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겨울에 산 코트를 꺼낸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부터는 11월. 1년 중 가장 지루한 달이다. 산호색의 얇은 머플러를 두 번에서 세 번 정도 느슨하게 목에 감아 길게 늘어진 목걸이와 어울리게끔 정돈한다. 간밤에 켜두었던 촛불이 비참한 모습으로 굳어 있다. 카라 부분에 있는 가짜 털 장식과 부드러운 황갈색이 무릎을 덮는 이 코트는 매일 지나는 작은 옷 가게에 오랫동안 걸려 있던 것 중 하나였다. 주인은 이런 늙은이가 감히 문턱을 넘어 들어와 덥석 무언가를 살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얼굴이 코트의 부드러운 코듀로이 질감을 만질 때마다 생각이 난다. 상쾌한 기분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매우 뛰어난 감각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반복되는 소리를 들으면 즉각적으로 그와 연계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 말을 했던 친구는 이미 죽었다. 결국은 살아 있는 게 이기는 거지.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발목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수백 번은 보았던 거울을 본다.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매일 매일 같은 일과를 보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대신―기계를 타고 다니다 죽으면 그것만큼 꼴불견일 수는 없을 거라고 자그마치 20년 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 현관문을 나오면 유일하고 중요한 선택은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이다. 왼쪽을 선택하면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수요일에 열리는 장을 구경하러 갈 수 있다. 아름다운 성당을 지나며 운이 좋으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병아리 떼처럼 줄지어 길을 걷는 어린아이들을 만날지도 모른다. 신선한 치아바타 빵이나 한 마리 생선을 사 가지고 가 저녁을 차려 먹는 건 어떨까. 사진사 양반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두어 명이 앉기 딱 좋은 그 소파에 앉아 차를 얻어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대감이 조작된 것이라는 생각도 한편으로 불쑥 떠오른다. 그만큼 견디기 힘든 계절이다. 잡념이 매우 어울리는 계절이기는 하나…. 반면 오른쪽으로 향하면 강으로 쭈욱 이어지는 길을 하염없이 걷게 된다. 그 길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담배 한 대가 간절하고 어릴 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간절할 것이다. 어제는 어떤 길을 택했었지. 나이가 들면 오래된 기억은 어제처럼 생생한데 바로 어제나 그제의 일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어제든 오늘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좀 전에 거울 앞에서도 했지. 오로지 기억은 어떤 생각에 골몰할 때를 기준으로 분절되어 있다. 죽은 생선과 같은 인생이다. 생선. 그러니까 오늘은 왼쪽으로 가야 하는구나.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것이다. 크고 작은 죄책감을 이불처럼 덮고 자는 것. 상념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다만 함께 사는 것. 비관을 패션처럼 입에 걸고 다니며 은근히 뽐내는 것. 어머니의 산소호흡기를 뗀 그 순간부터 나는 나라는 것을 매우 낯설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관점이 이토록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는 30대의 어린 영혼은 몰랐을 것이다. 60살 초반 젊은 어머니는 내 손에 죽었다. 누구도 시킨 적이 없는데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의 어떤 지점에서는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쪽을 고르든 같은 길로 향한다고 치기 어리게 믿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 한 나의 형제들은 막냇동생이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나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우리 똑똑하고 야무진 막내… 이제 나는 늙은 킬러처럼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매일매일을 걷기만 할 뿐이다. 늙은 지금에는 그러한 죽음이 어쩌면 어머니의 원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던 늙은이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훽 돌려 그의 행색과 그가 마시는 와인을 흘긴다. 급하긴, 장에 생선이나 사러 가는 길인데. 그렇지만 상념으로 가득 찬 나의 삶이 술로 배부른 몸이나 도박에 취한 몸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부류와는 다르다. 커피나 한 잔 하지. 됐어, 아침에 벌써 차 마셨다고. 신문은 봤고? 