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6월 14일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이었는데 어느덧 7월이 되었네요. 비소식이 잦다고 해서 해외배송으로 레인부츠도 장만했는데 땀만 주룩주룩 흐르는 초여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염치 없지만 저는 여러분 덕분에 낭만적인 나날을 보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낭만 장아찌 주문배송>을 멋지게 포장하기 바빴던 거 같은데요. 오늘은 조금 짜쳐도 괜찮을 거 같아요. 제 편지를 손글씨로 적어 보낸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군데군데 번지고 몇 글자는 못 알아볼 법한 모양새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투박한 편지를 처음 보내려고 마음 먹었던 건, 원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들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 당시 다니던 직장을 아주 미워했던 건 아니었는데요. 어딘가 채워지기 보다는 닳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대학교 1학년 전공필수 OT 때, 고길동을 닮은 교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문학의 '문'은 본래 무늬를 뜻한다고요. '인간의 무늬를 읽는 학문을 배우러 왔다니, 난 제법 멋진 학과에 들어왔구만' 생각했던 게 기억나서 이 문장을 오래 간직하고 있는데요. 교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저는 그 당시 제 무늬가 그 회사뿐인 것이 단조롭고 그래서 불안했던 것 같네요.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 같던 <낭만 장아찌 주문배송>은 그래서 시작됐습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확실한 취향! 최백호 님의 <낭만의 대하여>를 들으며 뉴스레터 발송을 준비했더랬지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도전이었던 편지 발송이 1년간 이어졌던 것은 (이따금 늦어질 때도 있었으나) 제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낡은 편지를 읽어주셨던 여러분께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편지를 드리고 싶었던 건데요.
'분명 다들 기깔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겠지' 키득대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신청해주신 여러분의 사연을 읽으며 저는 낭만 초보맛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답니다. 당신과 함께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 중에는요. (어쩌면 당신이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날로그가 매일 입는 옷처럼 편한 사람도, 똑딱거리는 시계소리 조차 가끔은 낭만으로 다가온다는 사람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남편의 마지막 사랑뿐만 아니라 첫사랑도 되고 싶다는 사람도, 마음이 터질 때까지 사랑을 고백하겠다는 사람도, 엄마의 대학시절을 엿보고 싶다는 사람도, 80년대 다방에 앉아 예술에 대해 논하는 멋쟁이이고 싶다는 사람도, 아버지에게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말을 전할 수 있다면 군대를 다시 가는 타임머신에 기꺼이 올라타겠다는 사람도, 조선시대로 가서 장군이 되고 싶다는 사람도, 장군이 되기 위해서 타임머신 안에서 성별을 좀 바꿔야 겠다는 사람도, 아무 걱정 없는 원시시대로 가고 싶다는 사람도, 공부만 하던 학창시절로 돌아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청서에 빼곡히 담긴 여러분의 사연을 읽으면서 낭만, 낭만, 하도 <낭만>거리다 보니 오히려 빛을 잃었던 <낭만>이 잘 닦여 다시 빛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연을 읽어보니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편지 한 장마다 bgm이 한 곡씩 달랐답니다. 몇 곡 공유해 드릴까요?
1. 강백수 - 타임머신
2. The carpenters -Yesterday Once More
3. 015B - 텅 빈 거리에서
4. 신효범 -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5. 마로니에 - 칵테일 사랑
6. 나미 - 보이네 / 신승훈 - 그 후로 오랫동안
7. 언니네 이발관 - 아름다운 것
혹시 편지에서 나는 향기를 느끼신 분 계신가요? 느끼셨다면 그 향기가 언젠가 낭만장아찌에서 다루었던 <카보틴 드 그레>의 향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https://maily.so/zizikzizik/posts/f6136452
마성의 향수 포이즌을 소개하면서 보급형 제품으로 알려져서 구매했다는, 그 향수! 제가 가진 향기들 중엔 가장 과거를 소환하는 듯하여 뿌려보았는데 가는 동안 잘 남아있었다면 좋겠네요.
근데 사실... 향기고 뭐고 우편물 겉모습이 처참해서 놀라신 분들이 계셨을 거 같습니다. 그런 몰골로 도착한 편지의 원인은 다름 아닌 연필이었습니다. 언젠가 한번 오프라인으로 뭔가 한다면 꼭 하고 싶었던 선물이 연필이었거든요. 그냥 연필 말고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가 각인된 연필이요. 별 거 아니지만 나름 야심찬 연필이었는데 전 몰랐습니다. 연필은 등기로 보낼 수 없다는 누군가에겐 아주 당연할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한참을 고민하던 우체국 직원께서 서류봉투를 모두 테이프로 감아 오면 택배로 부쳐주신다는, 어찌보면 아날로그 뉴스레터를 보내는 사람에게 딱 맞는 답변을 주셔서 광명우체국의 종이테이프 2개 정도를 제가 다 썼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북-북- 테이프 뜯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합니다. 전 정말이지 태어나서 그렇게 못생긴 우편물은 처음이었어요. 심지어 제 이름은 장*지(아날로그 지기)가 아닌 강*지(puppy)가 되어 여러분에게 날아갔지 뭐예요. 여러모로 다 망했다 싶은 그런 어떤 이벤트였다고 좀 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편지 잘 받았다고 되려 제게 다시 회신을 보내주신 여러분 덕분에 정-말 벅차게 행복했답니다. 이 드넓은 정보의 바다에서 제가 보낸 낭만을 흔쾌히 쥐어주신 여러분, 정말 반갑고 감사해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해서, 그런데 일상에 허덕이느라 자꾸만 편지 보내는 일에 늦어지는 스스로가 속상해서 무더운 여름은 잠시 편지를 멈출까 합니다.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오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날은, 가을의 문턱 입추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비가 많이 내린다는 이번 여름, 비가 오나 해가 내리쬐나 여러분의 감성과 낭만엔 끄떡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뭐하고 지내냐고요? 안 궁금해도 들어주세요. 저는 아무래도 편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이 있는 사람인가봅니다. 여러분 혹시 영화 <Her> 보셨나요? 극중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을 하지요? 모두 설명드리긴 어렵지만요. 제가 최근 11시부터 10시까지 경악스러운 노동시간을 감수하며 하는 일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이 부탁한 손편지를 대신 적는 일이랍니다. 오늘은 다음 달이면 신부가 되는 여자친구를 위해 손편지 의뢰를 부탁하신 남성분의 문자를 대신 적었답니다. 장아지의 2023년은 이러나 저러나 편지쓰는 나날이 될 것 같네요. 푸념하듯 말하지만 사실 이 낭만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하핫)
아무튼 말이 너무 많아서 편지가 쉬이 끊어지질 않네요. 여러분, 낭만의 여름을 잘 나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을에 다시 만나요. 그땐 더 잘- 익은 장아찌를 내어드리리-
증말, 마지막으로 저와 전자우편으로 만난 모든 인연에게 적어 보내고 싶었던 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어 올립니다.
p.s Hoxy라도. 아날로그 지기가 그리우시다면,
인스타그램 @drorian.bomi 계정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근데 거기는 장아찌는 아니고 뭐랄까...겉절이랄까요..
활어회 감성 좋아하시는 분들은 거기서 만나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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