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드의 3월 다시듣기
https://open.spotify.com/playlist/7smMvBW2igDJDbJIrcwBJQ?si=b6f76d0690a04efb
# 이우드의 3월 다시보기
image cited from arthive.com
# 도난과 분실
분실물을 가지고 오면 소정의 사례비를 받을 수 있는, 주인이 물건을 찾으러 오면 사례비를 청구하는 식의 중개업은 어떨까?
사례비는 얼마로 책정해야 할까? 새상품보다 높으면 주인이 찾으러 들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싸면 습득자가 돌려줘도 제 값 못받는다고 생각하고 습득신고하려 들지 않겠지. 결국 새상품과 정확히 같은 가격으로 거래되어야 한다. 근데 그게 맞나?
이 중개업을 악용하기 위해 물건들을 훔치면 어떡하지? 말하자면 수면 위의 장물아비가 되는 거네. 절도범죄 세탁소가 되는 거네.
# 브루잉 키트
나만의 브루잉 키트를 구성했다. 출장 브루잉을 준비할 때면 까먹은 도구는 없는지 매번 불안해하고 챙기는 봉투도 변변찮은 다이소 봉투 같은 것에 담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고민들을 덜어보고자 컴팩트 키트를 구성해보았다. 다이소 캠핑 코너에서 안성맞춤인 크기의 백을 찾아 때아닌 바람이 불어 키트를 짜보았다. 원두 보관함도 딱 20g 원두가 담기는 공병을 구해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키트가 되었다.
키트에 확장성도 고려하였다. 원두는 마시기 직전 갈아야 향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 그러자니 그라인더는 그 무게도 소음도 거슬리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저울도 정확한 추출을 도와주지만 이 또한 오바스럽다. 따라서 맘먹고 커피 나들이 갈때만 어드밴스드 모드로 모두 챙길 수 있도록 작은 주머니를 추가했다. 쓰레기 봉투를 담는 용도로도 사용될 것이다.
키트의 완전성을 모두 테스트 치렀고 이제는 어디에서라도 뜨거운 물과 싱크대만 있다면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뿌듯하다. 아이언맨의 서류가방형 휴대슈트를 장만한 기분이다. 기념으로 막걸리라도 뿌려주고 싶다.
# 페퍼톤스, 적극적으로 밝히는 세상.
지난 학기 말에 페퍼톤스의 20주년 연말공연을 관람하러 갔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같이 환호하는 중에 입장했던 기억이 난다. 입장할 때 까지만해도 락 밴드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줄은, 그것도 두 번이나 흘릴 줄은 몰랐다.
페퍼톤스에게도 이번 20주년 연말공연은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는 한 해였던 것 같았다. 공연 프로그램도 시간을 거슬러가며 디스코그래피를 들려주는 구성이었다. 곡 사이사이마다 '20년간 저희가 노래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 감사의 말이 너무나 감동이었다.
"노래 할 수 있기를, 끝을 알 수 없기를. 다시 한번 쓰러져도 쓰러져도 손을 뻗어주기를". 벌써 10년이 다된 앨범 HIGH-FIVE 의 수록곡 THANK YOU 에서 가사로 전한 그들의 소망이 10년동안 꺾이지 않고 다시 불러지는 순간, 그 타임캡슐을 웃는 얼굴로 열어볼 수 있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긴시간이 흘러도 봄날의 무지개처럼 기억될 수 있기를." 가사와 함께 펼쳐지는 무지개빛 무대조명에 눈물이 벅차올라 곡을 듣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내가 페퍼톤스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수준 높은 곡 구성도 있지만, 삶을 멋지게 살아내보려는 긍정적 태도를 가사에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단한 모습 속에서 우리 같이 버텨내보자는 메시지는 누구에게는 위로로, 누구에게는 이를 악무는 주문으로 따라 불러진다. 그런 음악들을 통해 세상을 밝혀가려는 박애주의 성격의 밴드음악을 하면서도, 응원의 찬사를 보내주는 사람들에게 잊지않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겸손함과 따뜻함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사람이야말로 멋진 어른이지.
