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에디터가 공통의 주제로 글을 쓸 겸 한 해의 마무리로 ‘올해의 OO’에 관한 글을 써보자고 했을 때 원래는 ‘올해의 이벤트’를 적어보고 싶었다. 덕후들이라면 종종 하곤 하는 덕질 연말정산 같은 개념인데 올해 최애의 공연, 뮤지컬, 앨범 등의 후기를 정리하는 일이다. 때마침 12월 초에 3일간의 인피니트 콘서트를 앞둔 상황이어서, 다녀온 뒤 콘서트 후기 정리할 겸 15주년에 맞게 기가 막히게 만들어 올 무대도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콘서트 관람은 마냥 즐거울 수가 없었다. 비록 2시간 30분 만에 끝나긴 했지만 계엄 포고령에 명확히 명시된 “언론과 출판물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게 된다.”라는 문구. 요즘 같은 시절에 돈도 명예도 안되는 일을 한다는 말도 종종 듣고, 현실 감각 떨어지는 일 얼른 그만두라는 말도 들었는데(실제로 예비 저자한테 들었던 말이다.) 막상 저 문장을 보고 나니 얻어 맞은 것 처럼 갑자기 실감이 났다. 계엄이 있었고, 만약 그걸 막지 못했다면 내가 하는 일은 그저 용비어천가나 부르게 되겠구나 하고.
3일간 낮 탄핵 시위, 밤 콘서트 관람이라는 강행군을 했고 콘서트 중간에도 VCR이 나오는 순간이면 어쩔 수 없이 혹시 2차 계엄이 터지는 건 아닌지, 그럼 현재 여의도에 있는 사람들은 어찌 되는 건지, 모여서 멀쩡히 공연을 하거나 보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도 냅다 집시법 위반이랍시고 끌려갈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지 별별 걱정을 다 해야 했다. 공연 당일 관람을 취소하는 팬들이 실제로 있었으나(대체로 시위에 더 길게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내가 바로 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 탄핵 시위에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공연 중에는 공연 보는 것에 집중하려 했고, 대신 낮에는 공연장과 1시간 넘게 떨어진 여의도로 나갔다. (마침 응원봉도 있었고.)
속보를 접하면 접할수록 불안이 커졌는데 엄연히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마음이 온통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이 되자 그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그때 이건 내가 뭔가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불안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계엄이 선포되는 순간을 라이브로 봤기 때문에 더욱 불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속보는 조금 멀리하되 상황 파악은 하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내 일상을 또박또박 잘 살아야겠다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실시간 뉴스가 아니라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떠오른 것이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문장이었다. 종교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마을의 수녀원에서 일어나는 비리에 어린 소녀들이 희생당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은 그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당장 일어날 불이익에 겁을 먹고 주춤거린다. 그때 주인공인 펄 롱이 말한다.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을 다시 열고 이 문장을 마주했을 때, 나에게 올해의 책은 바로 이 책이 되었다.
소설이라기 보단 긴 시 같은 작품이고 그래서 함축된 상징과 겹겹이 쌓인 층이 밀도 높게 꽉 들어찬 글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뒤돌아 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라고. 그 말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일이 있으면 그건 평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마땅히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내란은 그에 맞게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출근해 할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곤 주말에 전 직장 후배인지 덕메(덕메란 덕질메이트를 가리키는 말, 같은 최애를 덕질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함께 티켓팅에 참전해주고 굿즈는 뭘 사야 하는지, 최애가 해외 투어를 하면 어느 나라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게 좋은지 등등 각종 정보를 전달해준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아끼는 후배와 여의도에서 만났다. 어쩜 덕후들답게 위치도 KBS 본관 옆에 자리잡고 앉아 탄핵이 가결될 때까지 열심히 응원봉을 흔들었다. 마침내 가결되었고(근데 가:204표라니 진짜.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마땅히 가야할 길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럼에도 실제 탄핵이 이루어지기까지 더 복잡하고 많은 절차와 싸움들이 남아 있고 헌재 결정은 어떻게 될지 너무나 불투명하지만, 나는 계속 나의 일상과, 내 일을 지키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인피니트의 ‘추격자’ 가사처럼, 결국은 ‘내 사랑이 이길’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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