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전도강의를 맡아 준비 하던 중이었다. 말씀 한 구절이 마음에 쏙 박혀 내내 맴돌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복음 전하는 일을 하는데 어떻게 생명도 아깝지 않을수 있을까? 어떻게 삶을 걸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완주할수 있었을까?
며칠을 이 말씀으로 씨름 하던 중, 마음속에 번개가 친듯 깨달음의 순간이 번뜩 찾아왔다.
우리는 결혼 7년만에 첫 아이를 가졌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아이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철저하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이를 낳고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이들, 책가방 메고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학생들만 봐도 너무 예뻐보였다. 아기를 안고 지나가는 엄마들이 너무 소중해보였고,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이는 내 마음 속 천국의 또다른 문 하나가 열린듯한 경험이었다. 아이가 찾아와 내 몸과 하나된 뒤부터 내 마음에도 천국이 임했던 것이다. 어린아이는 관심도 없고 대할줄도 몰라 어려워하던 이전 내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모성애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해오던 대학생 사역에 임하는 내 관점도 완전히 달라졌다. 캠퍼스에서 만나는 대학생들과 교회에서 청년들을 볼 때 모두가 내 자식의 미래같아 보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자식’인지를 내가 자식을 나아보니 정말 알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마음속에 이런 울림이 일었다.
“네가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이렇게 귀한데 내가 생명걸고 낳은 내 자녀들은 얼마나 귀하겠니?”
아이를 낳고서야 내 생명도 아깝지 않는 귀한 존재에 대한 사랑을 깨닫기 시작했다. 스무살때부터 지금까지, 전임사역자로 대학생 사역을 한지는 12년째가 되는 동안 수많은 청년들을 만나 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 자식을 위한 기도를 가장 간절히 한다. 그리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어쩌면 사람 살리는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깝지 않다는 바울의 고백은 내 자식 살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내 젊음과 생명도 포기할수 있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 깨달음 후에 나는 며칠간 이 말씀을 생각할때마다 울컥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해 다시 사역하는 지금까지도 이 말씀이 나를 이끌고 있다. 육아와 병행하며 사역하는 물리적 부담이 느껴질때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신다.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혹시나 훗날 아이 마음의 구멍이 될까 고민될때마다 그 한계를 넘어서도록 말씀으로 갈대같은 마음을 붙잡아 주신다. ‘사람 살리는 일이라면, 내 상황이 어떻든 할수 있는 최선으로 섬기자’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도 합했던 것일까. 복직후 사역하는데 추수할 일꾼들을 마구 붙여주신다. 그 어느때보다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보게하시니 나는 그저 감격하고 감사하며 호황기같은 사역 시기를 지나고 있다.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준비된 듯이 영적인 양식을 먹고 점점 성장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나는 마냥 행복하다. 한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해가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을 옆에서 지켜볼수 있는 특권에 감격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되새긴다. 한 생명이 자라는데는 누군가의 수고와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꽃이 져야 열매를 맺듯 죽음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새생명도 시작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확신한다. 나는 매일 죽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삶인데도 진한 행복감에 기뻐 신이 난다.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덧 입어야만 해낼수 있는 엄마 또 영적엄마의 삶은 천국에서 노동하는 것 같은 아이러니한 기쁨이 있다.
꽃이 져야 푸른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만물의 이치다. 화분 하나를 키워봐도 그렇다. 아랫잎이 희생해 시들어야 위의 잎이 자라고 또 새 잎이 난다.
아이가 엄마의 젊음과 생명을 먹고 크며 장성한 어른이 되듯이 나도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젊음과 하루를 먹고 자랐다.
윗 세대가 수고하며 일구어 놓은 수고의 열매를 다음 세대가 이어 받듯이 누구 하나 빚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수의 죽음에 우리 모두가 생명의 빚을 졌듯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거룩한 죽음에 빚을 지고 있다.
거룩한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은 기꺼이 또 다시 누군가를 위한 거름이 되기를 자처한다. 삶을 거는 거룩한 열정과 사랑으로. 생명조차 귀하지 않게 여길 정도로 기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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