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자자족

35. 쉽게 감동하는 나 어떤데

다른 사람의 삶을 응원하고 존중하고 배우는 나로 살고 싶어요.

2023.12.29 | 조회 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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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2023년의 마지막 금요일 아침입니다. 저는 짧게 올해 회고를 하다가 좋았던 순간들,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제가 올해 얻은 것들 중에 내년에도 가져가고 싶은 저의 태도를 뉴스레터로 전하려고 합니다. 서툴고 부족함이 많지만 그런 점을 질책하기보다는 강점으로 만들어가고 싶어요. 구독자님도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내년을 즐겁게 맞아보시길 바랄게요. 연말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에도 우리 함께 해요.

10년 전 건축가 겸 여행작가 오기사(오영욱) 인터뷰를 간 일이 있다. 그의 이야기에 한껏 기분이 고양돼 회사로 복귀하는 차안, 나의 팀장님은 말했다.

“넌 감동이 참 너무 쉽다.”

그때는 모든 게 낯설고 어렵고 눈치 보이던 신입 쭈구리 시기였던 때라 팀장님이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내뱉었을지 모를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다음 인터뷰, 그 다음 인터뷰를 가서도 물론 나는 즐거웠다. 아니 사실 거의 모든 인터뷰가 즐거웠는데 다만 그래서 내가 놓치고 온 건 없는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하는 질문들 앞에서 상대방이 보이고 싶은 이미지만 펼쳐놓았을 때 그 진짜 속내를 들여다보기 위해 깊숙이 대화 속으로 들어간 게 맞는지 자꾸 되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버릇이 생겼다. 

그 말은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되고 싶었던 기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유이자 대답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종종 했었다. 기자란 모름지기 비판적이고 날카로워야 하는데 나는 늘 사람의 말에 쉽게 동화되니까 그런 지점들이, 날 서 있지 않다는 점이 면접관들의 눈에는 보였을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꿈을 이루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미련만 한가득 갖고 다닌 첫 회사생활은 결국 오래 가지 못했다. “후미진 골목길을 한참 지나 보석 같은 바를 발견했을 때 진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라던 오기사(오영욱) 건축가의 말이 궁금해 이끌린 듯 스페인으로 떠나고야 말았으니까. 그렇지만 돌아와서는 첫 회사를 영영 떠나지 못하고(심지어 재입사를 했으니) 또 다시 동일업종에서 일을 이어나갔다. 

야근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가도 일이 너무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순간들도 있었고, 더 잘하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가득 차 스스로 야근을 만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문득문득 나를 신경 쓰이게 했던 말들은 자연스레 옅어졌다. 자기검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한 달 전 충남 보령으로 이주한 네 가족 이야기를 담기 위해 인터뷰를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10년 전 들었던 팀장님의 말이 생각났다. 이미 수명을 다한 줄로만 여겼던 말이 떠오른 건 그날의 인터뷰가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모든 이야기들이 정말 알찼고 빛났는데, 나는 특히 그들이 살아내면서 획득한 생의 언어들이 마치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책 속 문장처럼 들려 물개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내가 지금 만들어내는 나의 노동들이 진짜 나의 경력, 나의 능력으로 남는 것 같다”는 말, “편한 게 많은 곳이 도시라면 불편한 게 없는 것이 시골"(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이를테면 사람이나 소음, 관계 스트레스 등으로부터 멀어져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가 없다는 의미로)이라는 말, “계속 소비자로만 살다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산자가 되어 삶의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 “(집을 포함하여) 돌봐야 하는 것들이 많아져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이 됐다”는 말까지.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문장들에 마냥 박수치고 밑줄 긋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10년 전처럼 한껏 들뜨고 고무된 기분이었지만 그때처럼 놓친 게 없는지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았다.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상대방과 나를 객관화하면서 그 말의 본질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되짚고 의심하고 판단하는 것도 인터뷰어의 중요한 자질이지만 상대방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자신의 언어를 마음껏 펼쳐둘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인터뷰어에게 필요한 자질이라는 것을 일하는 동안 깨달았던 까닭이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가 일궈 가는 삶을 냉소하거나 단언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삶의 평범한 순간들에 동그랗게 빛을 비추어 여기 이런 장면이 있구나,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다른 이들도 함께 들여다보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쉽게 감동받는 지금 내 모습 그대로 계속 살고 싶다. 잘 듣고 잘 나누는, 쉽게 감동하는, 즐거운 관찰자로 내년에는 더 잘 살고 싶다. 다정과 기대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 밑줄 그은 문장은 김신지 작가의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를 인용했음을 알려드려요.
인터뷰이의 말을 듣는 내내 즐거워 입이 귀에 걸렸던 지난 11월 말 ⓒoh_great_lee
인터뷰이의 말을 듣는 내내 즐거워 입이 귀에 걸렸던 지난 11월 말 ⓒoh_great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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