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실체라는 개념은 고대철학부터 내려온 개념인데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계속해서 바뀌어 왔습니다. 굉장히 거창하다고 볼 수 있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우스갯소리로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실체 - '내 여동생의 실체, 내 남자친구의 실체'를 살펴보면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것만큼 거창하거나 존재자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만큼은 아닌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실체개념은 충분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체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실체 개념의 이해를 통해 소통의 방식, 판단의 방식, 표현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근대적 실체
먼저 데카르트의 시대에 실체는 존재론과 결부되어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것을 말했습니다.
근대이성은 중세적 이성과의 갈등에서 피어난 사유들이 많습니다. 신 개념에서 출발해 인간이나 개별성을 회복하기 위한 흔적들이 많이 보이게 됩니다. 데카르트 또한 근대이성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여전히 중세적 관점에서의 신개념을 가져온다는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도 실체는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유일한 것은 오직 신뿐이다 라는 표현을 했는데,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 그 자체를 말하며, 이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양태들 또한 실체의 양상이라고 생각함으로서 중세 기독교적 신관념을 거부하게 됩니다. 인간의 실체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어떤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서 내재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재되어있기 때문에 스스로 발현될 수 있는 그 스스로의 힘이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말한 실체들은 보다 존재론적인 보다 본질적인 층위에서의 탐구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실체.. 를 이해하기 위한 들뢰즈 개념 구조 이해
현대사상으로 넘어오면서 실체 개념은 더 정교화됩니다. 들뢰즈는 실재와 실체를 구분하고 있는데, 실재가 형식화되지 않은 질료적인것이라면, 실체는 구별과 분절에 의해 형식화되고 선별되어 채취된 질료를 뜻합니다.
들뢰즈는 인지되기 이전, 가공되지 않은 질료적 존재 그자체, 스피노자의 자연이나 칸트의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을, '흐름'이나 '실재'라고도 표현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더이상 흐름이나 실재 그 자체를 논하는것이 아닌, 구별을 통해 선별되고 채취된 것을 이후를 말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지시스템은 구별을 처리합니다.인지시스템이 구별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추상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인지할때 세계 자체를 온전히 1:1매핑하여 인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지기관의 정보는 감각기관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감각기관으로 입력된 정보(필터링됨)를 통해 인지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사고하기 위해 추상화 작업을 거치게 됩니다.
무지개의 경우가 적절한 예인데,
1. 과거 우리나라에는 동양의 오행설을 기반으로 무지개를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검은색 휜색을,
2. 미국에서는 빨, 주, 노, 초, 파, 보 의 여섯가지 색을,
3. 이슬람권에서는 빨, 노, 초, 파의 네가지 색을 구별합니다.
즉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언어화하는 과정, 추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구별을 만들어내고 이 구별은 세계에 대한 감각의 일부를 상실하게 합니다.
이처럼 실재를 충분히 사고의 과정에서 다루기 위해선 선별하고 구분짓는 과정이 선행됩니다. 미국 기업인 애플의 무지개가 6가지 색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지요.
무지개의 성분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추상화되고 단순화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들뢰즈는 '지층을 만들어내고 분절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림에는 무지개의 지층이 잘 보이실겁니다.
들뢰즈는 인간이 사고하기 위해 포획하고 선별하여 잘라낸 토양을 지층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황태중임무'와 서양의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음가에 대한 인지는 지층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층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지층의 고유한 맥락이 형성됩니다. 이 맥락이 충분히 교차되지 않는다면 서로 다른 지층을 통해 소통하는 문제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방을 나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한 번역활동을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에 빠지게 되기도하고 온전히 번역되지 않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게 됩니다.
