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목숨을 바칠 뻔 했다

질 들뢰즈가 알려준, 나로 살아가는 법

2025.08.06 | 조회 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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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벤자민

브런치북 <서른의 나는 세살의 나를 불러본다> 연재중

  이 글은 10년 넘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속에 갇혀있던 한 사람이, 철학자 질 들뢰즈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밖으로 걸어나온 이야기다. '진정한 나'라는 고정된 정체성을 찾으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매 순간 달라지는 '어느 날의 어떤 나'로 살아가게 된 과정을 담고 있다. 그날그날의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당신에게 꼭 건네고 싶은 글이다.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10년 넘게 하나의 질문에 갇혀 살았다.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이 질문은 내 머릿속에 둥지를 틀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마른침, 누군가와의 눈맞춤,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잠들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친구들과 만날 때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내가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집에서의 나와 학교에서의 나는 달랐고,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의 나도 달랐다. 그 날의 날씨, 심지어 점심 메뉴에 따라서도 내 모습이 변했다.

  M.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23 아이덴티티>가 떠올랐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상담사와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제 인격들 끼리 서로 의자에 앉으려고 싸워요. 결국 그 의자를 쟁탈한 인격이 잠시동안 '나'가 되어요." 이 영화를 보고 내 마음 속도 영화처럼 그려보았다. '혹시 진짜 나의 본모습 속에는 의자 하나와 여러 개의 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중 진짜 나는 누구인가?', '그 의자를 배치해놓은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하지만 내가 마주한 상황들을 겨우 23가지로 분류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했다. 새로운 환경에 내던져질 때마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처음 겪는 감정에 휩싸일 때마다 전에 없던 새로운 내가 나타났다. 그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분석하고 정리하려 했지만, 안개 속 경계를 그리려는 것만큼 흐릿하고 소용없었다.

  20대 초반 어느날, 답답한 기분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술자리가 마무리 될 때쯤엔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습관처럼 또다시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가기 전의 나, 술자리에서의 나, 술자리가 끝난 후의 나는 시간적으로는 하나의 흐름이었지만, 마치 서로 다른 세 사람이 등장한 것 같았다. 이런식의 고민과 분석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든, 누구와 있든, 무엇을 하든, 나는 끊임없지 자문했다. '지금 이 모습이 진짜 나야?'

  내가 지금 즐거운지, 슬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일관되어 보이느냐였다. 매순간 지금 내가 보이는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지 되물었다. 변하지 않는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만 찾으면 더이상 이런 번잡스러운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진정한 나'의 모습만을 보이며 편안하게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이 깔려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이르기까지, 서구 철학은 줄곧 변하지 않는 본질적 자아를 찾으려했다. 이는 사물이나 존재의 본질을 고정된 실체로 보는 형이상학과 '나는 나다'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기반한다.

  하지만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바로 이 동일성의 철학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이러한 동일성의 철학은 삶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억압하는 폭력적 체계다. '진정한 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삶을 고정된 틀 안에 가두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철학적 배경도 모른채, 억압적인 체계의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다.

 

진정한 나 대신, 이상적인 나를 창조하다

  '진정한 나'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내 모든 순간을 해부했다. 여행을 가서도, 친구들과 만나서도, 심지어 혼자 음악을 들을 때조차 나는 관찰자이자 분석가였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연구하고 있었던 꼴이다.

  여행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다. 새로운 풍경 앞에서 감탄하는 내 모습을 보며 '어? 왜 갑자기 이렇게 들뜬거지? 평소의 나답지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때도 '내가 왜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이게 진짜 내 모습인가?'하며 그 눈물조차 의심했다. 어떤 감정이든 곧바로 질문이 따라붙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지?', '이게 정말 나에게서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그렇게 나는 경험하기보다 해석했고, 삶을 살기보다 의심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다른 전략을 시도해보았다. 나의 '본질적 자아' 찾기를 멈추고, '이상적 자아'를 임의로 구성했다. 다시 말해, 좋은 모습만 골라내어 '최고 버전의 나'를 만들기로 했다. 성실하고, 밝고, 책임감 있는 나. 이런 식으로 좋은 덕목을 하나씩 붙여가며 이상적인 자아상을 구성했다.

  최고 버전이 아닌 나는  모두 거부했다. 피곤할 때의 나,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의 나를 모두 가짜로 치부했다. 살면서 당연히 마주칠 수 밖에 없는 나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약한 면은 잘라내고, 지친 마음은 무시했다. 항상 최상의 모습만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실제로 상당기간 그렇게 살았다.

  들뢰즈는 이를 나쁜 반복이라고 부른다. 같은 패턴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그 안에서 일어나려는 모든 차이와 변화를 억누르는 반복 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반복은 삶의 창조적인 힘을 막는다. 진정한 반복은 반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반복이어야 한다.

  나는 들뢰즈가 말한 반복의 철학과 정반대로 살고 있었다. 차이를 두려워하며 동일성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내 모든 에너지는 '이상적인 나'를 유지하는데 소모되고 있었다.

 

되기(becoming): '진짜 나'가 아닌 '어떤 나'

  우울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 때면 어머니께 전화를 걸곤 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 하셨다. "기분이 안 좋은 너도 너야."

