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드의 5월 다시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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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드의 5월 다시보기
- 파과.
# 이우드의 5월 다시읽기
- 오만과 편견.
# 이우드의 5월 돌아보기
- 논문 제출을 했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 현생이 바쁠 때에는 반월간지의 욕심을 좀 내려놓고 월간지로 발행하려 합니다.
- 페퍼톤스 공연 실황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저는 1일차 공연을 직관했는데, 2일차 공연까지 영화로 보니 또 뜻깊었습니다.
- 독일 인턴십은 열심히 했으나 물건너 갔습니다~ 재밌는 경험으로 묻어두려구요! 독일어 공부는 계속 할 겁니다!
- 논문 제출이 끝나자마자 월급이 뿅~ 하고 들어오길래! 노트북을 여기저기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는 노트북이라서요. 본체 하우징도 새 걸로 바꾸고, 써멀구리스도 재도포하고, 램도 4GB -> 16GB로 바꿨습니다. OS 도 포맷하고 재설치 해줬더니 아주 건강합니다.
- 새로운 식물 친구, 채율이를 들였습니다. 식물 종은 율마구요, 순따기를 하면 레몬 같은 상큼한 향이 나는 게 특징인 연두색 침엽수입니다.
# 기억을 잘 못한다
요새 자꾸 기억들이 온전치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일정의 날짜를 하루 전후로 착각한다던지, 친구 전공을 잘못 기억한다던지, 알짜 상식을 꺼냈는데 엉터리로 기억한다던지..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졸지에 잔거짓말, 잔허풍 해대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할 즈음에 마침 핑계고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하루하루를 살고, 대신 행복하게 산다는 김동현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니, 마음속 앙금도 금방 까먹고 불행도 금방 잊혀진다. 그래서 더욱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 같다.
이런 성격은 메모를 적극 활용하면서 발생한 반사효과인 것 같다. 노트에 적어놓기만 하면 언제든 꺼내볼 수 있으니깐 소소한 것들을 기억하는 대신 기록하는 습관이 자연스레 줄었다. 그래서 뇌 용량도 정보인출 대신 사고연산에 더 많이 할애할 수 있는 것 같다. 컴퓨터공학 용어를 빌리자면 swap 메모리가 큰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나이 까먹는 거 같은 건 좀 서운해 하니깐, 그래도 조금은 기억하면서 살아야 겠다는 반성도 한다..
# 시각화에 대한 갈망
우리 아버지는 메모하는 습관을 금같이 여기셨다. 종이를 아끼지 말라는 말을 지금도 입에 달고 사시는데, 그 덕에 우리 집에는 이곳저곳에 포스트잇과 이면지가 항상 넉넉히 구비되어 있다. 생각을 머릿속에서만 굴리지 말고 손으로 써놓고 읽어보면서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 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무엇을 생각하든 눈 앞에 보이는 것만큼 직관적인 것은 없다. 생각이 머리를 벗어나 종이에 적히기 시작하면 지식은 종이라는 육체를 가지고 비휘발 데이터가 된다. 게다가 언제든지 읽기만 하면 머리로 업로드할 수 있다.
# '발작버튼' 대신 '역린'
같은 사고를 하더라도 사용하는 단어들이 시야를 바꾼다.
# 자기중심성
항상 행동을 조심스레 옮기는 나로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내 과거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을 때이다. 내가 가볍게 던진 말이 시의적절하지 않았다거나, 곡해되기 쉽상이라거나, 눈치가 없었던 말이었다거나, 하는 것을 깨달을 땐 참으로 괴롭다.
과오를 깨닫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순간엔 내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 말은 즉슨 내가 지금 순간순간 하고 있는 많은 행동들도 가까운 미래에 과오였다고 깨달을 것이라는 것이다. 탄탄히 닦인 포장도로인 줄 알고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뒤돌아보면 크레바스 투성이일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눈가리개를 한 채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셈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면 사소한 행동이라도 더 조심하게 되고, 심하면 이제 어떤 행동도 좀처럼 할 수 없게 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안전한 길이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물컵이 넘어지려 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잡아야 하고, 대화에서도 타이밍 적절한 호응이 필요한 법이다. 결국 나는 내 발밑이 크레바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도 성큼성큼 걸어야 한다. 때로 세상은 내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 네잎클로버는 하루의 행운을 증명하는가?