지금 작성하는 글과 개념 어휘 또한 실재로부터 분절되고 단순화한 덩어리들 모두 저마다의 지층들의 조합에 의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이런 지층화 선별화를 통하지 않는다면 깊은 사유를 이뤄 낼 수 없기 때문에 이 같은 활동을 신의 심판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고기능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지 신만이 그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다는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는 선행된 선별행위를 통해서만 고차원적인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사고로도 세계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는데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필연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평생을 연구한다고 해도 이 세계를 나의 그릇에 온전히 담을 수는 없다고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지식이란 기껏해야 선별되고 채취된 맥락 내에서만 합리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분절개념에서 분절은 언제나 이중적으로 동작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추상적이고 어렵지요. 자연적이고 실재적인 날것(불안적인 입자의 흐름들)은 온전히 그 자체로 다루기에는 너무 무거움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무거움을 해결하기 위해 가벼운 단위의 무엇(준안정적인 분자, 유사 분자)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인데, 사고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위를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2중분절 이후 표현된 실체라고 말할 수 있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학습하고 사고해나가기 위해선 개념이 필요한데, 때때로 이 개념마저 배우기에 버겁고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더욱 가벼운 사례를 통해 개념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은 항상 학생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추상적인 개념설명 이후에 항상 예를 들어 이해를 돕게 됩니다. 하나의 개념을 건설하기 위한 선행조직-비계구성(스캐폴딩)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반대로 연구자들이 개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오히려 흐름적인 아이디어와 접속하여 관련데이터를 모으고 선별하여 맥락을 제한하고 제한된 맥락내부에서 어떤 논리가 성립하게 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만들기도 하지요.
사례들은 실제로부터 떨어져 나온 실재의 한 단면(첫번째 분절) 양태 혹은 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묶어 추상화시킨 것을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개념화의 과정, 유사를 찾아내는 과정은 수많은 사례들 사이에서 차이를 제거하는 선별작업(두번째 분절)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념은 형식화된 실체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이 개념 혹은 사례들은 실재적인것의 한 단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선별되고 채취된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념적 관조 - 개념의 안경을 통해 보는 시선은 언제나 선별되고 채취된것으로서의 맥락제한적인 단면을 보는것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 라고 표현도 재밌지요.
- 내용 : 형식화된 질료
- 실체적 관점 : 질료들이 선별된다는 점
- 형식적 관점 : 실체의 선별은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별된다는점
- 표현 : 기능적 구조
- 형식 : 표현은 고유한 형식의 조직
- 실체 : 표현의 형식이 형성하는 화합물
사랑이라는 내용과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love', 'amour', 'Liebe', '愛' 사랑이라는 내용은 각국의 언어적 지층마다 달라집니다. 표현된 것 그 자체로 이미 고유한 형식과 실체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떨까요? 각국의 사랑의 방식과 문화도 공통점이 있지만 여전히 차이점도 존재할 겁니다. 아마도 지층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문화가 다를 수 있을겁니다.
굳이 멀리나가지 않더라도, 각 연인들마다의 정의하는 사랑또한 재각기의 형식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장미꽃 한송이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기도, 누군가는 스킨쉽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관심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도 있지요. 오히려 어떨때는 무관심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표현 너머의 내용을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아누워 자는 아내 혹은 남편에게서 사랑이 존재할까 끊임없이 질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표현된 표현적 실체로서의 사랑과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적 실체로서의 사랑의 괴리가 있는거지요. 이 둘 사이에서 다른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블랙박스를 늘 지니고 있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들뢰즈는 이 블랙박스가 마음과 표현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적 실체와 글의 표현적 실체 사이에서도 나타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표현적 실체와 접속하는 타자의 인지적 지층과의 만남, 분절과 해체를 통해 해석주체로부터 또다른 내용적 실체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 문장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내용과 형식이 소통과정에서 흔히 드러나는 맥락적 차이의 실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처럼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실체개념은 근대적 개념에서의 실체보다 더 개별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판단과 평가에 대한 규정적 표현과 병렬적 표현
- a는 b이다.
- a는 b일 수도 c일 수도 그 외의 것일 수도 있다. 나는 a가 b처럼 보인다.
