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은 놀이터예요. 가드닝 하며 나무도 구경하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는 즐거운 놀이터요!”
수목원 소식지에 자원봉사자 인터뷰를 싣는다며 주무관이 건넨 ‘수목원은 내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하원길 놀이터를 찾는 유치원생처럼 볼일이 있든 없든 심심하면 한 번씩 수목원을 찾았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동네 수목원. 거의 매주 한 번씩은 방문하다보니 이젠 안내 데스크에 계신 분들과도 익숙하게 인사하게 됐다. 내향인에게는 꽤나 놀라운 변화다!
시작은 지난해 5월이었다. 동네에 수목원이 생긴다는 소식에 반가워 한달음에 찾아갔다. 무료 방문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연간 회원으로 등록했고, 몇 달 뒤 자원봉사자를 뽑는다는 소식에 운명이라 생각하며 지원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화분들에 쫌쫌따리 키우던 식물들을 너머 수목원을 커다란 내 정원으로 삼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꿔봤다. 커진 스케일만큼이나 내 정원 가꾸기는 쉽지 않았다.
겨우 2시간의 봉사지만, 허리를 숙여가며 묵대를 제거하거나 땡볕에서 잡초를 뽑는 건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다. 그래도 작업을 끝내면 한결 정갈해진 모습에 뿌듯했고, 내년의 피어날 꽃을 기대하며 양귀비와 수레국화 씨를 뿌릴 때는 부디 실패없이 모두 자라서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주길 바랐다. 또 봄과 가을 날씨 좋은 계절 견학 온 유치원생이나 가족과 함께 찾은 어린이를 만날 때면 내 노력이 보태져 ‘저 친구들이 즐길 자연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뿌듯했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관람객으로 방문할 때도 보행로에 나뭇가지나 돌이 널브러져 있으면 자연스레 한 켠으로 치우게 됐다. 내 정원, 우리의 정원이니까 ㅎ
물론 관람객의 기쁨도 충분히 누리고 있다. 이곳만큼 동네에서 책 읽기 좋은 공간도 찾기 힘들다. 수목원 한켠에는 정원 관련 서적 수십권이 빈백 소파와 함께 비치된 도서관이 있다. 방문객이 적은 평일, 이곳에 앉아 동네 도서관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 양장본의 가드닝 책들을 구경한다. 혹 주변이 어수선해지면 야외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바로 파라솔이 펼쳐진 야외 테이블. 햇볕을 막아주는 파라솔을 방패삼고 챙겨간 텀블러의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한 두 장 넘기다가 바람에 춤추는 양버들 나무도 한번 봤다가를 반복한다. 사실 보고 있던 책을 덮고 그저 바람 멍을 때리다 돌아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무엇보다 수목원을 올해의 공간으로 꼽게 된 이유는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덕분이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다른 봉사자분, 정원상담사님과 친분이 생기면서, 수목원 안에서 새로운 놀이를 찾았다. 봉사활동이 끝나고도 남아 덩치가 커진 식물을 쪼개 식물을 늘리기도 하고, 채집해 온 꽃들로 수목원 곳곳을 꾸미기도 했다. 또 버려지는 부산물(전정한 나뭇잎과 가지, 볏짚 등)을 가지고 빗자루도 리스도 만들었다.
누가 시킨 적은 없지만, 일단 재미삼아 만들어 본 것들이 나름의 장식이 되고, 기회가 됐다. 지난 뉴스레터에 이야기했던 대로 지난달에는 자원봉사자분들을 모아 수목원에서 기르고 낟알을 탈곡하고 남은 볏짚으로 빗자루 만들기 수업을 진행했다. 꽃꽂이 수업이나 캔들 수업을 들어만 봤지,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긴 처음이라 긴장한 것도 사실. 강의록까지는 아니지만 수업 순서를 상기하며 나름의 원고를 적고 혼자서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역시나 수업은 생각대로만 흘러 가진 않았다. 학원에서 강사 알바를 해 본 적이 있지만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은 또 다른 종류의 문턱이 있었다. 노안으로 실이 잘 안 보인다 이야기하시거나, 예상보다 소요 시간이 길어지자 투덜 거리는 분도 있었다. 또 각자의 경험과 성향을 반영한 독자적인 방식으로 빗자루를 만들어 가 나를 당황 시키는 분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도와주는 사람이다’를 계속 되 뇌이니 어찌어찌 수업은 끝이 났다. 과정은 뚝딱거렸지만 결과물 앞에서는 다들 밝아 지셨다. 그리고 이 수업이 계기가 되어 새해는 일반 관람객을 대상으로 한 빗자루 만들기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수목원에서 이런 식으로 효능감을 찾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경험치가 한 뼘은 늘어난 것에 의의를! ㅎㅎ
이번주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 수목원의 온실을 찾았다. 재난 같던 첫눈의 여파로 온실 밖은 다소 초라하고 쓸쓸해졌지만 안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아니, 초록의 기세는 비현실적이었다. 주변이 어떠하더라도 온실 속 식물들은 각자 할 일을 했다.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도 맺고. 사실 밖에 있는 나무들도 효율적인 겨우살이를 위해 잎을 떨구고 봄을 기다릴 뿐,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나고 있었다. 더없이 소란한 마음과 상황,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고, 초록의 기세를 이어가 보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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