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이사를 오면서 야심차게 책장을 마련했다. 새로 생긴 내 방 한 벽면을 모두 책장으로 채웠다. 가지고 있는 책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욕심만큼 부린 책장은 생각보다 넓었고, 여러 잡동사니까지 군데군데 끼워 넣어지만 자리가 남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그저 바라만 봐도 흐믓했다. 아직 채울 공간이 이렇게 많다니!
허나 책이 많고, 책장이 넓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일단 읽어야 다 쓸모가 있지. 그냥 바라본다고 이뤄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서점에서 동네책방에서 또 헌책방에서 책을 사 모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읽게 되는 책은 반납 기한이 정해져 있는 도서관 대여 도서라는 점. 그래서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미래지향적인! 책장을 보유 중이다.
5년 전 책읽아웃 인스타 라이브 방송에서 황선우 작가님이 남긴 실시간 댓글로 남긴 명언이 있다.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거라구요.” 이 댓글은 나의 독서생활 아니 북 호더 삶의 지침으로 삼으며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생각에 오늘도 책을 쟁여둔다.
이번 도서전 방문도 같은 마음에서 시작됐다. 게다가 지난해 곰자자족과 함께한 도서전의 기억이 인상적이었기에 혼자지만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첫날 방문했던 곰자자족의 후기와 각종 SNS를 통해 접한 도서전의 소식에 사뭇 긴장하며, 물과 약간의 간식, 손선풍기까지 챙겨들고그 사람 많다는 토요일의 도서전으로 향했다. (TMI지만 나는 평소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는 내향형 인간이다.)
오전 9시 오픈을 1시간 남기고 도착했지만 목을 길게 빼야만 겨우 앞이 보이는 대기줄의 행렬에 이미 준비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I인간이었다. 한 시간 동안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결심은 공고해졌다. 큰 출판사 책은 대형 서점에서 볼 수 있으니 패스, 이벤트로 줄이 긴 부스도 패스, 대신 주제전시와 특별전시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을 꼼꼼히 보고, 아이디어 번뜩이는 독립출판 부스들도 기웃거려보고, 예쁜 그림책도 좀 구경해야지 하고.
긴 기다림 끝에 10시가 조금 안 되어 입장한 도서전. 내가 들어간 B 입구는 그 핫했던 오이뮤 부스와 직통으로 연결됐는데 내가 입장했을 때만 해도 막 시작하던 시점이라 해당 부스는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안일하게 이따 와서 식물 책 좀 봐야지 했다가 한 시간 뒤 다시 찾았을 때 부스 밖 별도의 결제 대기줄이 존재하는 걸 확인하고선 손에 들고 있던 책갈피를 바로 내려놓았다.
준비된 체력이 너무 하찮아서였을까, 시작도 전에 진을 다 빼버려서 였을까, 특별전시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된 <꽃에 미친 김군>을 이미 2주 전에 사버려서 였을까. 특별전시에 지난해만큼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주제전시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추천 도서들을 빠르게 스캔해 필독 리스트를 얻어야겠다는 욕심으로 사진만 열심히 찍어 왔다. 이 또한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읽었으니 이미 눈치챘을 수 있겠다. 이번 후기는 꽤나 심드렁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책을 사 모으는 소비자는 될 지 언정, 애독가는 되지 못할 그릇인가보다. 물론 지난해 알게 된 출판하는 언니들 부스에 방문하기도 했고, 최진영 작가님의 신간 소식을 듣고 핀드 부스에서 아껴 읽고 싶은 작가님의 에세이도 사고, 경기도서부스의 몇 곳을 방문해 ‘한 권 더 사? 말아?’를 반복하기도 했다. 계획했던 독립서적 부스에서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아마 퇴사를 앞둔 혹은 퇴사 직후의 나였다면 덥석 집어 들었을 책들도 보였고, 또 왠지 너무 세련돼 거리감 느껴지는 에세이 혹은 사진집 앞에서 뒷걸음질 쳤다. 책보다 굿즈가 더 많이 팔린다고 푸념하던 한 대표님의 하소연도 듣게 됐다.
사실 지난해 나도 각 부스에서 나눠주는 여러 굿즈와 사은품들에 혹해 줄을 서고 ‘어머 이거 뭐야?’라며 하나씩 가방에 챙기기 급했는데, 이사를 하면서 여러 짐들을 정리하면서 나란 인간은 그렇게 받아 든 기념품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고이 집에 들고 갔다가도 묵혀만 두다 몇 년 뒤 쓰레기통으로 직행 시킬 걸 알아서 이번엔 과감히 포기했다.
결국 내가 보고 싶은 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책들, 그 책을 왜 시작했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또 누군가는 이 책을 왜 추천하는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였는데, 그런 이야기도 다 기력이 남아있을 때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였다. 인파에 정신이 털려버린 내게는 다소 버거웠다. 그래도 ‘옴브로 시네마’ 기법이라고 해 필름지를 대면 그림이 움직이는 그림책 <꽃들의 시간>을 만났을때는 빵끗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웃음 구매로 이어졌다. 집에 돌아와 구매한 책들을 보니 결국 '식물', '일', '그림책'의 키워드로 정리될 수 있었던 도서전 방문이었다.
