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질긴 장마다.
소매가 겅중 올라간 여름날. 빗물 마를 날이 없는 긴긴날이 이어지면 부표에 돌덩이를 묶어 놓은 듯 자꾸만 가라앉으려 한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 한 번이면 보송하게 마를 땅이 수십일을 지겹게 마를 듯 적신 채로 있는 건 참 보기 싫다. 날씨만 우울하면 그만인데 사람 마음도 눈에 보이는 날씨를 따라가니, 머리 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 먹은 구름을 둥 띄우고 살아가는 기분이랄까.
우울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행이다. 걱정인형도 싹 틀 준비를 한다. 쪽창을 열어두어도 바짝 마르지 못하는 작은 욕실은, 습을 머금은 시간의 작은 틈을 타 곰팡이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욕실에 검은 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면 공기 중의 물기가 이곳을 점령했구나 싶다. 그렇다고 반사적으로 그 점들을 제거하진 않는다. 귀찮다. 아직은 조금이니까.
오래된 시골집이라 그런지 비바람이 대차게 불고 빗물의 양이 넘치도록 많은 날이면 영락없다. 샷시와 벽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지도를 그려내거나 가끔은 천장 모서리에서 물이 고여 의미 없이 떨어지기도 한다. 지붕을 교체했음에도 8년째 해결되지 못한, 거센 비바람에 삐그덕거리는 외벽 어딘가의 괴기한 소리는 밤의 수면시간을 단축시킨다.
이런 날들이 찾아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를 하게 된다. 비바람으로 시작된 괴기한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지고 몸은 이불 고치 안에 둘둘 말린 채 마음의 입만 재잘댄다. ‘제발 비 좀 멈추게 해 주세요.’ 솔직한 기도임에도 현실은 영화처럼 흘러가진 않는다. 삐그덕 아니 이젠 끄억끄억 쇠가 갈리는, 이 소리가 몇 번만 더 들리면 기다랗고 묵직한 쇳덩어리가 방 창문을 부수고 허공을 찌를 것만 같은 그런 공포가 나를 감싼다.
괴기한 소리에서 멈추면 좋을 것을, 또 다른 요상한 소리가 들린다. 분리배출 하려고 1층에 내려둔 막내 분유통 봉지가 찢어졌나. 꼭 분유통들이 비바람을 타고 회오리 쳐 2층 창밖에 머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아. 괴롭다. 일어나자. 이젠 고치를 찢어내고 앉아 기도를 한다. ‘이 소리가 너무나 무섭습니다. 바람 좀 멈추게 해 주세요.’ 하지만 점점 강력해지는 창밖의 소리는 나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뿐이다.
양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토끼들이 참 부러운 순간이다. 내가 무섭기도 하지만 너희가 무서운 소리에 깰까 봐, 위험한 상황이 생길까 봐 걱정돼 기도하는데 잘만 자는 너희들이 그저 신기하다. 내 귀만 왜 이리 밝은 것인가. 컴컴한 방. 희미한 빛을 찾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문을 바라본다. 작은 몸에서 새어 나오는 토끼들의 숨소리를 따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여본다. 잘 되진 않지만.
그러다 문득 이런 기도가 나왔다. ‘이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이 잠잠할 수 있도록 평안을 주세요.’ 생각해 보니 이건 내 안에서만 복대기는 일이었다. 비바람이 창문을 부순 것도, 나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괴기한 소리들에 나 혼자 걱정을 끌어안고 겁먹고 있었던 것뿐. 아무리 걱정한들 그 어떤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숨을 고르고 다시 누웠다. 귀를 쉬이 닫진 못했지만 생각을 바꾸니 괴기한 소리들은 그저 소리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면 진작에 일어났을 것. 이제 그만 자야겠다. 잠에서 깬 지 2시간 만에 다시 잠을 청했다. 눈을 감고, 머리에 붙어있는 귀도, 마음의 귀도 꾹 닫아본다.
“엄마, 채채 잘 잤어요.” 깊은 잠에 빠졌던 것 같다. 엄마를 깨우는 둘째의 아침 기상소리에 어렵사리 눈을 떴다. 날은 밝았고 여전히 비는 오고 있었지만, 괴기한 소리들은 어디로 갔나 들려오질 않는다. 토끼들을 등원시키려 1층에 내려갔다. 말도 안 돼. 비바람에 1층에 있던 빈 화분이나 빨랫줄에 널어놓은 걸레는 바람에 다 날아갔는데, 분유통을 담은 봉지만 제자리에 눌러앉아 있었다. 지난밤 내가 들은 분유통 소리는 무어란 말인가. 빗물받이의 나사 하나가 빠졌나. 비바람에 캔이 굴러 다녔나. 아니면 내 상상 속의 소리인가.
빗물로 꽉 잠겼던 논의 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햇살이 내리쬐니 마을 여기저기 빗물 고인 웅덩이가 반짝반짝거린다. 햇빛의 힘을 빌어 담쟁이넝쿨처럼 욕실 벽을 타 오르려는 검은 점들을 지워내고, 쪽창을 바짝 열어 틈 사이로 불어온 바람결에 욕실 바닥을 말려본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두려움에 미리 마음 졸이지 않는 오늘이기를. 부디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들에. 바람, 하늘, 비, 햇살.
[저자 소개]
초록, 하늘, 나무, 들꽃. 자연의 위로가 최고의 피로회복제라 믿는 사람. 퍽퍽한 서울살이에서 유일한 위로였던 한강을 붙들고 살다, 시골로 터전을 옮긴 지 8년 차 시골사람. 느지막이 찾아온 줄줄이 사탕 5살 아들, 4살 남매 쌍둥이, 3살 막내딸과 평온한 시골에서 분투 중인 어설픈 살림의 연연년생 애 넷 엄마. 손글씨와 손그림, 디자인을 소소한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 ‘사랑하고, 사랑받고’라는 인생 주제를 이마에 붙이고, 주어진 오늘을 그저 살아가는 그냥 사람. 소박한 문장 한 줄을 쓸 때 희열을 느끼는, 쓰는 사람.
그대여. 행복은 여기에 있어요.
[쓰고뱉다]
글쓰기 모임 <쓰고뱉다>는 함께 모여 쓰는, 같이의 가치를 추구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닉네임을 정하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언어로 소통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글쓰기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뉴스레터로 발송되는 글은 <쓰고뱉다> 숙성반 분들의 글입니다. 오늘 읽으신 글 한잔이 마음의 온도를 1도 정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댓글 보러 가기’를 통해 본문 링크에 접속하여 ‘커피 보내기’ 기능으로 구독료를 지불해 주신다면 더욱더 좋은 뉴스레터를 만드는 데 활용하겠습니다.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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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티제
바람. 하늘. 비. 햇살- 마지막이 햇살이어서 괜시리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참좋다님의 글은 정말 특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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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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