앞서 비교해왔던 실체개념의 차이를 통해 근대적 사고와 현대적 사고의 차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대적 실체개념은 보다 절대적인 존재론적 관점에서 '규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현대적 실체개념은 해석주체에 따라 '병렬적' 해석이 가능하여 보다 맥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파민의 관점에서 근대적 사유는 아주 매력적이긴 합니다. 불확실성의 세계에 대해 재단하고 예측하는 행위보다 더 큰 예측이 또 있을까요? 반면 현대적 사유는 보다 섬세한 면이 없지 않지요. 그래서인지 근대적 이성으로 세상을 규정하던 거창한 방식의 철학에 매혹당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은 '~인것같다. ~처럼 보인다' 라는 병렬적 맥락을 반영한 표현보다 '~이다' 라는 규정적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규정적 표현은 그 맥락이 제한되어 내부에서 진리성이 보장되어 있을 때 그 가치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수학이 그렇지요. 수학은 잘못된 주장에 대해 모순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수학이 절대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은 철저히 논리적 기저의 맥락 내부, 모두가 그 맥락 내부에서 진리값을 보존하게 하는 공리계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모순을 드러내는 일 또한 이 동의된 맥락에서의 진리값이 보장될때만 온전하게 작동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 할때는 '~인것같다' 라는 말을 잘 안쓰지요. 오히려 쓰면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있는건지 의심이 들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같은 업무의 맥락이 정해져 제한된 영역에서는 충분히 규정적 표현들이 나타날 수 있지요. 심지어 정확하고 합리적일 때가 많습니다. 업무라는게 해석 다양성이 과도하면 진행이 불하기 때문에 특정 맥락이 지배적인게 보통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질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회사에서도 이런 지배적 맥락이 존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지배적 맥락으로부터의 이탈을 요구하는 사태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의사결정권자의 입장에서 모든 참여자의 이해의 방식을 바꿔야만 하는 큰 의사결정이 필요한경우 매우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요. 그래서 여전히 탈 맥락적 사고는 '~인것같다', '~처럼 보인다'는 병행적 표현이 더 융통성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통
서로 공유되지 않은 개별적 맥락 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이 규정적 언어로 구성된 경우가 간혹가다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유튜브의 댓글따위나 게임에서 나타나는 채팅들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지요.
실체는 형식화된 질료로서 내용적 실체와 표현적 실체는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면, 현대적인 의미에서 '평가'란 언제나 표현된 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 그 자체인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평가에서도 내용적 실체의 주체가 나타나 실체적 환원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 평가에게서 남아있는건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의 판단과정 사고과정만 남아있게 됩니다. 평가를 통해 드러나건 아이러니 하게도 대상적 실체가 아닌 해석주체의 사유내용의 실체로서의 지적능력을 드러나게 하는것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평가를 통해 상처받는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지요.
'보다' '보인다' 라는 표현, 관점으로서의 표현은 언제나 관찰주체의 시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찍는 사람은 카메라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언정 전체 뷰가, 그 프레임이 언제나 위치와 맥락적 관계를 내포합니다. 우리는 나의 신체로부터 접근 가능한 환경적 배치들 사이에서 피어난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을 뿐이지, 모든걸 뛰어넘은 절대적 위치에서를 획득하여 관찰 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관점도 세세한 사유의 전개를 낱낱이 공개하여 사유 참여자의 동의를 얻는 순간 동의된 사람들 사이에서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려면 역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멋지고 논리적인 글을 작성해야겟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의 범맥락적 소통의 과정에서는, '나는 이게 보여. 너가 보기엔 어때?' 라는 물음을 통해,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동의가 순수하게 내용적 동의인지 절차적 동의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상대방으로부터의 맥락적 교차지점을 확인하고 서로간에 차이로부터 이격된 실체를 접붙이는 과정이 필요하지요.
동의한다면 합의된 맥락 속에서 소통이 가능할 것이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지적 차이를 발생시키는 오해의 근원을 찾아내는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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