나처럼 맥빠지게 도서전을 구경하지 않길 바라며 소소한 팁을 전해보자면 1) 전날 잠은 푹 자서 좋은 컨디션을 챙기고 2) 간식까진 아니여도 물은 필수!(이번엔 초코바를 입구에서 나눠줬다) 3) 인파 속 더위를 식힐 휴대용 선풍기도 챙기고 4) 지치면 어디서든 편하게 주저 앉을 수도 있는 옷차림 5) 강연은 신청하지 않아도 뒤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으니 관심 있는 강연은 포함하는 것이 좀 더 내실있게 도서전을 즐기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지난해는 각종 부스에 치여 지쳤을 때 다리는 좀 아팠지만 뒤에서 듣던 연사들의 말이 하나 같이 고개가 끄덕여지고, 메모하게 되는 이야기라 오히려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번 도서전은 주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의 ‘믿을 구석’이 책이 될 수도 있다(혹은 됐으면 한다)는 이야기는 도파민 좇는 이 시대에 안 어울리게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도서전의 리미티드 에디션 <믿을 구석>도 구매했는데, 책에는 여러 작가들이 '믿을 구석'이라는 주제로 단편 소설과 시, 에세이가 담겨 있었다. 그 중 와 닿았던 전문의 내용. 스스로가 하찮게 여겨질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 수 있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구석은 무엇이 될까?
회의주의자들은 근거를 찾기 어려우니, 모든 주장이 동일한 무게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맞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다툼에 빠지기 마련이라 했다. 생각으론 그럴듯하지만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다간 굶어 죽기 십상일 터. 살아남으려면 어떤 방향으로든지 판단을 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 판단의 결과가 살아남은 우리들이다. 생존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을 구석을 찾아내고, 그것에 근거해서 판단을 하는 것. 언제나 맞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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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까지만 파내려가, 그 위에 지식의 구조물을 쌓았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주저하는 것은 철학의 중요한 태도이지만, 지식과 실천의 믿을만한 근거에 합의하지 못하면 세상은 굴러가지 않는다. 과학이 전등을 밝히고 기차를 움직이면서 합의할 수 있는 ‘믿을 구석’을 찾은 듯했지만 세계는 다시 어지럽다. 감정적인 흔들림,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혼돈, 그리고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인공적인 재난과 자연적인 재난들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흔들린다. 우리가 믿었던 것들이 무너진다. 횡횡하는 의심과 대립. 우리는 또 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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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믿을 구석을 찾아보자. 자세히 들여다보고, 흔들어보면서 손 닿는 곳들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믿을 구석> 전문 중
한때 ‘00을 책으로 배웠다’ 같은 우스갯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실제 경험없이 책에서 답을 찾는 행위를 놀리는 말이었는데... 경험이 어렵다면 책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나 막막한 마음이었면 책이라도 펼쳐 들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다르고 도파민 터지는 영상들이 내 알고리즘을 잠식할 때, 구식이지만 내 페이스로 펼칠 수 있는 책은 만만한 도피처가 된다.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해보려 오늘도 책을 소비한다. 아직 읽지 않은 미래가, 읽은 현재가 되면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라 나이브하게 믿어보며.
도서전이 너무 재밌다며 문자에서도 신남이 느껴지던 곰자자족의 도서전 후기가 다음주 대기하고 있으니 즐거운 이야기는 다음주에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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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을 나눠줄 선배님의 인터뷰를 기다립니다-
이것은 마치 퇴사를 결심한 후배가 꺼내는 클리셰 같은 문장. 후배를 둔 직장인이라면 뜨끔할 이 문장을 구독자 여러분께 던집니다. 어느덧 사회생활 10년이 훌쩍 넘은 경력자들이지만 여전히 머릿속에 물음표를 달고 때론 답답한 마음에 풀리지 않는 분노를 삭혀가며 고군분투 중인데요, 이런 저희에게 본인의 경험담과 생각을 들려주실 귀한 선배님을 찾습니다.
조직생활과 독립에 대한 진솔한 조언부터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는 워킹맘의 실전 팁, 커리어 전환의 경험까지 저희에게 들려주실 수 있는 분을 찾습니다. 딱 30분! 커피 한잔의 인터뷰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맛있는 커피 한잔 대접하면서 귀한 이야기들을 잘 담고 싶습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인터뷰한다면 좋겠지만, zoom, 구글미트를 활용한 온라인 미팅, 서면으로 답변해주시는 것도 모두모두 환영입니다! 선배님의 소중한 경험담을 공유할 모든 통로를 활짝 열어놓을 테니 부담 없이 연락주세요! 함께 나눈 이야기는 세 에디터가 잘 갈무리해서 레터를 통해 구독자님들께 생생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 이 사람이 생각났다!’ 하는 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평생해야 할 일이라면 내 일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또 본인의 일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질 수 있게 함께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회신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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