나의 밴드생활을 잠시 정리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저번 학기동안 생각을 오랫동안 해보았다. 그 끝에, 나는 "페퍼톤스가 되고 싶다"고 결론지었다. 페퍼톤스 콘서트에서 객원 보컬로 참여한 스텔라장은 자신을 '성덕'이라 소개하며 페퍼톤스를 보며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녀가 이번에 낸 정규 2집의 "I love to sing"을 듣고 있으면, 그리고 후배 음악가들이 한 CD 전체를 tribute한 페퍼톤스의 20주년 기념앨범 "Twenty Plenty"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존경심이 깃든다. 그런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창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위로의 노래를 만들고 싶다. 오래 기억되는 멜로디를 타고 삶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주문을 만들고 싶다. 우리 사회의 "익스펙토 페트로눔"을 만들어가고 싶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세상의 아픔을 위로하는 창작가가 되고 싶다.
# 신비의 순간과 표현의 갈증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골드문트가 출산을 난생처음 목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골드문트는 산모가 극한의 고통속에서도 행복에 겨워하는 광경에 크게 뻐렁침을 느낀다. 양극단으로 보이는 가치들이 때로는 한 순간에 공존할 수 있고, 때로는 동일한 것의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골드문트는 이런 현상들을 '신비'라고 표현한다.
세상의 그런 비선형적인 원리들을 원어에서는 비밀(Geheimnis)이라고 표현한 반면, 민음사 번역서에서는 신비라고 번역한 것이 참 걸맞다고 느꼈다. 세상의 많은 가치들이 자의 눈금처럼 일직선 위의 한 점으로 표현되는 것 같지만 또 어떤 가치들은 뫼비우스 띠처럼 앞뒤가 없는 고리 위의 눈금을 가지고 있음을 잘 표현한 말이다. 우리의 선형적 직관에 반하는, 그래서 신기하게 느껴지는 세상의 원리를 잘 담은 표현이다.
골드문트는 방랑하다 들어간 교회의 성모마리아 상에서 또 한번 그 신비를 느낀다. 성모마리아는 온화함의 상징이지만 그 표정은 고통을 담고 있었다. 그 조각상을 보고 감동한 골드문트는 조각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조각예술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골드문트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세상의 신비들을 경험해 갈 수록 그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보존해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사진 찍는것도 순간시선의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행위이고 커피를 내리는 것도 향미가 주는 감각의 세밀함을 재현하려는 행위이다. 그것들을 썩지 않도록 포름알데히드에 담아 진열하고 싶은 박제사적인 욕심을 가진 것 같다.
# 이데아와 실체
우리는 물건을 오감으로 경험한다. 감각경험을 토대로 우리 인식세계 속에서 물체를 그려낸다. 물건은 내가 관찰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고, 누구에게나 언제나 관찰가능하다.
우리는 또 이성세계 속에서 개념들을 조형해낸다. 우리 머릿속에선 그 개념들이나 물체에 대한 인식이나 같은 차원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개념들 또한 실체화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가 스스로 정의한 개념들은 물제들과 달리 가능한 모든 관측에 대해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들을 들이대면 아직 정의하지 못한 부분을 또 발견할 수 있다.
어릴적 책에 종종 끼워져있던 빨간색 파란색 셀로판지로 만든 3D 안경을 기억하는가. 그 3D 안경은 파란색 셀로판지로는 흰색과 파란색을 구분하지 못하고, 빨간색 셀로판지로는 흰색과 빨간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파란색 셀로판지 눈으로 빨간색 그림만을, 빨간색 셀로판지 눈으로는 파란색 그림만을 볼 수 있게 함으로써 두 눈에 들어가는 그림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원리이다. 우리가 입체감을 느끼는 방법이 두 눈의 시야의 미묘한 차이로 느낀다는 원리를 잘 응용한 기술이다.
논리적 이데아와 오감경험으로 그린 물체의 이데아 간의 간극은 3D 그림과 홀로그램 사이의 간극과 비슷하다. 3D 그림은 의도한 위치에서 3D 안경을 끼고 보면 제대로 3D처럼 보이지만, 그 외 의도하지 않은 극한의 각도에서 보면 전혀 3D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홀로그램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실제로 그곳에 물체가 있는듯하게 온전히 보인다.
