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안녕하세요. 한 주간 무탈하셨나요? 저는 난생처음으로 (어쩌면 마지막으로) 이색적인 공간에서 진행하는 강연을 앞두고 불안함에 몸서리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이틀 남았는데, 정말 간절히 잘 해내고 싶어요. 간절히 잘해내고 싶어서 그런가? 요즘 잠이 잘 안 와요. 그래서 술을 자주 마셔요. 핑계 같죠? 핑계가 맞긴 한데요.(헤헤) 마지막 프로젝트와 퇴사를 앞두고 싱숭생숭한 마음에 술이 잦네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맥주인데요. 요즘은 하이볼을 자주 마셨어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마신 것도 마신 거지만 주변인들이 하이볼을 먹고 있던 모습이 많이 떠오르네요? 아무튼, 지난 한 주는 하이볼과 유독 가까웠어요. 그래서 오늘의 편지는 무턱대고 하이볼입니다. 근데 무턱대고 하이볼이라기엔 키워드부터 재밌어서 쓰는 제가 다 설레요. 이 편지의 끝에서 여러분이 하이볼 한잔하고 싶게 만드는 게 제 목표고요. 그럼 이제 한번 시작해 볼게요.
호시절이 끝나고 난 뒤, 하이볼🥂
일본에서 태어난 하이볼은 탄생 비화에 그늘이 있습니다. 80년대 일본엔 그야말로 다신 없을 환상의 비눗방울들이 마구 만들어졌습니다. 아르바이트만 해도 원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호시절, 오죽하면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죠.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밝은 미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일본의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졸면서 면접을 봐도 붙여주길래 '입사 해줬다.'라고 말하던 일본의 비정상적인 정세도 바닥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거든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직격탄을 맞은 건 위스키업계였습니다. 비싼 위스키를 아무렇지 않게 사 먹던 사람들이 주머니를 닫기 시작했으니까요. 위스키는 왠지 중후한 아저씨들이나 마실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주 대중적인 편에 속하지도 않았는데, 물가까지 오르면서 사람들은 위스키를 등한시했습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위스키를 마시게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젊은 사람까지 마시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일본의 위스키 회사들은 탄산수에 소량의 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을 고안하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이자카야에서 즐겨 마시는 하이볼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산토리로 대표되는 일본 위스키의 노력은 2023년 우리가 대한민국에서도 '하이볼 한 잔이요.' 외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그야말로 대. 성. 공! 을 거두었는데요.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위스키에 비해 저렴한 가격, 달달한 술이 인기가 많았던 일본 시장에서 대중의 입맛을 저격할 수 있는 달콤한 맛, 그리고 생맥주를 연상하게 하는 시원-한 외관 등을 들 수 있다고 하네요. 생각해 보니, 외관 때문에 하이볼에 진입 장벽이 낮았던 사람 저예요 저! 파블로프의 개처럼 생맥주잔을 보면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하이볼 잔이 칵테일 잔 같았다면 이렇게 자주 마시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호시절의 여운은 아직 이곳에, 시티팝
오늘의 메인 감성인 하이볼은 버블이 꺼질 무렵 잔잔한 탄산을 머금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하이볼을 마시는 감각적인 바에서 울려 퍼질 것 같은 시티팝은 몽글몽글 부풀기만 하던 일본의 버블 사이에서 모락모락. 피어났습니다. 유튜브에서 '시티팝'을 친다거나, 시티팝의 교과서라고 알려진 타케우치 마리야의 플라스틱 러브(plastic love)를 듣다 보면 어떻게 80년대 일본엔 이런 노래가 나왔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음악사이트 대부분의 댓글이 '대체 80년대 일본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런 노래가 나왔냐는 말이 많지요.' 여러분도 비슷한 생각을 하실까, 싶어 <플라스틱 러브>를 편지에 동봉합니다.
시티팝은 80년대 비정상적으로 부풀기만 하던 버블경제를 먹고 자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히 그때의 느낌만을 표현했다는 게 아닙니다. 땅값은 50배 오르는데 물가는 2배밖에 오르지 않는, 달리 말해 넘치는 부를 어쩔 줄 모르던 일본의 돈을 먹고 자란 음악들이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도 그 테크닉이 너무나 세련되어 늘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일본엔 이 버블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아요. 감상만으로 아련해지는 호시절도 사람을 돌아가고 싶게 하는데, 실체가 있는 호시절이었으니 오죽할까요. (잠깐의 호시절 이후, 오랜 시간 고통받는 그 뒤의 젊은이들에게는 이 공간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낍니다만.)
그리고, 하이볼을 마실 때 꼭 꺼내어 듣고 싶은 빛과 소금
이쯤 되면 눈치채신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전 좀 흥선대원군 기질이 있고요. 시티팝이 일본에서 시작된 거라고 하지만, 플라스틱 러브다 마츠다셰이코다 근본을 찾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암튼 저한테 시티팝 근본은, 오늘날에 들어도 세련된 뮤지션 한 명을 추천해달라는 말의 대답은 늘 '빛과 소금'입니다. 빛과 소금의 시작엔 (놀랍게도) 김현식이 있습니다. 김현식은 자신의 세션으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섭외했습니다. 네 명의 '봄여름가을겨울' 중 둘은 진짜 '봄여름가을겨울'이 되었고요. (이쯤 되니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일어나네요.) 남은 둘은 '빛과 소금'을 결성합니다. 편지를 쓰고 있는 2023년 2월 27일을 기점으로, 내일인 2월 28일. 빛과 소금 콘서트를 하던데 갈 수 없는 마음이 너무나 아쉽고 그렇습니다. 시티팝 특유의 들뜨는 분위기와 장기호의 솜사탕 같은 목소리를 너무나 애정합니다. 그리하여 편지의 마지막엔, 제가 가장 매력 있다 생각하는 빛과 소금의 노래를 함께 담아 보냅니다.
시간의 경과는 있지만, 저는 버블경제를 사이에 두고 시티팝을 오가다 보니 이제 시티팝을 들으면 하이볼을 먹어야 할 것 같고 하이볼을 마시면 시티팝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요. 어떤가요. 여러분? 앞서 하이볼을 마시고 싶게 만들겠다는 제 다짐은 성공했나요? 사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는 흥분하면 비약이 심한 편이에요. 예-전에 버블경제와 하이볼을 같은 키워드로 확인했던 걸 기억하고요. 사실 버블경제에 비싼 위스키를 많이 마셔도 안 취하는 하이볼이 유행했던 건가? 하는 생각으로 편지를 썼었답니다. 근데 적다 보니 잠깐의 스침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더 많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답니다. 이렇게 밝히는 이유는? 여러분에게는 좀 부끄럽고 짜치는 인간이어도 괜찮고요. 진솔해 보이고 싶기도 하고..몰라요 그냥 그래서요. (딴청) 앞서, 저 지금 아-주 중요한 강연 앞두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여러분의 장아지 답게, 잘 해내고 돌아오겠습니다 :) 한 주간 하이볼을 드시든지, 하이볼만큼 시원달달한 일상을 보내시든지 하면서 야무지게 지내고 계세요! 다음주에 부디 제가 잘 하고 돌아왔다는 승전보를 울릴 수 있기를 바라며! (아니면 뭐 또 어쩌겠어요.)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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