내가 네잎클로버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곧 행운이 찾아올 것인가? 조금 곰곰히 생각해보자.
만약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는 것이 행운의 예견이라면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그 날 행운이 찾아오는 확률] 이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확률] 보다 압도적으로 커야 한다. 그래야 둘은 강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네잎클로버를 발견할 확률이 1,000분의 3이라고 하고, 행운이 찾아오는 확률이 1,000 분의 1이라고 해보자. 만약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예견한다면, 1,000 가지 상황 중 1,000분의 3인 3 가지 상황에는 네잎클로버를 줍는다. 하지만 3가지 모두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그 중 많아봤자 오직 1만이 행운이 찾아오므로, 네잎클로버를 발견했을 때 행운이 찾아오는 확률은 커봤자 33%이다. 이 확률이 강한 상관관계가 되도록 커지려면, 네잎클로버를 발견할 확률과 행운이 찾아오는 확률이 일단 규모가 비슷해야 한다.
행운이 확률이 낮은 것일수록 더 희소한 행운이라 더 강한 행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비슷한 크기의 네잎클로버 발견 확률을 노려야 하므로 더 무성한 클로버 군락에서 찾아야 한다. 또, 각 군락에서 발견 확률을 최대한 낮게 유지해야 하므로, 네잎클로버가 잘 생기지 않을 법한 곳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적으로 네잎글로버는 생장점을 다친 돌연변이 클로버이므로, 다칠 위험이 있는 길가보다 공터 한가운데가 더 큰 행운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확률을 낮게 유지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를 찾아내야만 행운이 잇따른다. 그렇기 위해서는 들이는 탐색 시간 대비 행운 효율을 높이는 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네잎클로버를 찾는데 걸리는 시간은 발견할 확률에 반비례하고, 확률과 행운의 정도는 또 반비례하므로, 찾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수록 더 큰 행운을 바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무작정 많이 들인다고 해서 또 행운이 무한정으로 커지는 것은 또 아니다. 예를 들어 군집의 모든 클로버를 검토하여 군집의 네잎클로버 밀도를 확정 관측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정해진 같은 확률 대비 시간이 적게 들 수록 행운의 크기 또한 커지므로, 최대한 빠르게 탐색해야 더 큰 행운이 온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리해보자면, 네잎클로버가 행운을 불러온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가장 외떨어진 무성한 세잎클로버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스캔할 수록 더 큰 행운을 불러올 수 있다. 반대로, 길 가까이의 작은 클로버 군락에서 차근차근 찾는 행위는 최대한 피해야 한다.
이상 확률과 통계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이과의 미신이었다.
이 상관관계가 수치적으로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인과관계까지 증명할 수는 없다. 인과관계를 증명하려면 실험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일부러 발견하지 않는것" 은 어떻게 하는가? 발견하지 않은 척 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해서 찾는데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억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반대방향은 더욱 가망이 없다. "행운이 일어나지 않게"하는 건 어떻게 하는가? 여러모로 실험을 할 수 있는 세팅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인과관계 까진 아니다. 네잎클로버를 찾았을 때 시간상으로 곧 행운이 찾아오는지만 궁금하다.
# 커피 지도
커피 체인을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원두쇼핑몰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농장에서 재배되고, 어디 워싱스테이션에서 프로세싱 되었고, 어디 생두 수입사를 통해 수입되고, 어디 로스터리에서 어느 로스터가 로스팅했고, 어디 매장에서 사고 마실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원두를 고르는 데에 있어 지형적 시각화는 좋은 접근이 아니다. 첫째로, 원두에 있어선 이동경로 자체보단 산지나 로스터리 등의 거점 정보가 더 중요한 지리정보이다. 지형적 시각화는 원두 산지를 표현하는 데에만 유용하지, 그 외의 측면(프로세싱, 로스터, 쇼핑몰 등)은 지형적 특성이 아니라서 지도 위에 표현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원두 산지는 커피 벨트의 특정 나라들에만 집중되어 있어 등간축척 지도(일반적인 지도)는 공간 활용이 좋지 않다. 집중되어 있는 부분은 너무 정보집약적으로 모여있어 읽기 어렵고, 필요 없는 부분은 괜히 공간만 낭비하는 셈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생각한 것이 parallel category graph 이다. 선거철에 정당 지지율 변화를 표현할 때 가끔 보는 그 그래프이다. 이 그래프를 사용하면 어떤 원두가 어느 로스터에게 갔는지 커피 체인 구간별로 집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 무엇이, 누가 악을 규정하는가?