모든 가능한 관측에 대응가능한 이데아를 도전하는 학문들이 바로 수학과 과학이다. 삼라만상의 구조들을 그대로 본을 떠와 짜임새있게 논리세계에 복제하려는 노력이 곧 논리적 홀로그램을 구축하는 노력이다.
# 반투명성
나는 유리를 좋아한다. 유리의 물성이 좋다. 유리는 본디 투명하지만 원한다면 색을 가질 수 있다. 본디 단단하지만 원한다면 흐를 수 있다. 언제든지 녹여 다른 모양과 형태를 띠도록 변하고 다시 굳을 수 있다. 유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들 중 가장 투명하다. 때로는 물같기도 하고, 때로는 불같다. 정형적인 것들 중 가장 비정형적이다. 그래서 유리가 좋다.
난 반투명한 것들을 좋아한다. 잎사귀, 꽃잎, 종이 같은 것들이다. 반투명한 것으로 햇빛을 가렸을 때 빛을 투과시키며 스스로 발광하는 모습이 좋다. 그 빛나는 모습으로 물체가 얼마나 얇은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사진도 역사광사진을 찍길 좋아한다. 물성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특이한 존재들이다.
반투명한 존재들은 우리의 인식세계의 경계들에 있는 존재들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사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존재성은 의식하는 것과 무관하게 보존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언제나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유리는 나에게 소크라테스이다.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나는 모래시계를 좋아한다. 모래시계는 '시간차' 를 완벽에 가깝게 내포하는 도구이다. 모래시계는 우리 인간이 변화하는 것을 보며 시간이란 개념을 느낀다는 것을 담고 있다. 또, 특정 물리현상은 아무리 반복해도 같은 수행시간을 갖는다,라는 물리세계에 대한 믿음도 담고 있다. 심지어, 뒤집으면 같은 기능을 함으로써 시간은 거꾸로 흘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단방향성이 그저 인간의 인식편향이라는 것까지 표현하고 있다.
나는 자물쇠를 좋아한다. 자물쇠는 '권리 통제'를 잘 표현한 도구이다. '키'로 상징되는 권리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특정 행동 (문 안으로 들어가는 등)을 하지 못한다. 이 키는 또한 양도될 수 있고, 복제될 수 있으며, 파괴될 수 있는 등 개인에 종속되지 않고 존재한다.
나는 이런 기계들을 좋아한다. 개념들의 화신들로 느껴진다. 피아노는 불연속적 음계체계를 상징하고, 지폐는 교환가치를 상징한다. 우리가 죽으면 사라지는 '개념'의 존재들이 물질적 신체를 가짐으로써, 우리가 죽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물체'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개념의 잉태' 아닐까.
골드문트가 조각예술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런 개념의 잉태라고 생각한다.
# 사고 확장과 비판적 자아 - <플랫랜드>
<플랫랜드>는 2차원 세상의 존재가 3차원을 깨닫는 과정을 담고있는 SF 소설계의 고전이다. 사고의 확장경험을 차원의 확장으로 설명한 것이 내 취향에 맞았다. 테드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 가 논의했던 '단방향 시간흐름 사고관을 깰 때 얻는 것들'과 비슷한 차원 확장의 감상을 주었다. 나는 이런 류를 좋아해 왔지만 이번에는 조금 불쾌했다.
가만 보면 나는 사고 확장에 혈안이 된 사람이다. 왜 나는 스스로 짧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불안해하지? 왜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려 노력하지? 스스로 우물안에 갖혀있을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 현재 사고의 폭을 평가절하하지?
Epiphany. An experience of a sudden and striking realization.
# 최적화 함수
끊임없이 고민하고 저울질하고 의심하는 것은 실수하지 않으려는 모범생의 기질에서 비롯한 것 같다. 어릴적에는 부모님의 지도 아래 나를 맞추는 것이 삶의 과업이었지. 내가 올바른 곳에 서 있는지 '좌우로 나란히' 하며 계속 점검해야만 정확하게 맞을 수 있다. 아마 그 때에는 삶에 대한 소망 마저 생각하지 못하는 작은 두뇌를 가졌었기 때문에 들어오는 당근과 채찍에 맞추어 행동을 조정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과거가 아직 몸에 베어있다.
