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자비로운 연휴 기간은 내내 비가 오네요. 조금 습한 감은 있지만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반갑습니다. 지난주엔 예고도 없이 편지를 보내지 못했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새로운 장소, 새로운 직장에서 새 출발 하는 친구를 반나절 코스로 축하해 주러 갔다가 2박 3일을 잃어버렸어요. 수원-평택-용인으로 이어지는 일주를 즐기고 나니 이미 월요일 오후가 되어버렸지, 뭡니까. 그치만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저녁이라도 적을 수 있었을 텐데요. 또 하나 핑계를 대자면 너무 설레서 못 썼습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는 홍콩에 있었거든요. 모름지기 여행의 설렘은 떠나기 전날 밤, 가장 극대화되는 거잖아요... 뭘 자꾸 덜 챙긴 거 같고 싱숭생숭해서 이거저거 하다 보니 새벽이 되어버렸다는 그런 무책임한 이야기입니다. 죄송해요. 앞으론 어떤 희로애락 사이에서도 구독자님에게 보낼 편지 적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장아지가 되겠습니다(다짐)(애원)
그래서 홍콩은 좋았냐고요? 너-무 좋았어요. 오랜만에 혼자 하는 여행이라 공항이나 잘 찾아갈지 스스로 미덥지 않았지만, 여차저차 잘 보고 잘 즐겼어요. 특이점을 꼽자면, 지금까지 제 여행이랑은 아주 달랐다는 거예요. 전 계획이 1도 없는 사람이고 여행의 다른 말은 휴식이라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도장 깨기를 하듯 가야 하는 장소가 너무너무 많아서 어떤 날은 3만 5천 보를 걷기도 했더랍니다. (이날 모기도 다섯 방 물렸어요) 이번 홍콩 여행의 컨셉은 <영화 속 배경 찾아다니기>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컨셉이 컨셉이다 보니 유달리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하다 하다 시진핑도 즐겨들었다는 목소리의 주인, 등려군의 노래들인데요. 비도 오고 홍콩의 여운도 아직 머물러 있어, 오늘의 편지에는 등려군의 이야기를 적어볼까 해요.
이념과 국적을 초월한 목소리
친구에게 홍콩에 왔으니, 등려군을 듣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친구는 등려군은 대만 사람인데 왜 홍콩에서 듣냐고 물었습니다. 홍콩영화로 접한 목소리라 홍콩 가서 듣는 게 너무 당연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고요. 등려군의 국적은 대만입니다.
1995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엄청난 규모의 장례식이 일어난 곳 역시 대만이었고요. 지금도 등려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만에 있는 그녀의 묘소로 찾아가 인사하곤 합니다. 등려군이 활동하던 시절, 중국 본토에서는 그녀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습니다. 대만 출신이라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될 텐데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는 군인이었고 등려군의 첫 무대가 군대였을 정도로 대만의 군대와 깊은 연관이 있는 가수였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아시죠?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고 그게 좋은 거면 어떻게든 퍼져나가는 거요. 못 듣게 해도 암암리에 퍼져나간 등려군의 목소리는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금지곡 단속을 하던 공안에서 조차 그녀의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해요. 뿐만 아니라, 등려군과 동갑인 중국의 시진핑 역시, 어린 시절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등려군의 노래를 들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요. 등려군이 사망하고 난 뒤, 무려 북한에서 그녀를 추모하는 우표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중화민국, 대만의 가수가 사망했는데 북한에서 우표를 만들다니...! 진정 아름다운 것은 이념과 국적을 초월하여 귀하게 여겨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국에 등려군을 알린 영화, 첨밀밀
등려군은 나고 자란 대만 외에도 홍콩,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서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의외인 점은 한국에서는 비교적 큰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첨밀밀>과 <월량대표아적심>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지 의아하지요? 저도 그랬는데요. 시기상의 차이가 있더라고요. 한국에 등려군의 목소리를 전파한 가장 강력한 안테나는 여명, 장만옥 주연의 영화 <첨밀밀>였는데요. 이 <첨밀밀>이 한국에 개봉한 것이 등려군이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던 1997년이었습니다. 그래서 O.S.T의 인기에 비해 아티스트를 깊이 파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하고요. 등려군, 테레사 텅(등려군의 영어이름), 첨밀밀 가수가 같은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네요.
