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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버리는 예술가의 고백

2025.09.05 | 조회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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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 STORY

네가지 컨셉 복음묵상 감성에세이

숨어버리는 예술가의 고백

‘숨어버리는 생명의 전달자’.

학생때 훈련받은 선교단체에서 복음 전하는 영적리더를 그렇게 표현했다. 페이스북이 과거에 작성한 글을 다시 보여준 덕분에 잊고 있었던 언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 한쪽이 찔린 것 같기도 하고.

복음전달자는 무명의 삶이고 숨어버리는 삶인데 글 써서 복음 전하는 일은 누군가가 읽어줘야만 한다. 드러내야 하는 일이고, 팔로워와 구독자를 모집하고 홍보하는 일인것 같아서 딜레마에 빠질때가 있다. 글로 표현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았으니 그 자체로 영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예술성을 가진 사람들은 혼자 소장하기 위한 작업 정도에 만족하기보다 반드시 지지와 인정, 연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본다. 멀리 보지 않아도 나만 해도 그러니까. 가끔은 내가 그런 욕망을 복음전도라는 수단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건 아닐까 스스로 의심이 들때가 있다.

고민이 며칠 이어지면서 습관처럼 다시 무언가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최고의 지성가이자 영성가셨던 이어령 어른이 회심하기 전 썼던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를 다시 찾아 읽어봤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많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셨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를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 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제목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이지만 창조주의 산물에 대한 감탄과 그 앞에 선 창작자의 겸손과 경의, 기도가 담겨있는 이 시를 처음 봤을때 나는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하기 직전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인 창조성이 자신 안에 있다는 걸 발견했음을 보여주는 이 시는 복음전도와 창조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에게 영감이 되어주기도 했다. 창의성을 발휘하거나 창조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 형상의 일부이고 창의성은 인간의 고유한 부분이다. 신앙여부와 상관없이 넓은 의미에서 모든 예술작품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가진 인간이 표현한 것이기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

프란시스 쉐퍼는 ‘예술과 기독교’라는 책에서 18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본주의라는 거대한 문화 흐름 속에서 기독교는 성경중심이 아닌 경건주의에 빠졌다고 말한다. 경건주의적 활동에만 주력하면서 철학 과학 예술 경제 정치 등의 영역들이 너무나 쉽게 세상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술과 기독교를 생각할때 여러가지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프란시스 쉐퍼는 서술한다. 먼저는 “그 예술이 이 일이 복음전도를 위해 쓰일수 있다면 예술가가 된다는 것도 멋진 일이야” 라는 생각이다. 이건 좁은 생각이다. 예술은 복음 전도를 위한 수단 정도가 아니다. 더 넓은 범위에 속한다. 영혼구원이라는 수단을 넘어 그 자체로 목적이 있다. 창조성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시작된 작업 자체가 이미 영적인 것이다.

또 하나는 “이 작품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해” 는 오해다. 기독교인들은 작품을 통해 설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노력 속에서 예술이 비정직해지고 이류로 속화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꼭 기독교적인 주제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더욱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종교적 주제에만 치중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종교적 주제가 완전히 비종교적일수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은 결코 종교적 주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성령의 리더십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예술가가 누리는 자유이다. 선교사의 자녀로 알려진 악뮤의 이찬혁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예술성과 음악성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본인의 역량대로 표현하지만 그 안에 어릴적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중심은 느껴진다. 기독교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임상춘 작가의 ‘동백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시도할수 있는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일명 ‘착한 드라마’들이 또 하나의 예가 될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작업방식에 어떤 틀을 넣을 필요도 없다. 기독교는 몇몇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이는 율법주의적 틀에서 하는 생각이다. 성령과 동행할때 그 열매가 우리 삶에 자연스레 드러나듯이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그 유연한 리듬 속에 작업하면 된다. 의미는 존재에 있는 것이지 소유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적 요소를 추가해야하지 않아도 된다. 데이트할때 꼭 큐티하고 나눔하지 않아도 되듯이. 예술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다. 좀 더 넓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자든지 먹든지 열심히 일하든지 항상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삶은 종교적 행위, 경건한 순간들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목적도 복음 전도보다 더 넓은 범위,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회사에서 신앙과 관련없어 보이는 일을 할때도 이게 하나님나라와 무슨 상관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고 하나님 형상이 내 삶에 재능으로 표현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하는 일은 비그리스도인과 크게 다를바 없지만, 우리의 중심과 태도, 우선순위는 다르다. 10여년간 나는 뮤지컬 다섯편과 에세이를 비롯한 산문들, 영상시나리오를 써왔다. 나에게 이 글들은 단순히 작품이나 결과물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 , 글과 각각의 영상들에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다시 돌려드리고 고백하는 마음과 스토리가 담겨있었다.

2014년 처음 뮤지컬을 쓰고 연출했었다. 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난뒤 나는 대강당 무대 뒤에서 두달의 여정을 무사히 마친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무대 앞에 서 있는 배우들은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 당시 스물여섯이던 나는 주목받지 못하는 내 역할이 조금 속상했었다. 그런데 무대 뒤 대기실에 홀로 있는 나에게 성령님이 조용히 찾아오셨다. 그리고 마음에 익숙한 울림이 일었다. “잘했다. 내가 너의 수고를 알고 있단다. 나는 지금 정말 기쁘단다” 성령의 음성이었다.

