버지 왜 대머리셨나요? 같은 일)이 벌어지거나 내가 너무나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지도 몰랐다. 서른이 넘어서야 사람들에게 오랜 말더듬이라는 사실을 말할 용기가 생겼다. 대부분은 전혀 몰랐다고 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알아 임마. 아직도 더듬냐?”라고 해주었다.(사람이 할 말인지) 사랑했던 연인들은 내 말투가 귀엽다며 볼을 톡톡 두드려주기도 했다.
어버이날 기념한 저녁 식사에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동생이 실종되었던 날 외로웠던 마음과 그날 이후 싸움에 대해 가족들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마칠 즈음 소주 한 잔을 마셨는데 참 시원스레 내려갔다. 엄마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주석아. 누구 탓도 아닌데 참 고생이 많았다. 그치?”
아무리 그래도 최근에야 말더듬이를 만났다는 건 정말 불운이다. 발표할 때 잠깐 말 씹히는 거 말고, 깡패 앞에서 긴장해서 저는 거 말고, 짝사랑한테 고백할 때 부끄러워서 어버버하는 거 말고 본투비 말더듬이 말이다. 그를 보기 전까지 세상에 말더듬이는 나 혼자뿐이었으므로 나는 단 하나뿐인 소수자였다.
그날은 정말 더운 날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이 주 넘게 운행하지 않은 차가 방전되어 있었다. 점프 뛰러 온 보험사 직원이 배터리 수명이 다했다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정비소에 간 참이었다. 차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 추천해 주는 걸로 갈아야지 싶었다. 인상 좋아 보이는 직원이 나와서 입을 떨었다. 혀를 깨물고 코를 찡긋거렸다. 5분, 짧지 않은 시간, 아니 말더듬이에겐 정말 긴 시간 동안 제품의 종류와 가격, 서비스, 추가로 정비해야 할 곳까지 짚어주었다. 그가 더듬는 동안 그의 투명한 눈을 응시했다. 내가 말을 더듬으면 사람들은 내 입을 응시했다. 그리곤 세상에 말더듬이가 존재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곤 했다. 그의 정비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가장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다. (S.E.S.의 Just A Feeling이었던 것 같다.) 나 말고 다른 말더듬이. 게다가 흔들리는 턱을 붙잡지 않고 내리 5분을 더듬어 버리는 말더듬이. 아무 숨김이 없다는 것은 아주 강하다는 것이었다. “저도 오래 더듬어 왔는데 우리 카톡 교환하고 다음에 편맥 할래요? 말 더듬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릴 얼마나 무례하게 대해오고 있는지 씹어봐요.”할 걸 그랬나 싶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웬델 존슨은 1930년대 북미 원주민 부족들에서 ‘말더듬’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들의 언어에는 ‘말더듬’이라는 단어가 없으니 ‘빠빠빠알가앙’이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그는 괴물 실험이라고 불리는 최악의 실험도 자행한다. ‘말더듬은 학습이다.’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더듬지 않는 아이에게 계속하여 “너는 왜 말을 자꾸 더듬니?”라고 혼낸 것이다. 그 결과 실험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아이가 평생을 말더듬이로 살아가야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말더듬이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그가 벌인 일이니 참 아이러니했다. 그의 삶에 대해 찾아보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오랜 시간 블로그로 안부를 주고받던 이웃을 만났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두 시간쯤 수다를 떨었다. 으레 낯선 사람과 만날 때는 주로 듣는 포지션을 취한다. 일부러 쉬운 단어를 뱉었고, 말이 막힐 것 같을 땐 뒤를 흐리며 웃음으로 무마한다. 그날도 그랬다. 이웃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말하느라 긴장을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지하철에서 입을 벌리고 잤다. 집에 돌아와서 몇 번을 더듬었고 가장 심하게 더듬었던 장면을 복기했다. 어떤 낱말로 바꾸면 발음하기 쉬웠을까 한참 고민했다.
여전히 무섭다. 사람들이 날 말더듬이로만 대할까 봐. 내가 가진 빛나는 보석들을 내보일 기회가 없을까 봐. 우리나라 사전에는 ‘말더듬’이라는 낱말이 존재하니까. 그 순간 블로그 이웃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내가 더듬을 때 나의 눈을 보아준 사람이 하나 늘었다. 흙탕물을 단숨에 닦아내고 싶었는데 이제는 내 무늬 삼아 살아간다. 그리고 이따금 “나는 여기에 흙탕물이 튀었어.”라고 말해준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 닦아낼 수 있었다. 언젠가 나와 같이 말하는 아이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마맘암껏 마마말하렴. 아저씨도 맘껏 들을게.”
*영화 ‘Wicked’의 OST ‘Defying Gravity’의 가사 중 일부.
의견을 남겨주세요
갭퍼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주석의 주석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