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면 [주간 묘사 제 3호]

그녀가 바닥을 치고 어디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 그는 이대로라면 미래가 너무 아득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사고방식, 아무튼 아래로만 가버리는 생각, 기분, 마음, 그런 거를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까, 바꿀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도 또 아득해진다고, 멈추게 된다고 그랬다. 사실 바뀔 수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데 왜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거야? 그렇게 그는 그녀에게 아무튼 네가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가 하는 말을 그녀도 잘 알고 있어서 알아, 나도 알아, 나도 그런 거 다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그냥 고개를 주억거린 적이 있다.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다. 사실 그가 했던 말 하나도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무엇 하나도 놀랍지 않았고 그녀의 어느 부분이든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날, 그녀의 메모장에는 돌연 이런 문구가 쓰였다.

근육이 커지는 맥락을 구축해야 한다.

그녀는 메모장에 있는 문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런 낱말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하루를 돌이켜 보다가 눈을 감았다. 잠이 든 채로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그녀는 지하철을 탔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라는 제목의 음악 악보를 신문 보듯이 펼쳐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지금은 1월이었고 지하철은 계속 움직였다. 멀미를 참으면서 지하철을 타는 심정에 대해, 그리고 어제 꾼 꿈에 대해 그녀는 말하고 싶었지만 그곳에는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그는 다가와 귤을 먹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귤을 먹겠다고 했다. 그가 건넨 건 귤이 아니라 오렌지였다. 단단한 손톱이 필요했다. 안에는 씹어도 씹히지 않는 씨앗이 있었다. 그녀는 깨물지 못해서 다물었고, 그에게 들키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 침이 고이고 턱이 뻐근해질 무렵에 그녀의 메모장에는 이런 문구가 쓰였다.

농담에 상처받으면 촌스러운 거래.

그리고 그녀는 어제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꿈에서 그녀는 샤워를 하고 싶어 했다. 주변에는 작은 나무가 있었다. 작은 나무가 있는 숲. 언젠가 그녀가 공터에 씨앗을 심고 심어서 만들어진 작은 나무의 숲. 이제 뭐로든 자랄 수 있는 작은 나무의 숲을 그녀는 뽑아내는 데 전념하며 흙을 헤집었다. 지금은 샤워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뽑은 작은 나무의 숲이었던 공터에 구덩이가 생겼다. 구덩이를 함께 바라보는 누군가도 꿈에 있었지만 그녀는 기억나지 않았다. 꿈에서 깬 그녀는 그녀의 메모장을 보았다.

그 사람은 내 생각을 안 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

누적된 생각만큼 비례해서 존재한다면 나는 아주 작고 그 사람은 아주 크겠다.

이 문구가 그녀의 메모장에 언제 쓰였는지 날짜와 시간이 아주 분명하게 적혀 있었지만 모두 남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거짓말을 한 기분이 되었고, 아주 오래된 문구 뒤에 몇 마디를 더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건 네가 내게 주고 간 놀라운 사실 중에 하나다.

그리고 그녀는 꿈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트러스 향이 났다.

오도독, 씨앗을 씹는 소리와 이제 그만 맴돌지 말라는 어느 목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