저에게도 등려군은 <첨밀밀>의 장면을 떠올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목소리였어요. 그래서 여명과 장만옥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캔톤 로드에서 꼭! 등려군의 노래를 듣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물론 멜론으로 들어도 좋겠지만 왠지 이번 여행은 여행지에서 CD를 구매해서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바리바리 CDP까지 챙겨서 날아갔건만 첫날 방문했던 레코드 샵엔 등려군이 없었어요. 너무 낭만적인 장소라 꼭 여기서 사면 좋겠다! 생각했던 탓에 아쉬웠지만 좋은 공간을 구경하고 장국영 CD를 산 것으로 만족하고 다음 날, 코즈웨이베이에 있는 큰 음반 판매점에서 마침내 등려군을 손에 넣었답니다.
대형쇼핑몰 음반 판매점을 가니까 새삼 등려군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알겠더라고요. 나라별로 음반 판매대를 다르게 구획해두었는데 중국 음반이 놓인 부스 여자가수의 절반 이상의 자리를 등려군의 앨범이 채우고 있지 뭐예요.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내가 찾는 게 이게 맞는지 한참을 뒤적거린 후에야 CD를 사서 나왔답니다. 그래서 CDP로 등려군 듣기, 성공했냐고요? 아니요. 이게 진짜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 CD가 CDP에서 작동을 안 하더라고요. 지금도 당최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른 CD는 다 돌아가는데... VCD아니고 진짜 CD맞는데... 어쩔 수 없이 오래오래 걸어 도착한 캔톤 로드에서는 멜론 스트리밍을 통해 <첨밀밀>과 <월량대표아적심>을 들었습니다.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캔톤로드에는 더 이상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는 길과 여명, 장만옥의 무드가 남아있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유히 계단을 뱉어내는 에스컬레이터와 등려군의 목소리로 아직 남아있는 흔적을 거머쥐고 기뻐했습니다. (근데 이제 땀 뻘뻘 흘리면서요)
이 정도면 함께 했던 것으로 치자
앞서 등려군이 활동 당시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교류가 없었던 건 또 아니에요. 이제 와서 보면 참 귀한 목소리를 등려군이 먼저 남겨주었거든요. 여기저기 너무 자주 쓰여서 바래버린 ‘한류’ 새삼스럽게 여기서 한류 얘기를 꺼내봅니다. 한류의 첫 번째 물결, 어디서 찾아봐야 할까요? 의견이 너무 분분하여 단 하나의 답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모르고 가기엔 아쉬운 파장을 일으킨 사람이 있습니다. 동남아 순회공연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던 한국의 아티스트, 한명숙입니다. 한명숙이라는 이름은 의아하시더라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다들 많이 들어보셨을 거 같아요. 한명숙은 이 노래로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등려군이에요. 등려군 역시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를 번안하여 불렀거든요.
등려군의 번안곡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다루었던 원조 씹덕상 조용필 기억하시지요? 조용필의 대표곡! 롯데 팬들 가슴에 불을 지르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등려군이 부른 적 있었는데요. 특이한 건, 일본 공연장에서 일본어로 불렀다는 점이에요. 아, 등려군은 언어적 재능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어, 광둥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를 빠르게 습득했다고 하네요. 당시 영상을 함께 보냅니다. 85년 영상인데 밴드 사운드가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어요.
앞서 두 곡은 등려군이 불렀던 우리나라 노래들이었다면 앞으로 나올 노래들은 한국 아티스트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던 등려군의 노래입니다. <첨밀밀>이 우리나라 노래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 가수의 O.S.T를 기억하시는 분들 같아요. 두리안의 I‘m still loving you 역시 1999년 인기를 끌었던 채림, 감우성 주연의 <사랑해 당신을> O.S.T로 사용되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받던 문근영에 의해 등려군의 노래가 재해석 됩니다. 영화<댄서의 순정>의 O.S.T였던 <그댄 몰라요>는 등려군의 또 다른 대표곡 <야래향>을 리메이크한 곡이었는데요. 저 초등학교 때 벅스 플레이어에서 이 노래 들은 기억이 나요. 아찔하게 상큼하네요. (아득)
등려군 노래를 듣고 있으면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져요. 탕웨이 중국어 하는 거 들을 때랑 비슷한 느낌입니다.
유명한 노래 너무 많은데 제가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노래는 이거예요. 비 내리고 바람 부는 오늘의 날씨와도 제법 잘 어울리네요. 등려군의 <아지재호니>를 끝으로 오늘의 편지, 마침표 찍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시 편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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