"독립운동"은 참으로 양면적인 행위이다. 독립운동의 행동 주체와 같은 편이라면 그 행동은 정의롭다. 하지만 행동 주체의 반대 편이라면 그 행동은 "테러"라고 부른다. 특정 행동에 대해 누군가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누군가는 악하다고 생각한다. 즉, 행동의 선과악은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행동의 선악 판단은 판단자의 가치관에 입각한다.
스텔라장의 villan 이란 노래가 이 부분을 꼬집는다. "We all pretend to be the heroes on the good side. But what if we're the villans on the other?"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럼 과연 내가 해야만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객관적으로 더 나은 행동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 잘 긁히지 않는 정보들
영어로 듣는 수업은 내용이 머리에 잘 박히지 않는다. 영문장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현상하는 과정이 한국어 문장보다 더디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번역 과정에는 주의집중을 많이 할애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대화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일례로, 영어 대화는 그 흐름을 머금고 있기가 힘들다. 문장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이전 문장의 내용은 금방 잊힌다. 새로 들어오는 문장을 이해하느라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 대화에서는 앞 네댓 개의 문장이 머릿속에 부유하다 순서대로 사라지는 반면, 영어 대화에서는 한 두 문장만이 내가 들고 있을 수 있는 한계이다.
우리 학교는 거의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한다. 국제화를 위한 준비라나, 뭐라나. 한국말로 유창히 자신 연구분야를 소개하다가 갑자기 영어로 말하니 말더듬이가 되는 교수님을 보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교수님도 자신의 표현능력의 최대를 사용하지 못하고, 학생들도 이해능력의 최대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 구조가 참으로 부당하다고 느낀다. 전환 효율이 엄청 낮은 전달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충전은 시원치도 않으면서 뜨거워지기는 인덕션 뺨치는 충전기 같다.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해야 그 뒤에 국제 학계에 진출하던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영어가 어려워서 수업을 안듣는 마당에, 학교의 저력은 나날이 하향세로 흐르는 게 눈에 뻔히 보인다. 정작 정책기획자는 이 현실의 심각함을 모르고 있겠지.
# 적게 가지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25년 현재 짜장면 한그릇은 7-8천원 선이고, 나의 월간 생활비는 30-40만원 선이다. 이 마저도 미친듯이 높은 엥겔지수를 자랑한다. 지출이라곤 밥먹는 것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1) 기숙사가 무상제공되기 때문에 주거비가 전혀 들지 않고 2) 자잘한 소비를 경계하고 쓸 때는 크게 지르는 소비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후자는 나의 구매 충동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통제하면 더욱 잠재울 수 있지만 전자는 졸업과 동시에 잃어버릴 혜택이다. 후자는 만족을 불러 일으키는 소비이고, 전자는 필요를 해결하는 소비이다. 소비 만족도를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전자를 최대한 줄이고 후자를 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얼마나 적게 벌고 살 수 있는가? 얼마나 큰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까? 편의점같은 상설매장 없이 살 수 있는가? 인터넷 쇼핑몰 없이 살 수 있는가? 냉장고와 에어컨 없이 살 수 있는가? 가스와 전기 없이 살 수 있는가?
적게 가지는 삶을 저해하는 가장 큰 부분은 누가 뭐래도 주거비와 식비이다. 이 둘을 줄일수만 있다면, 그리고 사치 소비를 줄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큰돈을 매달 벌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교육비, 양육비와 같은 다른 많은 것들도 모두 복지로 해결해준다면 지출은 더더욱 사치에만 국한될 것이다.