늙은이가 들고 있는 신문을 펄럭이면 나는 그만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여기도 따뜻한 커피 하나만 하고 충동적으로 주문을 하고 만다. 이번에도 공화당이 힘을 못 쓰는 거야. 너 같은 늙은이가 투표를 안 하니까. 안 하긴, 가는 길에 늙은이 개처럼 죽을까 봐 못 가는 거지. 1면에 커다랗게 난 이번 대선 두 후보가 콜라주 되어 있는 사진과 지난밤 토론 내용이 보인다. 환경 정책과 난민 수용에 대한 찬반 토론. EFL 챔피언십의 경기 결과는 2페이지부터. 탄소 비용의 증가를 전문가들이 경고. 계절이 바뀌며 산간 지역에 잦은 산불. 날씨는 14도에서 영하 1도로 어제와 같음. 로또 번호는 10, 18, 23, 27, 28, 38. 전쟁 포로로 탈출한 늙은이 지난 새벽 별세. 남성 감기에 대한 커플 테라피? 알프스 일부 지역 당분간 민간인 출입 금지! 교통공사 노조 101일째 파업인 가운데 10년 연속 또 적자… 앞으로도 가족과 함께 피자를 계속 드시고 싶으시다면 맞춤형 파이낸싱 모델을 추천해 드립니다. 15페이지부터. 세상에 별 일이 다 일어나도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을 줄 알았겠어? 이미 코끝까지 빨개진 정신없는 늙은이는 말한다. 늙어 빠진 것들은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는다. 행복한 인생이야. 한 잔의 와인에 거저 얻은 행복도 행복인가. 나는 자조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리 딸이 오는 1월에 날 데리고 놀러 간다더군. 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래도 기다려져. 10년은 더 된 것 같아. 마지막으로 여행을 한 지가. 겉옷이나 새로 사야겠는데. 어떤 색이 어울릴 것 같아? 늙은 몸을 봐봤자 어떤 색을 걸치든 똑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뭘 사든 비슷하지 않겠어? 그래도, 콧대 높은 옷 가게 양반들 사이를 가로질러 이 늙은이가 타악 들어가면 폼 좀 날 것 같은데. 듣기 싫은 건 듣고 싶지 않기에 커피를 꾸역꾸역 다 마시고 일어난다. 걷는다. 장에 도착한다.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 휩싸이면 들뜨는 기분이 든다. 담배를 필 때 피가 빨리 돌고 머리가 핑핑 도는 것과 같은 느낌. 매주 오는 목도리 가판에 은근하게 서서 색과 질감을 구경하다가 결국엔 사지 않고 생선 가판으로 향한다. 오늘은 생선이 없네요. 비참하게 원래 형태를 잃은 고깃덩이만 가득하다. 생선을 안 사면 저녁에 또 상념에 휩싸일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생선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럼 또 똑같은 것들을 대충 볶아 끼니를 해결해야 하나. 곧 오지만 올 것 같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또 어쩌고. 크리스마스가 와도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같을 것이고, 어울리기 싫은 친구들의 뜻하지 않은 방문은 반갑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저 감각에 자꾸 휩싸여 버리는 자신을 되찾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현재에 머무르고 싶을 뿐이다. 텔레비전에서 상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몸이 노곤해지길 기다려 결국 잠에 빠지는 일이나 매일매일 새롭지 않은 소식들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나 살 수 없는 옷을 염원하는 그런 것 말고, 나는 한 번이라도 그때 그 죽음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가, 어머니 그때는 내가 정말 미안했습니다, 내가 철이 없어 그랬다고 말하고만 싶을 뿐이다. 그 죽은 생각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다 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이 보인다. 어린 목소리들이 하모니를 맞추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빠르게 걷기 시작한다. 오늘은 반드시 강을 따라 걸으며 어머니의 목소리를 따라갈 테다. 그리고 매일 매일 지겹도록 들었던 경찰차 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대로 차에 치이고 만다. 너무 늦은 사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듯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이 지루한 11월을 맨몸으로 보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거리에 개처럼 누워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11살 때, 엄마랑 둘이 시골에 다녀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길을 잃어 보험사를 기다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려 누워 있을 때 사실은 엄마가 귓속에 속삭인 말 하나가 있었다. 얘야, 혹시 내가 늙어서 오도 가도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 지체 말고 그냥 죽여버려. 어머니는 사실 재밌는 사람이었고 그도 그렇게 살 수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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