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개념의 역사
보편 개념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고대철학에서 보편성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무엇인가를 그리는데 주로 발견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 플라톤의 이데아 또한 보편으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와 플라톤의 이데아
다음은 고전인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가 처형되기 전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크리톤이 그를 설득하여 탈옥시키기 위한 과정에서의 대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서 정의와 행동의 원칙에 대해 말합니다. 어떤 권력자나 다수의 판단에 휘둘려야 하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정의로워야 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적인 관점이 아닌 절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진전을 이어받아 절대적 실체인 이데아개념을 말합니다. 이데아만이 세상의 유일한 실체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계의 모든것들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이에 관한 동굴의 비유는 너무 유명합니다.
당장 눈에 밟히는 이익이 되는 것, 다수가 요구하는 것, 권력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닌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의 정의가 소크라테스의 삶의 원칙인 것처럼, 플라톤에게도 지성이란 이데아를 통해 현실에 비친 사물들과 행태를 해석 평가하는것을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도 보편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어떤 개별적인것 너머의 것이 표현된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보편개념에 대한 조금 더 명시적인 사용은 아래에 나올 아리스토텔레스 《오르가논》의 보편명제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개별자와 보편자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플라톤은 전혀 경험한적이 없음에도 인지할 수 있는 이데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미 영혼이 이데아계에 있었고 그것들을 경험해보았지만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이데아적 기억을 잃어버렸고, 서서히 이데아적 경험을 상기해나가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낯선것을 처음 본다고 해서 경험하지도 않았던 무언가가 바로 떠오르는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데아를 떠올려야 할 철학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관념들을 주장할때, 절대적 이데아와의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사물들을 경험하고 관찰한 종합적인 판단을 플라톤이 이데아적이라고 말했을 때 크게 반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의 자연과학과 유사한 자연학을 저술하고, 자연학 이후의 존재와 인식에 관한 논문을 자연학 다음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불리운 14개의 논문을 쓰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이상학은 자연을 넘나드는 모든 학문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제 1의 철학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학문 가능성, 지식의 형성 가능성은 오히려 자연학이 선행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완전히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지혜에 대해 논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유일한 실체라고 말한것과 반대로 《범주론》 에서 실체란 서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개별적인 실체에 대해 서술할때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 철수는 중학생이다
- 철수는 롤을 한다
- 철수는 남자다
- 철수는 키가 160 이상이다
- 철수는 맏이다
- 철수는 외향적이다
위 서술문에서 철수에 대해 표현할 때 우리는 철수는 어떤 집단에 포함되는가에 따라 서술문이 규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수를 개별자, 서술문의 범주를 보편자라고 부릅니다.
플라톤의 의자 이데아 삼각형의 이데아도 마찬가지로 보편이라는 개념으로 명시화하지는 않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편자가 말하는것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사람에 대한 이데아를 형성하고 있으며 모든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이데아 즉 보편자는 어떤 범주와 맥락에 속하는 개별자들을 토대로 얻어낸 제 2의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것이 됩니다.
오르가논 - 보편명제와 집합
보편성은 논리학의 개념에서 명시적으로 출발합니다. 그 중 보편성은 '모든'을 사용함으로 명제에서 집합을 대상으로 사유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학은 다음 그림과 같이 벤다이어그램을 통해 원소와 집합의 관계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보편의 문제는 집합의 문제라고 볼 수 있으며 집합을 다루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보편은 그룹 내 어떤 원소 어떤 집합이 존재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때때로 달라지는 동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합을 규정하는것은 지난글 '연결의 작동원리'에서 이야기한 개념의 내포와도 연관이 깊습니다. 내포가 증가하면 외연이 감소하기 때문에 집합의 크기가 줄어들고, 내포가 감소하면 외연이 증가해 집합의 크기도 커지게 됩니다. 집합이 커지는 만큼이나 개념의 추상화 정도도 비례하여 올라가기 때문에 더 많은것을 담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어떤 보편적 이미지를 어떻게 선택하는가는 보편 개념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닌 사유 대상들의 집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대한 도미넌스(지배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보편개념은 시대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다르게 사용됩니다.
중세시대의 보편
앞서 말한것과 같이 고대 철학자들은 실체는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논쟁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시대인 중세시대에도 이런 실체에 대한 논의는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기독교 권력은 플라톤주의를 이어받게 됩니다. 형이상적인 신에게서 형상을 이어받아 형이하적인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는 그때 당시에 인간들의 규범을 규정하는 근본원리에 대한 토대를 만들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개념은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행동의 원칙과 신념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해주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이상향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중세시대의 신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개념도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데아에게서 신을 치환하였고, 신의 형상을 이어받은 인간은 인간의 궁극적 보편자로서의 신을 따라 마땅히 취해야할 신적인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신이 마땅이 해야 할 일을 대리하는 사람은 천사가 내려온 사람이며, 반대로 신이 마땅히 허락하지 않은 일을 벌이는 사람을 사탄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집단에 속하는 개별자의 행동을 허용할지 말아야할지를 규정하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십계명을 살펴보면 보편적 행위를 규정하는 규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보편적 행위에 관한 규율은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집단에서 발견됩니다. 집단의 보편성은 집단의 경계를 결정하는 규정을 설정함으로서, 각각의 집단에서 저마다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기반의 행동윤리이자 동시에 통치의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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