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연재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보내는 짧은 인사

2021.05.13 | 조회 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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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서간문 프로젝트

 

나의 돌연한 제안에 선뜻 응해준 시연에게

짙은 붉은 색의 작약을 사고 싶었는데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색은 없었어. 그래도 오랜만에 좋아하는 꽃집에 가니까 왠지 기운이 좀 나더라. 꽃을 선물할 상대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야. 꽃을 주고받는 건 사치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합리적인 일이잖아.

이년 만에 너를 만나서 반가웠어. 사실 만나기 전까지 어색할까봐 걱정했지만,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며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지. 이십대 초반의 이년 동안 우리가 어색한 상황도 어찌어찌 진행시켜볼 수 있는 사교술을 쌓았고, 스스로의 취향과 가치관을 쌓았고, 자기 생각을 적절히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화술을 쌓아온 덕분일거야. 그리고 그런 서로를 지켜봐왔고 말이야.

수신인이 정해져 있는 편지를 쓴다는 건, 그리고 그 편지를 공개적으로 연재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 편지는 내가 쓰는 글이지만 나를 표현하기보다 너를 궁금해하는 글에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덜컥 시작해버리긴 했지만, 누군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건 아주 커다란 일이니까 조금 긴장이 돼. 

내가 멀리서 힐긋힐긋 봐온 너는 나보다는 차분하고하고 싶은 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해야 하는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었어. 그 과중함에 가끔은 지쳐 보이기도 했지만 며칠 뒤엔 어느새 다시 할 일을 깔끔하게 해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이 보는 본인의 이야기를 무척 궁금해하곤 하지만, 누군가를 묘사하는 일은 폭력성을 희석시키기 쉽지 않은 작업이지. 그래서 나는 타인을 묘사하는 일 자체를 피해왔던 것 같아.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알아가는 이 작업이, 각자의 일방적인 작업이 아니라 함께 만드는 하나의 작업이 되길 바라. 

나는 요즘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라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일을 벌이고 있어. 이 서간문 프로젝트도 그 일 중 하나지. 독서모임도 만들고, 영화팟도 만들고, 비거니즘도 시작하고, 독립도 해버렸어. 욕심이 많아서 하고 싶은 게 많고 성격이 급해서 홀라당 시작해버려. 대신 해야만 하는 어떤 일들에선 도망치고 있기도 해. 

나는 계속 도망치고 있는 건가 생각해. 그런데 도망친다는 건 뭘 기준으로 도망친다고 표현하는거지? 무엇을 기준으로 전진과 도망이 달라지는 걸까.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어도 삶은 있지 않을까. 나는 이런 의문을 굴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어. 생각은 건강에 해로우니 최대한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게 잘 안 돼.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게 될까. 내가 하게 될 이야기도 궁금하고, 네가 들려주게 될 이야기는 더 궁금하고 기대돼. 10주간의 연재를 통해 우리가 각자 조금 더 부드러워질 수 있기를. 

너의 오늘 하루가 다정하기를 바라. 내가 가진 최선의 다정을 담아.

이천이십일년 오월 육일,

심이 많고 성격이 급한 신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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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타입 포켓몬 같은 신희 언니에게

오늘은 언니가 선물해준 꽃다발의 작약과 안개꽃을 다듬어서 유리 화병에 꽂아두었어.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꽃병 덕에 한껏 화사해진 방에서 이렇게 첫 편지를 쓰네.

편지를 연재한다는 게 참 신기한 발상이지. 수신인에게 닿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런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는 곳에 우리의 글이 놓이게 되겠지. 나는, 언니는, 그리고 우리는 이 연재를 통해 무엇을 얻게 될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아니, 문단이라는 게시판의 접근 권한은 없는 사람이지만 글로 나를 표현하는 게 다른 것보다는 편안한 사람으로서 억울할 때가 많았어. 왜 소리를 내서 울고 징징거리면 내 글은 형편없는 글이 될까. 나의 마음에 있는 결점은 왜 그토록 글에 잘 드러나는지. 원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왜 이토록 선명한 화질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지. 그래서 나는 사진의 한 귀퉁이를 확대할 수 있고, 확대하고 확대해서 그러한 현미경적인 아픔까지 느껴야 하는지. 그 미세한 균열로 왜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해야만 하고 헤어져야만 하는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슬픔은 이런 데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연재하기로 마음 먹은 나는 이번 연재를 통해 두 가지 주제를 고민해보려고 해. 첫 번째는 호칭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거리두기의 문제야.

