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여러분 덕에 한결 더 낭만적인 일상을 보냈어요. 케케묵은 편지를 열심히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덕에 편지 말고도 옛날 얘기할 수 있는 창구를 하나 더 갖게 되었거든요. 멋진 작가분들 사이에서 이곳에 적었던 추억의 공간과 노래들을 다시 적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낭만장아찌와 비슷한 글들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는데 욕심이 생겨서 매주 사부작사부작 공간에 취재를 나가고 있네요. 수신인이 있어서 보낼 수 있었던 두서없는 편지들의 정리된 버전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다른 각도의 낭만장아찌를 만나보고 싶으신 분들은 다녀가 주세요. :)
오늘은, 지난 번 미처 다 담아 보내지 못했던 젊은이들의 참새방앗간, Y.M.C.A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청년들의 꿈을 지원하고 스포츠로 대동단결하게 했던 Y.M.C.A는 해방 이후, 청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싱어롱의 원조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아니에요.
제가 '싱어롱'이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던 건, 2018년, 우리 모두를 챔피언으로 만들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을 때였어요. 너나할 것 없이 N차 관람을 하자, 영화계에서는 이 열기에 보답이라도 하듯 떼창을 허용하는 '싱어롱관'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싱어롱'이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기 60년 전 이미 한반도에 상륙해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1963년 YMCA 김창열 총무와 작곡가 전석환에 의해 YMCA강당에서 첫 선을 보인 행사가 <싱어롱 Y>였습니다. 여기서 Y는 'youth', 'young' 그리고 'Y.M.C.A'의 앞글자 'Y'를 의미했다고 하는데요. 처음엔 참여자 10명에 불과했던 이 행사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YMCA를 대표하는 정기행사가 열리게 되었고 이 영향으로 각종 텔레비전, 문화센터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싱어롱 Y'에서 주로 부르던 노래는 미국에서 들어온 민요 등을 우리말로 바꿔 기타연주에 맞춰 다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모임에 가서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 마음엔 다 '나도 저렇게 기타 치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다고 하네요.
그 결과, 60년대 당시 서울에 갑자기 생겨난 기타 교습소만 해도 40여개에 달했고요. 서점에 가면 <한 달 안에 기타 마스터하기>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60년대 <싱어롱Y>가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격동적인 한국사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4.19혁명에서 5.16 군사쿠데타로 넘어가던 혼란의 시절, 대학은 빈번히 휴교령을 내렸습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상경한 학생들 등은 순식간에 갈 곳이 없어진 것인데요. 문화생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이때, 비슷한 처지의 대학생들이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을 수 있는 YMCA만한 장소가 없었던 것이죠.
자매품 YWCA에서 꿈틀거리던 싱어송라이터들
요즘은 잘 보이는 것도 같은데...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혜성처럼 등장한 싱어송라이터들을 보고 미국출신의 아티스트 '존 메이어'에 견주는 기사들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제가 존메이어를 너무 좋아해서 유독 눈에 잘 띄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이를테면, 한국의 존 메이어 빌리어코스티 와 같은... 저도 존 메이어 참 좋아하는데요, 이 표현 만큼은 이제 좀 정정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연주하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들의 원조는 굳이 머나먼 남의 나라 땅까지 가지 않아도 70년대 명동에 잔뜩 줄 서있거든요. 이것도 YMCA냐고요? 기출 변형입니다. 싱어송라이터들을 받아주던 그곳은 Y.W.C.A였습니다.
Y.W.C.A는 기독교 '여성'청년회입니다. 이 단체 역시, 영국 런던에서부터 시작되었고요.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YMCA가 들어온 지 십여 년 쯤 뒤인 1922년이었습니다. 이름을 통해 알수 있듯, 당시 억압되었던 조선 여성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조혼 등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에 힘썼는데요. 광복과 전쟁을 지나며 전쟁과부를 돕고 여성 노동자를 돕는 등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시민단체였습니다.
70년대부터 이곳에 젊은 남녀가 삼삼오오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오갈 곳 없는 청춘들이 모여 함께 놀 수 있는 문화공간 <청개구리의 집>이 오픈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안타깝게도 YWCA가 처음부터 청년들의 놀이공간을 표방했던 것은 아니었대요. 첨엔 해외에서 오는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유스호스텔 같은 숙식처가 되어주려 했건만, 돈이 되지 않자 국내 학생들로 타깃을 바꿨던 것이죠.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건 99원 짜리 콜라 한 잔이 전부였고 신발 벗고 들어가 모여 앉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갈 곳 없던 70년대 청춘들은 그 안에서 함께 노래부르며 우애를 쌓아갔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서 말했던 YMCA의 <싱어롱Y>와 비슷한듯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탄생했다는 점이에요. 이전까지 해외의 노래에 가사만 우리말로 붙인 번안가요를 부르던 청년들은 함께 모여 기타를 치고 작곡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민기와 양희은 등이었고요. 이들을 필두로 70년대 청춘을 정점으로 이끄는 포크음악이 본격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답니다. 김광석을 지나 오늘날 인디음악으로 이어지는 이 포크의 시작이 YWCA에서 시작된 셈이지요. 김광석이 죽기 직전까지 열심히 노래부르던 대학로 소극장 <학전>을 만든 사람이 김민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사로 심금을 울리는 포크의 역사가 <청개구리>에서 부터 이어져 온다는 사실은 정말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쟁과 혁명의 상흔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한반도의 청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은 음악이었습니다. 당시엔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갖 청년들이 기타연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고 하고요. 서울에만 40개의 기타교습소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골든에이지가 지나갔다고 믿는 저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리하여, 다가오는 춘 3월 저의 플랜은 <기타 배우기>로 정했습니다. 편지 중간중간 뚱땅거리는 기타선율을 동봉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어디 한번 잘하나 지켜봐주세요.
다음 주에도 눈 크게 뜨고 보면 그제서야 보이는 지난 시간의 상징들을 긁어 모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잘 지내세요! 아, 편지를 다 쓴 지금 저는 <타이타닉>을 보러 갈 거예요. 언제 봐도 눈물 쏙 빼는 명작... 맥주 마시면서 보면 최곤데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에 화장실 급해질까 한 캔만 따도록 하겠습니다! 바쁜 일상에 낭만 챙기는 거 잊지 마시고 한 주도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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