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 1: 나의 시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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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관계의 시작
지호 이야기를 하고싶다. 지호와는 중학교 1학년 시험 기간에 독서실에서 처음 말을 섞었다. 지호는 그때 나를 처음 알았겠지만 나는 그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지호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유명한 애들은 꽤 있었으나 그의 유명세는 좀 다른 결이었다. 보통 ‘잘 노는 애들’이 이름을 날렸다면 지호는 사람 됨됨이로 친구들 입에 오르내렸다. 물론 지호의 수려한 외모나 준수한 성적, 운동 능력도 그에 대한 관심에 힘을 실었지만 그보단 겸손, 배려, 강한 사람 앞에서 강해지고 약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태도가 그의 이름을 드높였다. 중학생 때를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나 외모, 성적이 아니라 내면 때문에 인기를 얻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특히 남자 애들 사이에서는 외적인 요소의 과시 없이 유명해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호와 독서실에서 처음으로 대화했을 때 너무도 편안해서 신기했다. 그는 상대에 맞춰 대화를 끌어내고 이어나가는 법을 알았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고 지호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귀 기울여 들었다. 신기할 정도로 내가 했던 얘기를 잘 기억해서 다시 만났을 때도 대화를 이어가기 편했다. 이후 우연히 같은 학원에 다니게 되고, 함께 축구나 게임을 하고, 각자의 집에 놀러가기도 하면서 우린 더욱 가까워졌다. 나는 둘만의 기억들이 쌓여간다고 느꼈다.
지호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려깊은 태도를 보였다. 누구나 그에게서 배려나 경청, 이해를 느끼는 듯했다. 다들 지호의 이름을 대화에 올리며 친분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종종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누군가가 지호와의 친분을 자랑하는 일도 있었다. 그럴때면 짜증이 나곤 했다. 아마 그를 독차지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그 어린 마음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지호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진 일도 없었다. 지호와 친한 사람이 늘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내가 어떤 소외감도 느끼지 않도록, 누구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도록 모두를 신경썼던 것 같다.
나와 지호 사이 고유의 기억들이 충분히 쌓였다고 느낀 어느 날 난 좀 급하게 물었다. “우리 베프 맞지?” 지호는 답했다. “그럼, 맞지.” 그 말을 듣는 순간 휴대폰 연락처에 등록된 지호 이름을 ‘베프’로 바꿨다. 메신저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만 모아두는 그룹에 지호를 추가했다. 더이상 지호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애들이 꼴사납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우정어린 일들이 다른 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게 되었으니까. 지호와의 관계에 신경쓰는 듯한 티도 내지 않았다. 나는 ‘진짜 베프’니까 쿨하게, 니들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진짜 친구는 나야, 라면서.
돌아보면 원하는 관계를 얻어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까진 주어진 관계에 이렇게 저렇게 적응해왔을 뿐이었다.
그건 사랑이 이루어졌을 때만큼 기쁜 일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른 동네로 진학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새로운 친구를 사겨내느라 어려움을 느낄 때 날 늘 편하게 해줬던 지호가 생각나긴 했지만 어린 날의 많은 기억이 그렇듯 빠르게 희미해져 갔다. 가끔 안부를 묻는 정도로 연락이 뜸해졌다. 그와의 친분을 자부심으로 간직했던 노력도 점차 힘을 잃었다.
살아갈수록 지호처럼 착하고 훌륭한 사람은 드물어졌다.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지호를 더 찾는 게 아니라 잊어버렸다. 마치 그렇게 완벽한 사람은 원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선지 성인이 되고서는 일년에 한 두번 연락하는 사이가 됐다. 그 정도의 간격으로 정말 가끔, 뜬금없는 시간에 잘 지내냐고 문자를 하면 지호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녁에도 마음대로 나가 늦게 들어와도 괜찮은 나이가 됐을 때, 그게 신나서 많은 밤에 집을 나설 때, 한 두번 지호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이성 고민을 털어놓거나 축구 얘기를 했다.
지호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제대로 알게된 건 대학생 때였다. 어릴 적부터 척수 쪽에 불편함이 있다는 건 대강 알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티가 나지 않았고 축구도 곧잘 뛰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또다른 친구를 통해 그 병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지금의 기술로는 완치가 불가능하다나.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실감이 날만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1년 쯤 됐을 때 지호를 만났다. 취업 준비하랴 첫 직장에 적응하랴 정신이 없어서 2, 3년 만에 보는 자리였다. 그 날 지호는 발을 절었다. 자세히 묻진 못했지만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 병이 악화됐다고 했다.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같이 초밥을 먹고 카페에 갔다. 난 그때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 지원을 하고 1차 면접을 본 뒤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있게 이직을 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기대에 찼던 시기였다.
지호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불합격 통보였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앞에 지호가 있는 걸 아랑곳 않고 “아이씨”하고 내뱉었다. 그리고 지호에게 말했다. “지호야, 미안한데 나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겠다.” 지호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페에 온지 20분도 안 됐고, 그렇게 일찍 떠나기엔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각자 짐을 싸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약간의 어색함이 감돌았지만 나는 내 가라앉은 기분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그 후에, 지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나는 몇 번 더 그를 만났을 테지만,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지호와의 마지막 만남은 그때였다.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무심하게 집으로 돌아온 그 날이, 내겐 빈틈없이 후회로 가득하다.
거짓말 같은 4월 1일의 죽음이었다. 발인 날엔 하늘이 뚫린듯 비가 쏟아졌다. 나보다 더 지호와 가깝게 지냈을 친구들이 목 놓아 울었다. 나도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터져나오는 눈물을 머금으며 알았다. 내 마음 한 켠에는 늘 지호가 있었다. 지인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 어쩌면 가장 많은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가끔 내 관계의 시작이었던 지호를 생각한다. 지호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된 관계들도 떠올린다. 후회를 묻힌 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다짐을 한다.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뻔한 소리지만, 내겐 도통 뻔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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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태국에 와 있습니다

태국 파타야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열리는 광고제에 좋은 기회로 참석하게 되었어요. 오늘은 이동하느라, 또 밀린 일을 하느라 새로운 곳에 왔다는 실감이 안 드는데요. 내일부터는 잘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찾아 돌아가서, 더 좋은 이야기를 쓰길 스스로 바라며...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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