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일’에 대하여
책을 좋아한건 어렸을적부터였다. 대개 부모들이 그렇듯 우리 엄마도 내가 어렸을때에 책을 가장 많이 사줬다. 전집류였던걸로 기억이 난다. 거실 한편 책장에 많은 책들이 꽂혀있었다. 내가 직접 꺼내 읽은 적은 없었지만 집에 책이 꽂혀있는 그 풍경이 지금도 내 기억에는 평안함을 느끼는 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아마 나는 거실에 책이 꽂혀있는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던것 같다. 정작 책을 꺼내 읽지는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지금도 책이 많이 꽂혀있는 장소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서점과 북카페는 나에게 언제나 마음의 힘을 회복할수 있는 공간이다. 학교 다닐때도 도서관은 나만의 아지트였고 대학생때는 일부러 도서관에서 알바를 한적도 있었다.
책 읽는 재미를 처음 알게 된건 중학생 때였다. 친구가 『해리포터』 책을 빌려줬다. 나는 그때까지 출간돼있던 해리포터 전권을 (아마 4권까지 나왔었던것 같다) 거의 한 주만에 다 읽었다.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서 책을 읽은 첫번째 경험이었다. 또 한번은 고등학생때였다. 이번에도 친구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추천해줬다. 처음 읽은 책은 『타나토노트』였다. 너무 재밌어서 나는 그 작가의 소설을 찾아 거의 다 읽었다. 10대 시절에 ‘책은 재미있다’라는 소중한 경험을 겪은 것은 아주 큰 행운이었다.
책 읽는게 재밌다는 걸 알았다고 꾸준히 읽을수 있는건 아니었다. 삶은 늘 바빴고 흥미와 성실은 별개의 문제일때가 많았다. 다만 내가 국문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늘 느꼈다. 막상 책을 꾸준히 읽지 못했으니 다독은 삶에서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목표로만 남겨져 있었다.
책을 꾸준히 읽는 습관이 잡힌건 한참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드라마 작가 아카데미를 다니기 시작했던 서른즈음, 작가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난 후부터였다. 선생님은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한 주에 두권 책도 안 읽냐며 우리를 혼내셨다. 그 당시 나에게 주어진 재능을 성실히 개발하고 성장시키는 것 또한 중요한 사명이라는 걸 깨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행위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몸을 설득해야 했다. 내 몸과 머리는 자꾸 집중하지 못하고 움직이려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을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으며 하루하루 내 몸을 적응시켜나갔다. 시간이 지나 어떤 논문에서 ‘책을 자주 읽으면 뇌에 길이 따로 생긴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처음 읽을때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해서 읽는 속도가 더디지만, 자꾸 읽다보면 그 길이 잘 닦아져서 점점 더 빨라지고 잘 읽혀진다는 것이다. 지금와서 돌아보니 그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내 몸을 길들여 책읽는 습관을 들인지 7년, 첫 해는 30권을 읽었고 그 다음해는 60권, 그 다음해는 80권을 읽었다. 한 주에 두권씩 책을 읽으면 1년에 100권을 읽을수 있는데 여러 변수와 사정을 고려해서 80권을 읽으면 목표에 달성한 것이라 생각하며 한해한해 지나왔다. 현직작가들도 1년에 7-80권정도 읽는다고 하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30대를 보내는 10년 동안 천권을 읽는 것이 목표인데, 서른일곱인 지금 절반정도 도달했다. 80%만 이뤄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출산하고 나서는 목표를 하향 조정할 수 밖에 없었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읽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다.
아이를 낳고나서 한 해 읽은 책이 많아봐야 50권 정도였기 때문에 조바심이 난 적도 있었다. 더 많이읽어야 하는데 하면서. 그런데, 나의 독서 여정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바로 ‘동화’ 읽기 였다. 우리 아이는 부모 덕분(?)에 서재가 있는 집의 풍경을 보며 크는 중이다. 책을 많이 읽으며 내가 얻은 값진 것들, 가령 문해력, 어휘력, 표현력, 세상을 이해하는 시각, 공부의 재미 등등을 아이도 누렸으면 했다. 그래서 거실에는 아이의 책장을 따로 두었다. 어린이집에서 다독상 이벤트를 시작하면서 아이도 나도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됐다. 그때는 아이에게 미디어를 노출하기 전이어서 하원하고나서 책을 읽으며 엄마와 놀았다. 책 속에서 일상생활 원리를 배우기도 하고 말이 빠르게 늘었다. 무엇보다 엄마와 상호작용하며 많이 웃었다. 덤으로 어린이집에서 다독왕 상장도 받아왔다. 그 달에 이레와 읽은 책은 360여권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레와 함께 읽은 책을 합치면 천권을 읽겠다는 내 목표는 거의 달성이 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을 통해 나는 ‘독서’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동화라는 장르의 책은 짧지만 그만큼 응축해서 담긴 내용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동화는 아이들의 책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어른에게도 통하는 보편적인 주제가 담긴 수준높은 문학이다. 또 하나, 아이들과 책을 읽다보면 한권을 여러번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나는 ‘여러번 읽는 독서‘의 묘미를 알게됐다. 처음 읽을때는 호기심으로 읽는다. 두번째 읽을때는 이미 내용을 알기 때문에 다른 부분에 집중해서 보게된다. 여러번 읽을 수록 책은 계속 새롭다. 매번 다른 주제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다는 점이 ’여러번 읽는 독서‘의 진정한 묘미다.