그때부터 창작물을 작업할때 내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주님이 아시면 됐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전해지면 저는 충분합니다. 나의 최후의 청중은 주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작품에는 이 고백이 담겨 있다.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5년간 만들어왔던 뮤지컬은 나의 스무살 봄과 여름의 경험을 담아 만들었다. 그때 내가 값없이 받은 사랑과 수고의 마음을 도로 관객들에게 전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차 울면서 대본을 썼고 연습 하는 내내 배우들과 함께 울고 기도하면서 만들었다. 두달간 연습을 마치고 극을 올렸을때 우리가 기도로 품으며 준비했던 불신자 관객들도 함께 울었었다.

또 한 번 기억에 남는 작업은 인천시청과 연합해서 썼던 어린이 안전 뮤지컬이었다. 그때 주님의 마음을 구했을때 어린이들을 섬기는 마음을 알려주셨다. 그렇게 준비한 뮤지컬을 처음 올리던 날, 나는 어린이들이 이야기에 집중하는 맑은 눈을 보며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지인의 아이들이 그 뮤지컬을 관람했다.

작품을 쓸때 관객과 독자는 무표정이다.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고 해도 사람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느꼈는지도 세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과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필과정에서 묵상하고 주님의 마음을 구했다. 그리고 주님 주신 마음을 담으면 보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을 수도없이 경험하면서 확신하게 됐다. 결과와 반응은 알게 되면 감사한 것이고 몰라도 나는 이미 과정에서 주님과 소통하는 상급을 누렸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시는 것이기에 나의 몫이 아님을 알고 맡기니 자유로워졌다.

우리의 최후 청중은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 우리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누리는 자유가 바로 이것이다. 명성에 대한 추구나 자만심으로 방해받을 필요가 없고 우리 자신의 영원성을 세우려고 노력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강박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교실 안의 야크’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은 유명한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현실적 문제로 교사로 살고있었다. 그러다 부탄의 산골마을로 부임을 받아 가는데, 그 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노래하는 여인을 만나 노래를 배운다. 그림같은 대자연 앞에서 둘은 노래를 부르며 대화를 나눈다. 주인공이 묻는다. “실력도 있는데 청중 앞에서 부르고 싶지 않느냐고, 도시로 나가서 도전해보는건 어떠냐고.” 여인은 답한다. ‘나는 이 위대한 자연에 노래를 바치는 거랍니다. 저 산과 하늘, 구름이 내 노래를 듣고 있지요.‘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시편에서 다윗이 했던 고백이 떠올랐다. “주께서 나의 주께서 친히 들으시는도다”

노래하는 다윗에게 묻는 다면 다윗은 답할 것이다.

“다윗, 당신은 왜 노래 하나요?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인가요 당신의 음악안 어린 양들만 들을 뿐입니다”

“천만에요. 나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나의 노래를 들으시지요. 내가 노래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봐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며 악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릴수 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작품을 살펴보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예술은 무명의 일이다. 오늘 우리가 보는 물품의 디자인을 누가했는지, 건축 설계를 누가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듣는 좋은 음악도 결코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개발하고 아름답게 가꾸라고 주신 세상에 단지 조금 보탤 뿐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많은 인류의 삶에 조금 보탤 따름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명성은 내가 스스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고 판단하는 영역이다.

훌륭한 작품의 의미는 약간이라도 누구에겐가 유용한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기쁨 속에 있는 것이다. 결과나 인정, 명성에 연연하는것 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개발할 꿈을 꾸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고백할뿐이다.

“주님 저는 단지 주님의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제게 주신 재능을 다 사용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불완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많은 것을 주셔서 제가 감당했던 모든 것 - 세상은 제가 했다고 말합니다 -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글쓰기가 과연 ‘숨어버리는 생명의 전달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답해보자면, 글과 예술, 이야기는 복음 전도의 수단 정도를 넘어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가 혹은 그것을 표현해내는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일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삶이었다. 기독교 예술은 그리스도인 한 사람의 총체적 삶의 표현이다. 상실과 절망으로 허덕이는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와 아름다움의 예술로 빚어져 가는 삶이어야 한다. 그 삶이 진실하게 담긴 것이 가장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작품이다. 그 삶에 그리스도가 사는 사람 또 그분의 인격과 그분의 생각, 마음, 향기로 사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작품에는 반드시 그분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나의 사랑하는 예수와 예술,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의심하고 확신하며 마음 속에 고이는 무형의 것들을 글이라는 표현으로 쏟아내본다.

 

소설 ‘철도원’을 쓴 작가 아사다 지로가 한 말로 긴 글을 마친다.

 

세상의 독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못한다면 이야기의 가치는 없다.

이야기는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간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려는 눈물겨운 믿음.

어디에도 없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글을 쓴다.

행복의 전도사, 눈물과 웃음이 가슴속에서 뭉클한 기쁨으로 뒤범벅이 되게 하는 천의무봉의 이야기꾼.

- 아사다 지로

 

 

 

첨부 이미지

 

글쓰는 씨앗에서 복음 일상 에세이 프로젝트에 함께할 작가님을 찾습니다 👀

일상에서 만난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이라면 누구든지 환영합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 글 못써도 괜찮아요 ! 함께 글쓰는 새싹으로 자라보아요 🌱

관심있으신 분들은 댓글이나 답장으로 문의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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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일상 에세이는 한 주에 한 편씩 올라갈 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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