첫 번째 이야기부터 해 볼까. 나는 종종 나밖에 모르는 편지를, 나밖에 모르는 글을 써 온 것 같아. 내가 를 불러도 실은 그 글은 를 위한 게 아니고, ‘라는 호칭은 내 말을 주저리 주저리 이어나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것. 이렇게 진정성이 없는 호명만을 해 가며 글을 썼으니 나는 상대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만을 하는 데 급급했던 거야. 내가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고, ‘라고 부르고, ‘신희라고 불렀을 때 나는 언니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신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앞으로 연재를 하며 수없이 언니를 호명하게 되겠지. 그리고 그 호명이 공허한 호명이 되지 않도록 나는 호명하는 나의 속마음을 성찰하며 그 진정성을 회복하고 싶어.

하지만 언니도 알다시피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겨. 알 수 있을까, 내가 알아도 될까, 내가 아는 것이 맞을까. 내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알아야 하는 것과 알지 않는 편이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언니를 앞에 두고 초점을 잡아가며, 나는 언니를 알고 싶은 마음과 알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무수히 반복하게 되겠지. 언니, ‘거리두기는 원래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방역 용어가 아니라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가 만든 말이래. 사람들에게는 친밀성을 담보한 개인적 거리와 공적 거리가 존재하고, 사적 영역을 지켜줄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거야. 정부가 계속해서 방역 지침을 수정하듯, 나도 사람들에 대한 거리두기단계를 조정하고 있어.

나는 여태까지 언니를 흐릿하게만 봐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쓰는 멋있는 학회장 선배, 독립 잡지에서 영화 칼럼을 연재하는 씨네필, 친절하고 세심한 과 선배, 이 정도의 이미지로. 만화 캐릭터처럼 추상화된 그림이기에 내가 확대하면 화질이 깨져버려. 언니에게 덧씌웠던 이미지가 온전히 엇나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 그래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고 해.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보는 사진의 화질을 어느 정도로 맞추어야 할지,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할지, 이런 걱정이 생기고 나는 지혜로운 해답을 얻고 싶어. 그 답을 10 주에 걸친 연재를 통해 서서히 알게 되겠지. 우리는 카메라의 초점을 조절하는 작업, 빛의 노출값을 맞추는 작업, 두 점 사이 선분의 길이를 가늠하는 작업을 하게 될 거야. 우리는 얼마만큼 가까워질 수 있고, 또 얼마만큼 가까워져야만 할까. 혹은, 얼마만큼 거리를 두어야 할까. 시쳇말로 '어사 (어색한 사이)'라 칭하고 시작했던 사이지만 이 어색함만으로 연재가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매번 공유할 만큼 가깝지 않았어. 앞으로도 그럴지 몰라. 하지만 글을 나누고 스스로를 글에 담을 용기가 있었어. 우리 둘 다에게. 그럴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내가 나의 물음에 해답을 찾아가듯, 언니도 언니의 물음에 해답을 찾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라. 마치 사연이 많은 강가에 닿아 편지를 쓰듯, 내가 발견하게 되는 새로움을 언니에게 근면히 공유할게. 그럼 우리는 조금 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일상에 임하게 되지 않을까. 서로 덕에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언니의 글이 가진 결을 더 알고 싶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이번 주말에는 어떤 약속이 있는지, 오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 편지를 쓰다 보니 궁금해졌어. 이 모든 것을 끝내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언니가 사는 일상의 장면을 목격하고 그것에 대해 더 궁금해할 수 있는 상냥한 편지 수신인이자 발신인이 되도록 노력할게.

잘 부탁해.

2021 5 6 일 밤 11

자기 할 말만 많은 시연이가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신희와 시연의 선배인 어느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는 그 섬의 존재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때로 그 섬을 넘보고 엿보고 탐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한 학번 차이로 입학한 신희와 시연은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일명 밥약으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후 이 년 동안 SNS 친구로만 지낸다. 졸업할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 것만 같던 둘은 신희의 돌연한 서간문 연재 제의로 이 년 만에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다시 만났다. 시쳇말로 소위 어사(어색한 사이)’인 이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둘은 함께 고민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그 섬에 갈 수 있을까. 매주 토요일마다 오고가는 편지. 무료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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