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_ 계절은 고요하게 흐르고.

고요한 계절을 닮은 사람들.

2022.10.03 | 조회 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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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계절들

에세이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에세이.

  작성 중인 글이 있어 눌러 보았더니 9월 9일에 제목 ‘열여섯 번째’ 라고만 적어 놓은 거였다. 9월에도 글을 발행하려 노력은 했었구나. 기억은 안 나지만.. 한 달여 만에 같은 페이지에 글을 쓰고 있다.

 어느새 시월이 되었다. 놀라운 시간의 속도. 하늘이 청명하고 푸르고 높아져 있다. 몇 번 두꺼운 스웨터 자켓을 걸친 적도 있다. 날이 서늘해져 간다. 

 봄에 집 옆에 커다란 나무에서 하얀 꽃이 피고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는 얘기를 여기에 적은 적이 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려 먹고 있다. 그 나무는 배나무였다. 야생에서 자라는 아주 단단한 배다. 처음에 설익은 배를 동네 할머니가 건네 주었을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배일까 신기해했다. 아주 단단해 칼로 껍질을 벗기기 수월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 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며칠 후 집 옆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가보니 할머니가 엄청나게 기다란 장대를 하늘로 뻗어 저 위에 매달린 배를 탁 탁 치고 계셨다. 그 충격으로 배가 도르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거였다. 배에 든 멍이 설명되는 장면이었다. 농약을 친다거나 가지치기 등의 손질은 전혀 없는 야생의 나무에서 배가 열리다니. 맛도 꽤 괜찮다.

 꽃이 피었던 계절을 지나 그 나무에서 열린 과일을 먹으며 또 계절이 흐르고 있음을 실감했다.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연은 볕과 바람과 비를 맞으며 꽃을 피우고 잎을 무성하게 하며 또 열매까지 맺었다. 이제는 곧 잎들의 색이 변해가고 또 떨어지겠지. 전혀 요란하지 않고 고요히, 하지만 부지런히 시간에 발맞추는 존재들. 내가 그걸 알아보든, 모르든 전혀 상관 않고 그저 늘 똑같이, 매년을 반복하는 존재들이 있다는게 어쩐지 위안이 되는 것 같은 기분.

자연 그대로의 날 것.
자연 그대로의 날 것.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15년 전 오늘’의 포스트 알림을 보고 놀랐다. 15년? 15년 전 거의 처음 블로그에 재미를 들이고 사진을 찍으러 여기 저기 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의 포스트가 나왔다. 지난 세월도 징그러운데 그 포스트를 쓰던 내 작은 자취방의 풍경과 그 사진을 찍었던 날의 풍경들이 기억이 나는 건 더더욱 징그러웠다.

 그 시절에 가끔씩 댓글을 나누고 블로그 안부글을 나누던 이웃들의 어렴풋하지만 익숙한 닉네임들도 보였다. 아주 가끔 블로그 앱에 들어갔을 때 정말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는 반가운 이웃의 닉네임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데 또 실은 모르는 사람이고 그의 새로운 포스트가 15년 전이랑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사람 그 자체일 때 느끼는 소름과도 비슷한 이상한 쾌감이 있다. 그가 그동안 블로그 활동이 뜸했어도, 싱글에서 커플이 되고 부모가 되고 세월이 흘러 많은 환경이 변했어도, 그의 개인 공간인 블로그에서 만큼은 그냥 내가 15년 전에 알던 그 사람 그 자체라는게, 왠지 다행스럽고 위안이 되는 거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 이상한 애틋함은 뭘까. 그 대상에 대한 애틋함이라기 보다는 그 시절의 우리들, 또 변함없이 모니터 너머의 어느 세상에 그대로 있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랄까. 마치 자연을 닮은 한결 같은 사람들. 내가 내년 봄에 여기에 있든 없든 배나무는 또 하얀 꽃을 피울 것이고 늦여름에는 옹골찬 열매를 맺을 것이란 의심 없는 당연함 처럼 그들도 그렇게 한 해, 한 해 앞으로도 살아갈 것임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 같다.

 

여러 덩굴이 휘감은 야생의 배나무
여러 덩굴이 휘감은 야생의 배나무

 

 각자의 자리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한결 같이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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