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올해의 OO] 올해의 책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2024.12.20 | 조회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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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구독자님 저의 오늘 글은 올해의 사건인지 올해의 책인지 모를 글인 것 같습니다. 원래는 분명 올해의 책이었는데 말이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 일상을 흔들고 있는데 하필 제가 하는 일이 그 사건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 일이라는 걸 저 역시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랐습니다. 그냥 밥벌이일 뿐인 일이었음에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고요. 구독자님의 일상도 내내 무탈하고 계속 평화로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 명의 에디터가 공통의 주제로 글을 쓸 겸 한 해의 마무리로 ‘올해의 OO’에 관한 글을 써보자고 했을 때 원래는 ‘올해의 이벤트’를 적어보고 싶었다. 덕후들이라면 종종 하곤 하는 덕질 연말정산 같은 개념인데 올해 최애의 공연, 뮤지컬, 앨범 등의 후기를 정리하는 일이다. 때마침 12월 초에 3일간의 인피니트 콘서트를 앞둔 상황이어서, 다녀온 뒤 콘서트 후기 정리할 겸 15주년에 맞게 기가 막히게 만들어 올 무대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콘서트 관람은 마냥 즐거울 수가 없었다. 비록 2시간 30분 만에 끝나긴 했지만 계엄 포고령에 명확히 명시된 “언론과 출판물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게 된다.”라는 문구. 요즘 같은 시절에 돈도 명예도 안되는 일을 한다는 말도 종종 듣고, 현실 감각 떨어지는 일 얼른 그만두라는 말도 들었는데(실제로 예비 저자한테 들었던 말이다.) 막상 저 문장을 보고 나니 얻어 맞은 것 처럼 갑자기 실감이 났다. 계엄이 있었고, 만약 그걸 막지 못했다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용비어천가나 부르게 되겠구나 하고.

3일간 낮 탄핵 시위, 밤 콘서트 관람이라는 강행군을 했고 콘서트 중간에도 VCR이 나오는 순간이면 어쩔 수 없이 혹시 2차 계엄이 터지는 건 아닌지, 그럼 현재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 되는 건지, 모여서 멀쩡히 공연을 하거나 보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도 냅다 집시법 위반이랍시고 끌려갈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별별 걱정을 다 해야 했다. 공연 당일 관람을 취소하는 팬들이 실제로 있었으나(대체로 시위에 더 길게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내가 바로 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 탄핵 시위에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공연 중에는 공연 보는 것에 집중하려 했고, 대신 낮에는 공연장과 1시간 넘게 떨어진 여의도로 나갔다. (마침 응원봉도 있었고.) 

속보를 접하면 접할수록 불안이 커졌는데 엄연히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마음이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이 되자 그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그때 이건 내가 뭔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불안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계엄이 선포되는 순간을 라이브로 봤기 때문에 더욱 불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속보는 조금 멀리하되 상황 파악은 하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내 일상을 또박또박 잘 살아야겠다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실시간 뉴스가 아니라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떠오른 것이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문장이었다. 종교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마을의 수녀원에서 일어나는 비리에 어린 소녀들이 희생당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당장 일어날 불이익에 겁을 먹고 주춤거린다. 그때 주인공인 펄 롱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을 다시 열고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나에게 올해의 책은 바로 이 책이 되었다.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표지

 

소설이라기 보단 긴 시 같은 작품이고 그래서 함축된 상징과 겹겹이 쌓인 층이 밀도 높게 꽉 들어찬 글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뒤돌아 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라고. 그 말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건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마땅히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내란은 그에 맞게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4일 여의도 탄핵 시위 현장에서 함께한 후배(투모로우 바이 투게더 팬 모아, 가운데)와 나(인피니트 팬 인스피릿, 오른쪽)의 응원봉 모임. 후배 덕분에 무려 내가 스무살 때 태어난 어린 모아를 만났다. 이번 시위의 주축으로 떠오른 '20대 여성'과 함께한 시위. 탄핵 소추안 가결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튀어오르다시피 일어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14일 여의도 탄핵 시위 현장에서 함께한 후배(투모로우 바이 투게더 팬 모아, 가운데)와 나(인피니트 팬 인스피릿, 오른쪽)의 응원봉 모임. 후배 덕분에 무려 내가 스무살 때 태어난 어린 모아를 만났다. 이번 시위의 주축으로 떠오른 '20대 여성'과 함께한 시위. 탄핵 소추안 가결 순간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튀어오르다시피 일어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출근해 할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곤 주말에 전 직장 후배인지 덕메(덕메란 덕질메이트를 가리키는 말, 같은 최애를 덕질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함께 티켓팅에 참전해주고 굿즈는 뭘 사야 하는지, 최애가 해외 투어를 하면 어느 나라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게 좋은지 등등 각종 정보를 전달해준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아끼는 후배와 여의도에서 만났다. 어쩜 덕후들답게 위치도 KBS 본관 옆에 자리잡고 앉아 탄핵이 가결될 때까지 열심히 응원봉을 흔들었다. 마침내 가결되었고(근데 가:204표라니 진짜.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마땅히 가야할 길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럼에도 실제 탄핵이 이루어지기까지 더 복잡하고 많은 절차와 싸움들이 남아 있고 헌재 결정은 어떻게 될지 너무나 불투명하지만, 나는 계속 나의 일상과, 내 일을 지키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인피니트의 ‘추격자’ 가사처럼, 결국은 ‘내 사랑이 이길’ 거라고 믿는다.

<코너 속 코너> 덕질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가 올해 내내 썼던 <코너 속 코너> 제목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순간이 있었을까? 2차 탄핵안 제안을 설명하면서 국회 안에서는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계엄을, 그리고 독재를 겪고 죽어가면서도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결국 탄핵소추안을 가결하게 만들었으니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것도 맞다. 반면 탄핵안이 가결되도록 목소리를 높인 또 다른 집단은 덕후다.(20대 여성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활동하기 좋은 세상 만들어 줄게(?)'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온 덕후들이 흔든 응원봉은 결국 세상을 이롭게 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덕후는 최애 이야기만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마지막으로! 데뷔 때 녹음(2010~2011년)하고 2018년도에 발매했는데 막상 무대는 이번 콘서트에서 처음으로 꾸며준 인피니트의 ‘기도’ 무대를 영업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앞으로도 모든 덕후들이 좋아하는 걸 보며 계속 마음껏 행복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영상은 팬 계정 ‘동우어번역기’님의 직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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