우리학교 기숙사 생활은 이를 제도적 차원에서 해결한 사례이다. 모듈화된 집합주거 구조는 유지보수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이라 작은 주거유지비를 유지할 수 있다. 식비 또한 단체급식을 통해 조리 효율을 높이는 것이 비용 절감의 핵심이다. 요는 결국 이 모든 게 '평준화된 단체복지 생활' 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복지가 강한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의 장점인 빈부격파를 구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공산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처럼 motivated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 입을 옷이 없다면, 옷을 사면 해결되는가?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은 액면 그대로의 의미에서 쓰는 말은 절대 아니다. 옷이 옷장에 몇벌 존재하긴 하는데 내가 지금 원하는 옷은 없다는 뜻이다. 그 말은 즉슨 내가 가진 옷들로 만들 수 있는 룩 중 내가 오늘 입고 싶은 룩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럴 때 간단히 옷을 사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앞서 구분해보았듯 입을 옷이 없는 경우는 상상한 룩을 내가 가진 옷으로 만들 수 없는 경우일 때도 있지만, 보통은 '마음에 드는 룩이 하나도 없네'를 나타낼 때 도 이 표현을 쓴다. 내가 입고 싶은 룩이 따로 마음 속에 정해져 있지 않아도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을 쓴다는 말이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원하는 룩을 만들 수 있게 옷들을 맞춰 구매하면 해결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아무리 옷을 들여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닫힌 문제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단번에 정해지지만, 후자의 경우는 열린 문제이기 때문에 언제 원하는 룩을 만들 수 있게 될지 끝까지 해봐야 안다.
새로운 옷을 들이는 전략은 두가지 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돕는다. 첫째로, 원하는 룩을 만들 수 있게 된다. 둘째로, 원하는 룩이 따로 없더라도 표현할 수 있는 룩이 더 다양해지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룩을 어쩌다 만들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전략인가? 과연 우리가 옷을 늘리면서 늘어나는 룩의 갯수는 우리가 바라는 룩의 종류보다 큰가? 우리가 옷을 늘려가도 입을 옷이 없다고 계속 느끼는 건 감각이 첨예해지는 것인가, 옷에 싫증을 더 단시간에 느끼게 되는 것인가?
옷은 싫증의 대상이긴 한건가? 싫증의 근원은 무엇인가? 싫증은 건전한 감정인가? 왜 우리는 평생 쓰는 자신의 이빨에는 싫증을 느끼지 않으면서 옷에는 싫증을 느끼는가?
# 자기치장과 자존감
예쁘게 옷을 입으면 자신감이 선다. 자세를 더 곧게 하게 되고, 더 활달하게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숨기고 싶은 게 없는 당당함이랄까. 콤플렉스가 없는 구김없는 사람이 된다. 즉, 예쁘게 입는 것은 하루의 기분과 태도를 끌어올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때로는 기분을 내려고 옷을 고르다보면 되려 스트레스만 받기도 한다. 그럼 그것은 기분에 대한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린 것에 대한 벌인가?
# 더 큰 사고로 작은 사고 하기
상대성 이론으로 뉴턴역학의 관심대상을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다. 필요 이상으로 날이선 칼로 물렁한 복숭아를 자르는 듯하다. 하지만 더 세밀하게 생각해놓은 툴로 그보다 단순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꽤 많은 것을 열어준다. 내가 세밀하고 복잡다단한 철학 질문들을 고민하다가 현생의 문제들로 돌아왔을 때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또, 삶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소설속의 어떤 장면이 겹쳐보일 때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우리가 사고하고 교양을 늘리고 많은 것들을 배우는 것도 모두 앞으로 일어날 '그것보다 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복잡한 준비라는 생각이 든다.
# 집에 도착하면 알려줘
나는 '집에 도착하고 나면 전화 남기라고 말해줘' 같은 지령에 정말 젬병이다. 그 순간에 뭔가를 해야 했었다는 경종이 없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끝났을 때 이런 지령이 있었음을 떠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결국 일을 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이 지령을 끊임없이 되뇌여야만 까먹지 않고 수행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되뇌이지 않고도 그 순간에 인출이 되려면 생각이 나도록 인출 설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집 키에 메모를 달아놓아서 집 키를 꺼내는 순간 (집에 들어서는 순간) 에 메모가 눈에 띈다던지. 배출해야 하는 쓰레기를 문가에 미리 가져다 놓는다던지.
