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마음
- 공감의 두 얼굴
출산을 경험한 엄마들끼리 모이면 가장 첫 만남의 주제는 언제나 자신의 임신과 출산 경험이다. 결론은 내가 가장 고생했다는 이야기다. 여자들이 자신의 임신과 출산 이야기를 푸는 시간은 '여자들의 군대 이야기' 같기도 하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이 좀 더 서로 공감과 리액션을 잘 해준다는 정도일까.
'여자들의 군대 이야기'에는 레벨이 나뉜다. 경험도가 많을수록 높은 레벨이 된다. 더 많은 개월 수를 키워봤거나 혹은 더 많은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 고생한 레벨이 더 높다. 자녀가 똑같이 셋이어도 딸이냐 아들이냐에 따라 또 고생 레벨이 나뉜다. 더 고생한 자들 앞에서 아직 그만큼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진다.
여자들은 서로 자신의 고생 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나눈다. 그것이 여자들이 결속되는 원동력이 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의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이야기가 결국은 자신의 힘듦을 이해해주지 않는 남편들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질 때다. 혼자만의 고민과 고충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나의 힘듦은 정당화되고 남들도 인정하는 고충을 외면하는 남편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
더욱 확고해진 '나만 힘들다는 생각'은 관계 개선과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편에게 가서 "다른 집 남편은 이렇다며",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얘기했더니 다른 엄마들도 다 공감해주더라고" 해봤자 결국 어디 가서 남편 흉본 이야기를 내 입으로 옮길 뿐인 것이다. 이는 비단 부부뿐 아니라 연애 관계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은 너무 힘들거나 마음의 에너지가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지쳐 있을 때 '나만 가장 힘들다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나도 최근에 복직하고 워킹맘의 삶에 적응하던 첫 몇 달이 그랬다. 그때 싱글 후배 동료들과 교회에서 케어 중인 청년들의 고민에 공감하며 듣는 것이 참 어려웠다. 내 마음에 꽉 차 있는 '지금 너무 힘들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의 고민은 나에 비하면 가벼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공감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래, 그때는 그게 힘들겠지만 나중에 애 낳아 봐라. 지금이 더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나 꼰대스러운지!
고통은 상대화할 수 없는 것인데, 각자의 처지에서 느끼는 아픔을 있는 그대로 공감해주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마음의 여유도 그릇도 부족했던 것이다.
MBTI에서 F성향인 나는 '공감'이 중요한 사람이다. 공감해주는 것도 공감받는 것도 모두 나에게는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공감'받으면서 '정당화'된 그 이야기가 가장 공감받고 싶었던 가족에게는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의심하게 되었다. 과연 '공감'이 좋기만 한 가치일까?
요즘은 대문자 F가 각광받는 시대다. 공감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주는 사람을 보면 '너 T야?'라고 묻는다. 아마 사람들이 F성향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 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향을 떠나서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감'받을 때 심리적으로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공감 지수가 높으면 행복 지수도 높다는 통계도 있다.
문제는 남의 아픔은 공감하지 않으면서 나는 공감받고 싶은 이기심을 바탕으로 '공감'을 요구할 때 나타난다. '공감'하려면 내 자신을 비워야 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란 책에서 스캇 팩이 말한 것처럼 '가능한 한 그의 입장이 되어서 경험하기 위해 자신의 편견, 판단 기준, 욕구들을 일시적으로 제쳐두어야'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공감'은 '사랑의 표현'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완전히 제쳐두고 들어주고 경청할 때 사람은 자신이 일시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 상처받을 가능성은 줄고 오히려 마음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도중에 내 이야기도 하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지 못하고 뜬금없이 내 이야기를 꺼낸다면 서로의 대화는 '진정한 공감'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대화는 일단 '듣기'만 잘해도 성공이라고들 한다. 영어 표현에서도 듣는다는 말은 두 가지 단어가 있다. hearing과 listening인데, listening은 몸을 기울여서 귀 기울여 듣는다는 의미이다. 최근에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체력을 소모할 만큼 몸도 같이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일인지 공감할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듣는 훈련을 하기 힘든 요즘은 더더욱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여유 없이 산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 얘기해보면 다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들어줄 사람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경청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시편 34:16). 하나님은 내 신음 소리만 들어도 아시는 분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온몸을 기울여 경청하고 들으신다.
엄마도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왜 우는지 안다. 배가 고픈 건지, 졸린 건지,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 바로 안다. 아이 낳기 전에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나니 사랑의 힘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엄마는 멀리서도 아이를 알아보고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익숙한 소리가 들려서 가보면 내 아이가 맞다. 사랑하니까 아는 것이다. 사랑하면 몸을 기울여 경청하고 말 못하는 아이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이 있어야 '공감'은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이기심의 동기로 '공감'을 사용하면 효력을 잃어버린다. 또 다른 이기심만 양산할 뿐이다. 자기중심성이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안 들리지 않는가. 나만 힘들다, 내가 가장 힘들다는 생각을 비우고 다른 이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을 채울 때에만 진정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겨난다. '듣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다. 점점 개인화되는 시대에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감의 힘이 더 절실하다.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존재다. 그런데 이 아픔을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고 공감받고 싶다. 그래서 외롭다.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짐작만 하고 위로할 뿐이지 내 마음을 완전히 알아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가족도 못한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이어도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감받고 싶은데 그리해줄 사람이 없을 때 나는 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린다. '내가 너의 고통과 외로움을 안다. 나도 겪어 봤단다'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주님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조차 자신을 버린 것 같은 그 외로움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철저히 혼자서 구원자의 사명을 감당하셔야 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으로 가장 낮은 데 처해 보시고 하늘의 보좌라는 가장 높은 곳에도 처해 보신 분이다. 인간이셨고 동시에 하나님이셨다. 모든 처지를 경험해 보신 분이다. 모든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 '듣는 마음'을 구해본다. '진정한 공감'의 원천인 '사랑의 힘'을 구한다. '듣는 마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심해본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그들의 문제가 절반 이상은 해결될 것이다. 서로가 진정한 공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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