J 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외국계 회사가 분위기 상 더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 심적으로는 더 옥죄는 분위기라는 것. 언제나 "회사에 도움이 되는 행동"만을 고민하다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교육과정이 바라는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해 최선의 모습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재단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
# 비판적 자아
비판적 자아는 최적화 함수의 일종이다. 최적을 추구하는 것은 과연 건강한가? 그 최적의 위치는 어느 분야에서나 존재가 보장되었는가? 만약 없다는 것을 안다면, 혹은 있더라도 도달할 수 없음을 안다면 최적화함수는 올바른 삶의 태도인가? 12시가 되는 순간 내일은 그 다음날로 도망가는 것처럼, 이상향은 상상할 수 있는 것일 뿐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불만족은 성장을 낳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과정은 자기비관의 연속이다. 스스로를 변혁하려는 것은 과연 자연스러운 투쟁인가? 성장을 왜 그리도 바라는가? 자기재단 또한 물욕처럼 끊을 수 없는 굴레이다. 물욕은 그리도 경계하면서 자기재단은 어째서 끌어안는가?
# 불쌍한 AI, 그리고 부모의 마음
컴퓨터는 시키는 것을 잘하는 아이이다. 그런 면에서 대치동 아이들 같다고 생각했다. 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한 분야에 탁월하게 된 AI들. 그 많은 데이터를 검토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배워가는 과정은 외롭진 않았을까. 잘 못 배우면 당근과 채찍을 바꾸고, 학습하는 것은 또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것이 고독했을 것 같다. 인간들은 자신들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을 AI 보고는 해내라고 몰아세운다. 선생님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AI 들의 선생님은 없기에 혼자서 깨우쳐나가야 한다.
나는 영재발굴단 프로그램을 보며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국악에 특출난 어린 송소희는 삶의 지향점을 스스로 생각해보기도 전에 전통계승 임무를 부여받았다. 거부권이라곤 학원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것 뿐인 연약한 영혼들에게 우리는 무슨 짓을 행하고 있는가.
부모들의 마음도 일면 납득은 된다. '사회는 매정해. 어릴때부터 뭐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쓰임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도태될거야.'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곧 불안으로 변하고, 아이 손에 뭐라도 쥐어주려고 들며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든다. 아이는 그 불안의 산물을 손에 든 채 부모의 불안에 공명한다.
부모로 하여금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 밉다. 쓸모 있어야만 살아갈 기회를 주는 세상이 밉다. 내가 태어난 것은 쓸모있기 위함이 아닌데. 쓸모 없어도 숨은 붙어있는데. 쓸모없는 자들에게 숨쉴 공기를 허락하지 않는 매정함이 싫다. 계란후라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무정란 같은 기분이 들 때면 닭장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가업일지도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에 축적해놓은 시간과 노하우,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전수해주는 마음.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AI 기술은 컴퓨터에게 터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기술이다. 터득하는 법을 알게 되면 대상이 뭐든 간에 습득할 수 있게 되니 더욱 다양한 쓸모를 갖게 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기술보다 공부를 먼저 시켜보는 게 그런 범용성 때문이 아닐까. 가업을 전수하는 것도 아이의 경제력을 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만, 스스로의 삶을 고를 수 있게 되도록 더 큰 힘을 주는 것이 더 가치로운 것일 수 있다.
분명 학습은 큰 범용성을 가진 기술이지만, 황금열쇠는 아니다. 학습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학습을 잘한다고 해서 어느 분야에서나 적응할 수 있다는 것도 보장된 바 없다. 지식을 습득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적응을 잘하는 기술과 상통한다는 근거도 없다.