# 사고법을 가르치는 것
사고할 줄 아는 건 스스로 생각의 고리들을 연결해 갈 줄 아는 것이다.
이 능력은 두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다. 첫째, 생각 체인들을 여러 개 따라가보는 것.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대로 사고 흐름을 굴려보고, 수학 답지를 읽으며 증명 방법을 따라가 보는 게 여기에 속한다. 이 과정에서 한번 시도해본 생각들을 잘 기억하고 짜깁기 할 수 있다면 사고법을 여러가지 깨우칠 수 있다.
두번째 갈래는 간단한 징검다리를 만들어 스스로 헤쳐나가게 하는 방법이다. 새로 생각해내기 어려운, 이를테면 생각의 결론 등을 짚어주고, 지금까지의 사고들로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사고목표는 맡겨보는 것이다. 목표점을 주고 '거기까지 도달하라'는 문제는 짜깁기 능력을 기르는 훈련이다.
하지만 혼자 생각하는 것은 내적 동기가 필요하다. 두번째 방법은 생각을 하도록 외적 동기를 주입하는 사례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하도록 하는 자발적 동기는 어떻게 만드는가?
# 문어
'문어로 생각한다면 무슨 기분이 들까?' 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이건 `What is it like to be a bat?` 라는 유명한 인지철학 논문을 오마주한 제목이다. 아무리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있는 둥을 이입해보려 한들 그들이 느끼는 사고과정에 가까이도 미치지 못한다는, 여하튼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논문이다.
우리는 아무리 상대방을 이해한다 한들 내가 생각한 대로 상대방이 느끼는 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방법이 없다. 상대방의 육체에서 상대방의 두뇌활동으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지 체험해볼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내가 그 위치에 있다면' 과 같은 이입으로 감정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방식으로 유추를 한다. 두 존재가 같은 맥락에서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느끼는 것이 어떤지는 몰라도 서로 공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신체구조가 전혀 다른 문어라면? 6번째 다리가 몸통을 끌고가는 판단을 하는 기분은 상상이 쉽게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녕 우리는 문어를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일까?
# 수리, 재사용, 재활용
내가 노트북을 고쳐 쓸 수 있는 것은 구조를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떤 부품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부위는 간단한 수리가 불가능한지 알기 때문에 내가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하지만 노트북 사용자의 열의 아홉은 노트북 뒷판을 뜯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노트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는 채로 사용하고 있다. 컴퓨터공학 꽤나 공부한 나도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직접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많은 물건들의 생산을 누군가에게 맡기면서 우리는 사용하는 물건들에 대한 이해를 희생했다. 이런 생산 아웃소싱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로도 '그 지식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이 방식의 큰 문제점이 있는데, 이는 물건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비로소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을 바로, 우리가 직접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작동했는지 모르기에, 어디가 고장나서 작동을 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고치는 것 또한 아웃소싱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물건에 대한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직업을 준다는 점에서, 일자리 창출의 부수효과 덕에 눈감아지고 있다. 물건에 대한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따라서 그 지식만으로도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물건을 생산하고 고쳐쓰기 위해 그는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물건의 지식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사회에 구성원의 자리를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지만 외면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물건이 더 이상 고쳐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발생한다. 자연적인 재료로 만든 물건 (예를 들어, 목재의자)들은 자연이 그 분해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 정확히는 자연도 미생물들에게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하지만 비자연적인 재료의 조합으로 만든 것들은? 어떻게 분해하고 어떤 재료가 어떻게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는 그것을 만든 사람만이 알고 있다.
고친 물건을 만든 사람이 고치는 것과 같은 논리를 대입해 볼 때, 물건의 폐기와 재활용 또한 제조사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쇼핑몰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이지, 수명을 다한 물건을 회수해가는 곳은 아니다.
그에 가장 가까운 책임경제를 실현하는 물품은 아마 소주병 정도일 것이다. 소주병은 분해나 재조립 없이 재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소독하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모든 소주병이 공용 규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드디어! 난생 처음 해본 논문 투고 여정이 막을 내려 이젠 학회에서의 합불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래서 찬찬히 밀린 글들을 퇴고하여 보내보겠습니다.
작가의 말,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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