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아이는 왜 자꾸 읽어달라고 할까. 아이는 똑같은 부분에서 매번 똑같이 반응하고 ‘놀란다’. 아마 그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우리 아이는 ‘달님안녕’이라는 책을 좋아하는데, 그 책을 읽을때 우리만의 루틴이 있다. 우선, 첫 표지에 달님이 환하게 웃는 표정그림과 제목을 보면서 달님 안녕이라고 읽는다. 그러면 아이는 달님을 보며 손을 흔들어준다. 다음 장에 까만 하늘에 달님이 올라오면 아이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달님이 나오면 다시 웃으며 안녕해준다. 구름이 나와 달님을 가리는 장면이 나오면 아이는 안타까운 표정을 같이 짓는다. 그러다 구름이 걷히고 다시 달님이 나오면 웃고 있는 달님 표정 따라 아이는 환하게 웃는다. 마지막 장에 달님이 메롱하는 표정을 보면서 엄마와 같이 메롱을 하고 까르르 웃는다. 그리고 창밖에 떠 있는 달님을 보며 다시한번 안녕 인사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수도없이 우리는 이 루틴을 반복하면서 함께 재밌어하고 행복해했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여러번 읽기’의 맛을 알았다면, 30대가 되고나서는 ‘고전읽기’의 맛을 경험했다. 20대때 국문학과 교수님들이 고전을 읽으라고 말씀하실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렵고 재미없는데다 두껍기까지 한 고전을 왜 읽으라고 하는건지. 그런데 30대가 넘고 인생과 사람을 좀 더 경험하고 나니 ‘고전’이 너무 재미있어졌다. 고전의 입문을 처음 도운 책은 ‘노인과 바다’였다. 10대때 읽었을 때와는 너무 다르게 다가온 소설이었다. 40대가 되어서 고전을 다시 읽으면 30대와는 또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이 살아있는 고전 소설의 맛은 나이가 들수록 더 다양하게 즐길수 있으리라.
연구를 위해 책을 읽었던 경험도 기억이 난다. 같은 주제를 가진 책을 여러 권 읽으면 그 지식이 내것이 된다. 업무상 연말만 되면 각종 트렌드서를 독파할수 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5년이 됐다. 트렌드서와 세대 연구 관련책만 몇십권이 사무실에 쌓여있다. 이 책들은 밑줄긋고 인덱스 붙이고 요약하고 스크립트 만들고 PPT 시각자료 만들고 강의도 여러번 했다. 나는 그 책들을 10번은 재독한 셈이었다. 그러니 그 지식은 이제 어느 누구도 배낄수 없는 나의 지식이 된 것이다.
나에게 ‘읽기’는 언제나 목마름이다. 읽어도 읽어도 부족하고 읽고 싶은 책은 여전히 수두룩하다.
그동안은 재미와 감상 위주의 책들을 많이 읽어왔다. 문학을 가장 많이 읽었고 다음이 인문학, 현직작가들의 에세이, 그외의 장르는 아주 가끔 읽었다. 문학은 내 취향이기도 하지만 초보작가로서 문장력이나 소재구상, 이야기 구성에 도움을 받고 싶어 일부러 많이 찾아 읽었다. 이제는 감상 위주의 독자로서의 독서를 넘어 작가의 독서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한다. 단순히 ‘읽고 쓰는’ 것만이 관심사라면 독자로 머물수 밖에 없다. 작가들은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해 공부하고 읽는다. 논문까지 읽으며 자료조사하고 그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몰두해 공부하고 쓰고 싶은것, 나에게는 무엇일까.
우선은 손에 잘 닿지 않았던 다양한 분야 (과학, 미술, 정보 관련 등등) 의 책들부터 탐독해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본다. 40대에는 다독보다는 완독과 새로운 도전을 목표로 집에 쌓아둔 두꺼운 벽돌책들, 더 어려운 고전들을 읽고 싶다. 빌 게이츠가 유명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다독비결을 밝힌적이 있다. 1년에 두 번정도는 2주의 시간을 빼서 하루종일 책만 읽는 시간으로 쓴다고 한다. 2주 동안 읽는 책이 15권정도인데 두께가 천 페이지인 책을 비롯해 두꺼운 벽돌책이 대부분이다. 1년에 2주, 휴가 기간을 나도 그렇게 쓰고 싶은 로망을 좀 더 본격적으로 실현해볼 셈이다.
이쯤에서 누군가를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유명작가들의 말을 빌려 답하고 싶다.
밀란 쿤데라는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라고 말했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책(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나’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은 중요하다.
이승우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합니다.”
책을 읽는 이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장을 통해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때문에 읽는다고. 나의 사고의 수준이나 누군가와 대화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문장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고, 책 읽는 행위가 ‘나의 것’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경험으로 책 읽는걸 좋아하게 됐을뿐 아니라 지금은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떤 습관이든 ‘그 장소’에 가야 더 잘되는 루틴 같은 것이 있다. 나의 독서 장소는 ‘지하철’이다. 어쩌다보니 30대는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삶을 사는 중인데, 오가는 시간동안 백색소음이 들리는 지하철안이 나에게는 가장 집중해서 책을 읽을수 있는 환경이다. 혹은 집에 혼자 있을 때 소파에 누워 책읽다 잠드는 것이 나의 내면이 충전되는 시간이다.
이번주는 재밌는 소설 책 두권을 빌려왔다. 어려운 벽돌책 읽겠다고 해놓고서는 여전히 재미있는 책에 손이 먼저 간다. 아직 40대가 안됐으니까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하하. 아이가 하원하기 전에 한권을 꺼내 소파에 누워 읽어볼 예정이다. 새로운 책을 빌리고 막 읽기 시작할때의 설렘, 책을 읽으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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