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예율입니다. 머뭇거리다 끝을 맺지 못하고 어영부영 끝나는 게 제 특단점(특장점 아님)인데 여기서도 낭낭히 드러나네요. 마지막 레터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마지막은 에세이가 아닌 독자분들께 직접 이야기하듯 편지 형식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사색과 방랑에 대해 정말 작가라도 된 듯 멋진 '척'하는 문체로 써제끼는 걸 견뎌내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매주 한 편씩 글을 쓴다는 건 정말 호기로운 발언이었더라구요.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만 말하면 글쓰는 사람 같지 않으니 제가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여러분의 새해를 빌어보자면...
"잔상이 많이 남는 26년이 되길"
저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요. 일과 관련된 건 웬만해선 기억하는데... 뇌가 무의식적으로 거르는 걸까요? 사적 만남에서 진심으로 교류하지만 돌아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얘기를 했는지, 상대방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지도요. '기억해야지' 하고 입력하듯 다시 한 번 뇌에서 처리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기억으로 남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변명하자면, 가장 원초적인 행복을 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잘 기억 못하지만, 함께 했던 순간과 느낌만큼은 진한 잔상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그런 순간이 많아지는 26년이 되길 바라는 게 제 관점에서 독자분들의 행복을 비는 방식입니다.
1년간 저를 괴롭혀 온 불안감은 교토의 생경한 풍광과 입맛 도는 요리 사이를 집요하게 비집고 제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일상적 스릴을 즐기는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불안함 속에서 집중력과 성과가 나왔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요동침을 느꼈습니다. 가벼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올해 정신건강의학과에 다녀왔봤는데요,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너무 자주 눈물이 차올라서' 입니다. 제가 아이유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슬퍼서 우는 건 아니고 감정이 조금만 올라와도 그게 눈물로 터져 사람을 만나기 부끄러운 수준이라 찾아간 게 전부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감정을 처리하는 내부 회로에서 견디지 못해 신체화된 반응이 눈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굳이 표현해보는 25년의 괴로움과 불안함은 '공상적 신뢰'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배신감을 느껴서-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을 내뱉는 나 자신이 너무 유치한 것 같았거든요. 사기죄 말고 세상에 배신이라는 게 어딨겠나요? 다 각자의 중심이 있고, 그걸 지키기 위해 타인과 맺는 관계는 변할 수 있죠. 이걸 배신이라 표현한다면 철없는 유아적 사고방식인가 싶어 혼자서도 못 꺼내보게 숨겨둔 마음이었습니다.

야세의 숲을 걸으며, 가모강변에 앉아 쉬며, 다리 위에서 교토의 전경을 감상하며 끊임없이 자문했습니다. 결국 타인이 나를 배신하지 않았으면 하는 '공상적 신뢰'가 문제였구나- 깨달았습니다. 불안했던 마음은 잠잠해진 한편 슬픈 마음도 한 켠에 남았습니다. 상대방의 변화가 문제가 아니라, 결국 간절했던 내 마음이 문제였다고 생각하니 다시 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고, 이걸 벗어나기 위해 간절했던 모든 마음을 버리고 모든 걸 초월하고 싶었습니다.
일전에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건 무색무취에 가까운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인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해한 사람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유해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그걸 넘어서는 유익함과 사랑이 있을 때 진정으로 의미있는 관계가 된다, 고 말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봅니다. 타인에게 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유해한 사람이 된다고 말입니다. 남을 믿는 마음마저 공상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마음은 편할지언정 내가 나에게 너무 박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그래. 미워할 때는 미워하자.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잠시간만 미워하자. 그걸로 나를 다독여주는 걸로 하자. 마음먹었습니다.
제 인생은 '열정과 초연함' 두 가지 키워드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여전히 갇혀있습니다. 매사에 담담하고자 했던 20대의 끝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열정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해 달려온 게 최근 5, 6년의 일입니다. 이제는 그 두 지점 사이에서의 줄다리기를 즐기며 때로는 깊은 물길에 빠져들었다가 때로는 관조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바라 봅니다.
최근 몇 년은 저질 체력에 비해 해외여행을 자주 갔었는데, 그 모든 게 불안함을 새로움으로 무마해보려는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혼자 다녀온 교토 여행으로 생각이 정리되니, 겨우내 여행 갈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일상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의미있게 채워지는 요즘입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이렇게 글로 마지막을 맺습니다.
미천한 글에 용돈까지 얹어주며 응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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