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십자가 그리고 빛
여름의 끝자락 즈음, 강원도 원주에 있는 ‘뮤지엄산’에 다녀왔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했다는 ‘뮤지엄산’은 전국에 ‘가볼만한 곳’을 추천해주는 SNS 계정을 통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서 스크랩을 해둔 곳이었다.
자연의 미를 최대한 살려 지은 건축물과 곳곳의 전시를 구경하며 기분좋게 관람을 시작했다. 때마침 오전 도슨트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덕분에 좀 더 알차게 뮤지엄산을 둘러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이면 10분만에 둘러볼수 있지만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면 1시간 정도 걸린다. 천천히 들으면서 걷다보니 이 공간의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수 있었다.
길이 꼭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미로처럼 답답한 구조는 아니지만 다음 길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알수 없게 설계한 것이 꼭 미로의 구조를 어느정도는 참고한 것 같아 보였다. 분명 길이 끝난 것 같은데 코너를 돌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반면, 길이 있는 줄 알고 끝까지 가봤더니 길이 없기도 했다. 일부러 끝을 예측 할수 없게 설계한 것이 나는 참 재밌다고 생각했다.
재밌는 이야기들도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결말을 예측할수 없도록 만들어야 끝까지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인물은 그 길이 맞다고 여겨 관객들을 설득하지만 작가는 그 예측을 뒤집기도 하고 한편 인물이 그 길을 택하면 원하는 바를 못 이룰거 같이 만들어놓고서는 결국엔 반전을 주는 것이 이야기 작가들의 기술이다. 그런데 이 기법은 작가들의 머리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우리의 인생과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고 본뜬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우리의 삶이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측 불가능한 삶의 속성은 이야기로 볼때만 재미있지, 내 삶에 닥친 문제가 되면 이거 참 골치 아프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려하는 때, 가령 이 사람이 정말 내 평생 반려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뿐이면 다행일텐데 결혼하고 나면 자녀를 가지는 것이 과연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알수 없는 불확실함에 시달린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술이 나와 있는 시대에 과연 내 직장과 일자리는 안전할 것인가 불안하다. 그 누구도 예측할수 없는 미래시대에도 살아남으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생각하니 조급해진다.
세상은 온갖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 삶의 속성이다. 왜 이렇게 만들어진걸까.
반대로 생각해보자. 모든 미래를 우리가 알고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행복하기만 할까.
우리의 모든 미래를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모를 때보다 더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인생의 모든것이 확실하고 예측할수 있다면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의 진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삶은 편안할지 몰라도 인생의 변수가 주는 재미와 생기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무능력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께 의지하는 믿음을 배울 기회도 없을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불확실한것이 은혜다’ 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예측불가한 인생사에서 삶을 주관하시는 분을 의지할수 있는 믿음을 가질수 있다면 불확실한 삶은 은혜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의 은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뮤지엄산 관람을 시작하는 초입에는 신비한 공간이 하나 있다. 텅 비어있는 콘크리트 건물에 들어가면 하늘에 십자가 모양으로 뚫린 천장이 보인다. 공간의 옆면과 바닥에는 천장에 뚫려있는 십자가 모양따라 빛줄기로 채워져있다. 빛줄기의 모양과 방향, 길이는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고 계절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바닥이 젖는다.
잠깐 앉아 눈앞에 십자가와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의 움직임을 바라봤다. 문득 내 발치에도 내려앉은 빛을 보며 깨달았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하루 종일 그림자를 드리운다. 새벽에는 동쪽 끝까지 길게, 정오에는 십자가 밑에 작은 점으로, 저녁에는 다시 서쪽 하늘 끝까지. 나의 모든 삶의 순간도 십자가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것을.
유년시절 관심받고 싶어 했던 거짓말을 알고도 엄마는 내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줬다. 10대 시절 친구들과 대회에 나가서 받은 상금을 내 마음대로 써버렸다. 솔직하게 잘못을 고백하자 친구들은 말없이 용서해줬다. 결혼하고나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 마음만을 우선시하는 모순된 마음을 발견했다. 남편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의 힘듦은 크게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의 어려움을 알면서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 냉전은 아이가 태어난 후 더욱 깊어졌다.
밤마다 깨는 아이 때문에 지쳐갈 때, 나는 표현할 곳 없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남편에게 쏟아냈다. 아이에게는 차마 화를 낼 수 없어서 그 모든 분노와 짜증이 남편을 향했다. 물론 아이에게 아예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정말 너무 피곤하고 지칠 때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제발 좀 자라!"
참다가 참다가 소리를 지르고 나면, 그제서야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잠이 들곤 했다. 내 눈치를 보면서. 다음날 아침, 미안한 마음으로 멋쩍게 아이를 바라보면, 아이는 언제 엄마가 자기에게 화를 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그 순간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에게 매일 용서받으면서 무조건적인 용서에 대해 생각한다.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용서라는 이름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잘못을 하면 아무리 사과했다고 해도 계속 그 잘못한 것이 생각난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은 아예 없었던 일인 것처럼 여기실수 있을까. 특히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계속 생각이 나고 싸울때마다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되지 않던가. 아이의 해맑은 웃음 속에서 나의 허물을 덮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작은 거짓말들, 청춘기의 교만함들, 결혼 후의 이기적인 마음들, 육아 중의 인내 부족함들. 인생의 시기마다 하늘의 빛은 십자가를 통해 내 삶을 비추고 있었다.
새로운 달이 되니 바람이 선선해졌다. 끝날것 같지 않았던 무더위도 곧 선선한 바람 속에 잊혀져 갈 것이다.
다른 계절에 다른 이들과 이곳에 한번 더 올수 있을까.
다른 계절이 되면 남편과 나의 뮤즈인 아들과, 또 다른 계절에는 나에게 처음 안도 타다오라는 건축가를 알려준 친한 친구와 함께 이 공간을 새롭게 누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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