  당시 나는 '최고의 버전만 나'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애써 무시하곤했다. '이렇게 나약한 놈이 진정한 나 일리가 없어'하고 말이다.

  어머니는 이어서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나도 나이고, 게으르게 늘어져 있는 나도 나이고, 땀흘리며 운동하는 나도 나이고, 감기 걸려서 골골대는 나도 나라고 말이다. 그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나는 조금씩 내 모습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은 나도, 모순적인 나도, 일관되지 않는 나도 모두 나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겠다는 강박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보이기 시작한 건 관계와 연결이었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나는 달라졌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들의 교차점에서 매순간 만들어지는 존재였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되기(becoming)'이다. '되기'는 이것에서 저것으로 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일어나는 변이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연결과 접속, 그리고 그로부터 창발하는 가능성이다.

  들뢰즈는 보이지 않는 버추얼(virtual) 세계에 있는 관계와 연결이 우리가 사는 액추얼(actual) 세계에 현실화 된다고 보았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란 항상 '되기'이며, 그 되기는 상황, 접속, 타자와의 얽힘 속에서 구성된다."

  친구 A와 있을 때의 나, 친구 B와 있을 때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가족과 있을 때의 나는 모두 다르다. 그런데 이는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연기를 해서가 아니다. 각각의 관계가 나의 서로 다른 잠재성들을 현실화 시키기 때문에 다른 내가 나타나는 것이다. 친구 A는 나의 유머러스한 면을 끌어내고, 친구 B는 나의 진지한 면을 자극하며,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내성적인 면이 드러난다. 이 모든 면이 다 진짜 나다.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나 자신은 그때그때 '되기'의 결과다. 모든 나는 접속과 관계 속에서 발현된다. 다양한 '되기'들 사이에 '원래의, 진짜의, 본질적인 나'가 따로 있지 않다.

  나를 10년 넘게 괴롭혔던 숙명의 과제 '진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무의미해졌다. 내가 경험했던 변화무쌍한 자아의 감각, 상황마다 달라지는 나의 모습들은 문제 삼을 것이 아니었다. 그것 삶의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일성: 시소가 균형을 이루는 순간

  과거의 나는 '고요한 마음 상태'에 집착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무 흔들림이 없는 평온에서만 나와야 진짜라고 믿었다. 고요함을 진정한 나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보았다. 반대로, 요동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모두 거짓과 가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시소처럼 잠시 균형을 이루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다시 완벽한 안정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왜냐하면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들뢰즈 철학을 해석한 지바 마사야는 동일성(identity)과 차이(difference)의 관계를 시소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동일성은 단단하고 고정적인 본질이 아니라, 사실은 시소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는 차이 속에서 잠시 형성될 뿐이라는 것이다. 지바 마사야는 말한다. "들뢰즈에게 동일성은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다. 수많은 관계들이 연결되고 어긋나는 과정에서 임시적으로 유지되는 가고정성 또는 준안정상태에 불과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집착했던 고요한 마음상태도 그러했다. 평온한 마음은 시소가 수평을 이루는 찰나의 순간일 뿐, 본질이나 정체성이 될 수 없었다. 시소는 언제나 움직이고, 마음은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나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삶에서 억지로 '동일성'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고요한 마음이란 도달해야할 최종 상태가 아니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리듬 속에서 잠깐 머물 뿐이다. 마음은 늘 요동치는게 당연하며, 그 움직임이 있어야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라는 존재도 그 리듬 속에서 매번 새롭게 생성된다.

 

어느 날의 어떤 나로

어느 날은 아무나 내게 연락해주었으면 했고
어느 날은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았으면 했다

어느 날은 이 곳에 있는 내가 참 자랑스러웠고
어느 날은 저 곳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후회했다

어느 날은 구슬픈 피아노 곡으로 차분함을 찾았고
어느 날은 시끄러운 밴드 곡으로 텐션을 끌어 올렸다

어느 날은 이랬고, 어느 날은 저랬다

어느 날이던 간에, 어떤 나이던 간에
어느 날도 날이고, 어떤 나도 나이다

2023년 11월에 쓴 글 <어느 날의 어떤 나> 중 일부

 

  한창 '진짜 나'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던 시기에 쓴 글이다. 이 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런 나도 나고, 저런 나도 나야."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진짜 나'라는 본질을 찾기 위해 허우적댔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를 전력질주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달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들뢰즈는 그 감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나'라는 존재는 어딘가에 숨어있는 정답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흐름임을 알려주었다.

  들뢰즈가 해체한 것은 단지 고정된 정체성만이 아니었다. 그는 서양 철학을 이끌어온 질문 자체를 해체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틀 자체를 산산조각냈다. 하마터면 그 질문에 목숨을 바칠 뻔 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 대신 오늘 만나게 될 어떤 나의 모습을 기대한다. 수많은 변수와 관계가 생성해주는 나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그 날의 날씨, 그 사람과의 인연, 그 순간의 감정이 하나의 '되기'를 이룰 수 있음을 믿는다.

  들뢰즈가 남긴 철학에 나는 이렇게 응답하겠다. '어느 날의 어떤 나'로 계속 살아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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