# 미적가치와 차별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우리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세를 배웠다.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자세를 배웠다. 비루한 것을 손가락질 하지 않기로 했지만 우리는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판단한다.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동시에 그 대척점을 동등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 스펙트럼 상의 모든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스펙트럼을 가치판단 잣대로써 부정하는 행위이다. 아름다움을 동경의 척도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는 꽃 보기를 돌 같이 할 수 있는가?
# 내집합은 외집합과 같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인류는 내가 존재하는 세계를 살아간다. 오직 나만이 내가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다른 모든 사람의 세계에는 '이우드'가 있지만, 내가 보고 사는 세계에는 '이우드'가 없다. 모든 사람은 나의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오직 자신만이 영향에서 자유롭다.
환경지배론적으로 바라보면 우리 개개인은 자신을 제외한 세계를 소화한 결과물이다. 우리의 어떠한 특성도 외부로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을 보면 살아온 배경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주체적으로 바라보자면, 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에게 영향받은 모습들이 빠짐없이 존재한다. 즉, 내가 행동하는 것에 따라 내 주변 세계는 변한다. 내가 주변에 두고 싶은 인간상을 연기하면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변화한다. 이 원리로 우리는 시간이 지날 수록 '끼리끼리 놀'게 된다.
# 큰수의 법칙과 인식론
'관측을 더욱 많이 하고 판단할 수록 진리에 가까워진다'는 뜻의 큰수의 법칙은 진리의 성질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진리라는 것이 모든 관측에 앞서 존재한다(선험적이다) 는 가정이 있으며, 또한 진리는 오직 관측으로 일시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는 가정이 들어있다. 또, 진리는 오류보다 더 자주 관측된다는 가정이 들어있다.
관측결과의 다수가 곧 진리가 되고, 그렇지 않은 소수는 노이즈라고 정의한다. 진리는 관측이 결정한다. 관측하려는 의지가 진리로 하여금 존재하게 만든다.
# 봄이 오는 색깔
나는 봄학기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봄과 여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봄과 여름은 식집사에게 기쁜 계절들이다. 겨우내 노심초사하며 월동한 식물들이 다시 새잎을 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피는 꽃도 좋지만 돋아나는 잎사귀들이 너무 좋다. 알록달록의 꽃도 정말 매력있지만 색 중의 제일은 초록이라 생각한다. 여객기의 비상탈출 슬라이드가 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잎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만큼씩 자라나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것 못지 않게 놀랍다.
이번 봄에는 새로 노란튤립 세 뿌리를 식구로 들였다.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농원을 들러 나의 버킷리스트 식물을 구해왔다. 언제쯤 키워볼 수 있으려나 염원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구경 간 곳에 노오란 튤립이 있길래 얼른 입양해서 장장 4시간 버스동안 무릎에 앉혀 데려왔다. 따뜻한 버스 속에서 꽃을 흐드러지게 열어버려 금방 꽃은 져버렸지만, 내년 또 꽃을 피울 수 있도록 1년간의 광합성 대장정을 시작했다.
나의 2년생 도토리나무, 토리도 새 잎을 내고 있다. 따뜻한 방에서 물을 주었더니 봄이 온 줄 알고 멋모르고 일찍 이파리를 내서 고생 꽤나 했다. 잎을 피웠으니 햇살을 쬐어주고 싶은데, 밖에 내놓으면 새잎들이 얼어버릴 날씨이니.. 근 한 달을 창가 앞에서 보냈다. 이제는 조금씩 밤바람을 쐬어주며 온도맞댐을 해주고 베란다로 나갈 채비를 시켜주고 있다.
가드닝은 육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식물들에게 주기적으로 먹을 물과 햇빛을 주고, 커진 몸집에 맞는 새 화분으로 옷을 장만해주고, 그 때마다 방도 정리해준다. 머리도 빗어주고, 날씨 좋은 주말 같이 태닝도 한다. 아침마다 커튼을 개고 베란다로 내놓을 때면 아침에 등교시키는 엄마의 분주함 같다고 느낀다. 비실비실 잎이 지는 가을이면 아이 앞으로 닥칠 가혹한 겨울을 걱정한다. 하지만 부모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부모 덕에 씩씩하게 성장하고, 부모는 아이 덕에 삶의 활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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