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쨍쨍한 날, 수영복 위에 비옷을 입고 나와 호스로 비를 만들며 강아지와 놀고, 음료가 가득 담긴 컵에 빨대로 바람을 불어 넣어 음료가 넘치게도 하는 장난끼 다분한 한 할머니. 사진작가 쉐릴 세인트 온지는 인지저하증으로 기억을 상실해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나른한 햇살이 드는 오후 문득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을 포착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던 모습은 지난해 전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포도 뮤지엄의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에서 만난 사진들이었다.
작가는 어머니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치매로 기억을 잃어도 감정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또 기억을 잃는다고 삶이 마냥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해당 전시는 10명의 작가 작품을 통해 병으로 기억을 잃거나, 때로는 공감각이 훼손되고, 또 언어 체계가 붕괴되기도 하는 노년의 쇠퇴와 변화를 다방면으로 보여줬다. 전시된 작품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뇌리에 이 문장이 강하게 남았다.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한 번도 웃지 않은 날이다”
니콜라스 세바스티안 드 샹포르
미래의 내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이 하루를 소중히, 기쁘게 사는 일. 기억을 잃는다 해도 하루하루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내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다. 지난달은 너무나 큰 일들이 벌어지면서 분노와 무력감, 황망함 같은 감정이 가득 찼다.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계속해서 뉴스를 찾고 묵혀두었던 역사책을 꺼내 읽었다. 그러다 예정됐던 일정이 다가왔고,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대만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방문하는 나라였지만 설렘보다는 ‘잠시 떠나 있는구나’, ‘이제 계획이 아니라 실천하면 된다’라는 묘한 감정이 섞인 출발이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온 공항에서는 편의점과 식당에서 파는 낯선 음식 냄새가 신경을 건드렸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매캐한 매연과 높은 습도가 섞인 이국적인 대기가 몸을 긴장시켰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버스 안에서 묘하게 다른 풍경과 사람들을 집중해 관찰했는데, 내가 탄 버스는 시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인기 노선이었는지 평일 낮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탔다. 공항에서 출발한 지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버스는 빽빽해졌고 공기는 찐득해졌다.
십여 분 뒤 옆 좌석이 소란스러웠다. 한 할머니가 털썩 주저 않은 것. 정확한 상황을 몰랐던 나는 주변을 살피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다른 승객들은 일사불란하게 할머니를 눕히고 겉옷과 모자를 벗기고, 부채질을 해 댔다. 더워진 버스 안 공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분은 자신의 아로마 오일을 열어 할머니 코 앞에 들이댔고, 또 다른 분은 버스 기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사는 비상등을 켜고 바로 근처 정류장에 정차했다. 구급차를 부른 후 좌석 쪽으로 와 할머니 상태를 살폈다. 다른 승객들에겐 하차 안내를 하는 듯 했다.
마치 매뉴얼처럼 착착 움직여준 주변 사람들 덕분인지 내가 다음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의식을 잃었던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정류장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버스 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구름 잔뜩 낀 흐리고 칙칙한 날씨가, 옛 건물을 그대로 쓴다는 도시 정책 때문에 낡아만 보이던 경관이, 조금은 친숙해지고 긴장했던 마음도 살짝 누그러졌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 이후로 어두운 밤에 한가한 공원을 걸어도, 현지인 가득한 좁은 시장길을 가로질러도 그리 무섭진 않았다.
사실 연말 광장에서도 수많은 선의와 마음을 베푼 이야기를 들었다. 대만 버스에서 마주한 사건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광경과 사연에 뭉클해지면서도 관찰만 하는 소극적인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새해에는 주변 사람은 물론 낯선 이에게도 친절할 수 있는 멘탈, 체력을 기르려 한다. 지난해부터 해 온 달리기와 등산에 수영을 더할 예정이다. 친절, 선의를 이야기 하다 갑자기 무슨 체력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결국은 체력 싸움이 아닌가 싶다. 여행 첫날 버스에서의 뭉클한 광경을 보고 나서 여행의 긴장감은 누그러졌지만, 공복 상태로 무거운 짐을 메고 걷거나 낯선 곳을 헤매는 상황이 발생할 때면 어김없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남편은 '왜 화를 내며 이야기 하냐'고 지적했다. 그랬다. 나는 지쳐 있을 때 쉽게 성을 내고, 기분이 태도가 되는 별로인 사람이었다.
여행도, 누군가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도,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무엇을 하든, 스트레스를 받든 체력이 있어야 덜 지칠 수 있고, 별로인 내 모습도 적게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어제의 나보다 더 길게 달리고, 더 빨리 산을 오르려면 힘듦을 참고 견디는 순간들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렇게 쌓이는 순간들이 내 인성 또한 다듬어 주리라 믿는다.
숨이 차 옆구리가 아파오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만 뛰어보자 스스로 채근하고, 계속되는 오르막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배낭 속 간식을 미끼 삼아 산을 오르다 보면 은행 이자 만큼이라도 소박하게 체력은 쌓일 거다. 그러다 보면 남에게 손을 내미는 여유도 생기고, 힘들어 욱하는 순간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그렇게 된다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동네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면서 하루에 한번 빙긋 웃으며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차곡차곡 쌓은 체력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하루 한 번은 웃게 되는 2025년을 기대해본다.
📢 연말과 여행, 날씨, 시국 등등을 핑계로 제대로 된 산책을 못한 요즘입니다. 코너 속 코너 <계절산보🚶>는 다음 레터에서 전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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