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엄마의 모습은 기억하는 참 예쁜 30대였다.
옷과 메이크업을 좋아할 때 어린 나는 항상 업혀있었기에 엄마의 등을 가장 많이 바라보았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부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는 '엄마의 얼굴'을 더 눈과 마음에 더 컸던 것 같은 것을 기억한다. 어린 나는 '왜 나는 그게 안되지?'라는 궁금증을 품으며 질문도 해보고 어쩔 때는 마음속으로 계속 짜증을 삼켰다.
어린 초등학생이 얼마나 알겠는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건 철저하게 내 입장일 뿐.
20대가 된 '다슬'이 지금 엄마를 바라보았을 때, 그저 안쓰럽다. 항상 예쁜 가방보다 딸을 업었어야 됐다. 지금은 그나마 '장애인을 보는 시선'이 많이 좋아졌지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몹쓸 동정'과 '시선'을 혼자서 <엄마>라는 타이틀이라는 이름으로 견뎠어야 됐다. 다른 친구들처럼 한 여름에 열기를 식히려고 마시는 맥주 한잔을 할 수 있는 모임에 참석을 할 수 없었고, 그럴 시간과 여유도 없었다.
그런 시간에는 '병원'을 이정표 없는 이방인처럼 좋다는 곳은 이리저리 다녔다.
조금이라도 호전을 목표로 나를 업고선 이리저리 다녔다. 그래도 '대화'가 어느 정도 본인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시켜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옆에 앉아서 서예, 토론 등등을 많이 시키셨다고 한다.
초등학교라는 냇가에 보내놓았더니 딸이 먼저 다친 곳은 몸이 아닌 같은 학우가 말을 험하게 해서 마음을 맞았다.
'애자'
나를 이름대신 그렇게 부르기 시작을 하였다. 그러나 아주 해맑게 엄마께 그 뜻이 무엇인지를 질문을 하였다.
"장애자를 너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누가 그랬어?"라고 차분하게 물었으나, 나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흘렸다. 그때는 엄마는 왜 이렇게 이성적일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선 그 학우가 욕설로 날 놀리거나 부르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진짜 '차분함'이 아니라 애써 차분한 척이었다. 엄마의 마음에는 새까만 멍이 들어있을 것이다. 딸의 눈물과 상황들은 되게 아팠을 것이기에.
"울면 지는 거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차별을 받거나 놀림거리가 되었을 때 항상 되받아치는 법도 알려주고 정글 같은 세상을 잘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울고만 있지 않게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그래야만 내 마음에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게 말솜씨를 늘리기 위해 독서를 시키기도 하셨고, 장애인을 주제로 한 도서를 사주기도 하시며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공격적 태도를 보일 때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려주는 게 하나의 교육이기도 하셨다.
지금은 20대이지만 애써 그랬던 것으로 생각이 들고, 엄마는 처음이라 힘들었을 텐데 어렸을 때는 그걸 몰랐다. 마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모든 상황을 다 헤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아니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예쁜 나이인 30대을 나에게 온전하게 '청춘'을 선물해 주셨다. 지금에서야 감사함을 표하면 엄마는 '우리 때는 원래 그러고 살았어'라고 답을 하시며 멋쩍게 웃으신다. 그 반응을 보았을 때 나는 마음이 저릿하기도 찡하기도 하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어렸을 때는 뒷모습이 나에게 어떠한 상황이 다가와도 막아주거나 어떻게 헤쳐나가야 될지 대화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삶에 지침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성인이 된 지금은 나의 롤모델 같고, 삶에 지침서 같은 존재는 여전하지만 든든하던 뒷모습은 많이 작아졌고, 많이 약해져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처럼 항상 걱정하시는 게 눈에 아직도 보인다.
이제는 엄마가 나를 안아준 만큼 많이 작아진 엄마의 뒷모습을 보듬고,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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