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조

장면 하나.

불암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입구로 접어드는 길목부터 엄청난 경사가 심상치 않았다. 저 끝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보였다. 매일 이 길을 오르내릴 학생들이 떠올라 괜히 숙연해졌다. 문제는 그게 시작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학교를 지나쳐 30분 정도 걷는 동안 극악한 경사는 계속됐다. 더 큰 문제는 이 또한 진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음 코스에 붙은 이름은 무려 ‘깔딱고개’였다. 혼자였다면 바락바락 올라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행한 애인은 딱 봐도 어려웠다. 쉬며 가며 몇 번 반복했지만 계속 가서 나을 게 없는 듯했다. 이 상태에서 깔딱고개는 어떻게 오를 것이며 무엇보다 하산할 체력을 남길 수 있을지 걱정됐다. 아쉽지만 중도 하산하기로 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눈에 밟힌 사람이 있다. 출발하고 10분 쯤 걸었을까. 어디선가 “나 좀 데려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여자 분이 상당히 지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시 앞을 보니 한 남자 분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얼른 올라와. 아니, 이제 시작인데. 아직 한참 남았는데 벌써 그러면 어떡해.” 휙 돌아 오르기 시작하는 남자. 여자는 지친 기색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 그대로 다시 한 발을 뗀다. 남자는 한 번씩 멈춰서 조금 지켜보다가 다시 앞서가기를 반복한다. 둘의 중간 속도로 오르던 우리가 몇 번 그를 지나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 시야에도 보이지 않게 됐다. 여자는 여전히 우리 뒤편에 있었다.

장면 둘.

제주도는 유채꽃이 한창이었다. 우리는 산방산을 찾았다. 곳곳에 유채꽃밭이 있는데 모두 사유지이기 때문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려면 인당 천원씩 내야 했다. 따지고 보면 포토부스도 몇천원 하는데 고작 이천원에 실컷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가성비 좋게 느껴졌다. 용머리해안을 한바퀴 돌고 나오자 바로 앞에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마침 음료를 사마신 가게에서 관리하는 곳이어서 결제하고 입장했다. 여기 서서 찰칵, 저기 서서 찰칵. 이쪽 보고 찰칵, 저쪽 보고 찰칵. 동시 입장 인원 수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 유료 입장이라서 그런지 지나치게 붐비지는 않았다. 어떻게 찍어도 배경에 사람이 걸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

나가려고 하는데 앞에 계시던 아주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자신을 의식한 걸 포착했는지 갑자기 딸을 향해 “여기 카메라 들고 계신 분한테 찍어달라고 부탁해볼까?”라며 나에게 다 들리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무슨! 그리고 남한테 뭘 그런 걸! 피해 끼치게!” 하지만 아주머니와 딸은 적절히 무시하는 것 같았고 나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가로로 찍고 세로로 찍고 줌인해서 사람들로 꽉 채워서 찍고 줌아웃해서 뒤쪽 풍경을 넉넉하게 담아서 찍었다. 우리도 부탁해서 투샷을 건졌다. 나가면서 돌아봤더니 아저씨는 계속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사진 좀 같이 찍자며 소리치고 있었다.

두 장면은 ‘같이 왔는데 왜 혼자 저렇게 비협조적으로 굴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니까. 대체 왜 저렇게 비협조적일까?

인간관계에서 협조는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 굳이 움직여야 하고, 내 페이스를 잠깐 멈춰야 하며, 표정 한번 더 짓고 말 한마디 더 하고 손짓 하나 더 얹어야 한다. 다들 그걸 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협조를 하면서 살아간다. 안 하고는 못 버티니까. ‘사회생활’이라며 적당히 손해도 보면서 어떻게든 굴려간다. 한 마디로 에너지를 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까운 관계일수록 에너지를 아낀다. 가만히 있고 싶고, 내 페이스대로 가고 싶다. 표정, 말, 손짓 모두 마음대로 하고 싶다. 왜? 안 해도 버티니까. 뭘 그런 것까지 해야 하냐, 내가 여기서도 불편하게 있어야 하냐 같은 말들이 그걸 대변한다. 내가 본 건 그게 행동으로 드러난 순간일 뿐이다.

개개인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사실 우리 모두 약간씩은 그렇기 때문이다. 좀 더 이해 받고 싶고 배려 받고 싶은 건 본성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일을 어떻게 덮어두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은 관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내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채 어색하게 마무리된다. 그와 같은 마무리가 반복되면 알게 모르게 쌓이는 서운함은 얼굴에 스며들고, 표정과 말투와 걸음걸이에 배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니 기억하고 돌아봐야 한다. 관계를 지키는 건 작고 반복적인 협조다. 잠깐 멈춰주는 걸음, 사진 한 장 같이 찍는 마음. 우리는 결국 그런 순간들로 관계를 쌓아간다.

인스타 매거진에 대한 생각을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그딴 건 언론이 아니야’라는 보수적 생각과 ‘언론의 권위는 이미 해체되고 재조립됐어’라는 현실적 인식 사이에서 결국은 어디에나 갖다 쓸 수 있는 ‘윤리’라는 답 앞에 고민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스라는 모범답안을 가진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뉴욕타임스보다 나은 처지라고 해야 할까요.

국악소녀가 찾은 답에서는 송소희가 인상적이었던 걸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로 확대시키는 데서 어떤 존경심마저 들었습니다. 개인 차원의 고민을 공동체 차원의 고민에 나란히 놓는 것 혹은 기꺼이 나란히 놓으려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 독서모임을 했습니다. 3개월에 한 권씩 읽는 벽돌책 모임의 올해 두 번째 책입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애쓰모글루의 다른 책(공동 저서) <권력과 진보>를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것과 비교하면 실망스럽긴 한데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확실하게 던져준다는 점에서 대화 나누기는 좋았습니다.

문장 수집은 남의 문장을 통해 스스로를 성실한 독자로 포지셔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리추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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