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의 시작

내가 했던 연애를 세어보면 몇 안 된다.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내게 늘 엄청난 일이었다.

2026.04.02
from.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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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나의 시작들

 

 

Ep 4. 사랑의 시작

 

내가 했던 연애를 세어보면 몇 안 된다.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내게 늘 엄청난 일이었다. 사귀기 시작하면 아침에 일어나는 느낌이 달랐다. 때론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도 했다. 사랑을 자주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참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일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건지, 그 능력이 부럽기도 이해가 안 되기도 했다.

몇 안 되는 만큼, 나는 사랑 하나하나에 진심이었다. 마음이 만난 순간순간이 뚜렷한 시작으로 남아있다. 힘겹게 마음을 전하던 순간, 서로 알면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마음, 하염없이 기다렸던 시간들이 선명하게. 그래선지 늘 유난이었다. 누군가의 연인이 됐다는 게 너무 좋아서 주변에 티를 팍팍 냈고 애정을 아쉬움 없이 표현했다. 친구들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람 사이는 밀고 당기기가 잘 돼야 한다고. 당기기만 하면 상대는 금방 질려 떠날 거라고. 귀에 들어오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랑에 한해선 마음껏 기쁨을 표현하고 솔직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해관계가 끼어 머리를 쓰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사랑이 아닌 거라고까지 여겼다.

모든 만남에 에너지를 많이 썼다. 지금은 그 모든 관계들에 유통기한이 있었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이 통하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 것이기에, 변할 일도 끝날 일도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별은 찾아왔고 나는 두 세번 그걸 겪고서도 꼭 무너졌다. 끝나고 나면, 이별 통보를 받으면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기분에 완전히 탈진하곤 했다. 너무 붙잡고 싶지만 붙잡으려 하는 순간 더 멀리 떠나갈 것이기에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천천히 고통스럽게 실감했었다. 밥 먹기를 멈추기도 했다. 먹기를 멈추다보면 천천히, 밥 생각에 아픔이 밀려나기도 했으니까.

그러고보면 서른 일곱을 먹은 지금도, 그럴리가 없는데도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자주 느끼는 편이다. 소중히 여겼던 무언가가 변하거나 사라지는 걸 무서워하는 건데, 어린 날 상실의 기억들에서부터 비롯된 걸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고나면, 남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마음이 변한다는 게 내게 너무 힘든 일이어서인지 아픔만 남는 듯했다. 다시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는 힘 없는 다짐이나 몇 년이 걸리더라도 돌아오길 기다리겠다는 허황된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가장 친한 친구 준이는 “2주만 지나도 그런 생각 했다는 게 웃길걸”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2주가 마치 200일이라도 되는 듯 느껴졌고 시간이 지나도 그때 1년의 200일 정도는 그 2주에 살았던 것처럼 기억했다.

그렇게 밀도높은 시간을 살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마음을 쏟았다는 뜻이었다. 어린 날에 그만큼 많은 마음을 쏟으면, 안에는 확고한 무엇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그 힘겨웠던 사랑들 속에서 이런저런 가치관을 찾았고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처음 사귄 여자친구는 일찌감치 인디밴드의 매력을 알았다. 카세트 테이프로, CD로 밴드들을 소개해줬는데 난 순전히 그녀가 소개해줬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음악을 들었다. 안 좋아해도 좋아하려고 노력했고 어느새 덜 다듬어진 음색과 인간적인 서사를 가진 인디씬의 음악들을 내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부작용으로 괜히 대중적인 걸 싫어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게 지금까지도 남아 종종 내 발목을 붙잡지만.

또다른 여자친구는 남성들의 폭력적인 재단과 성적인 농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생에 다시 없을만한 분노를 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헤치며 여성을 대상화하는 풍토가 어떤 남성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꽤나 바람직하면서 완고한 여성관을 일찍이 갖게 되었다. 친구들에게 툭하면 ‘씹선비’라거나 ‘생긴 것과 다르게 여성스럽다’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지만.

약속 시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지킨 적 없는 여자친구도 있었다.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힘을 잃어갈 수 밖에 없는 관계도 있다는 걸 그녀는 몰랐던 것 같다. 둘 사이 있었던 수많은 갈등이 사실은 그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난 사소한 약속도 지킬 줄 아는 사람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여자친구는, 사람이 사랑에 진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누군가를 만나 사귄다는 것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고, 그저 즐긴다는 마음만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사랑을 말하는 문장에도 사랑이 전혀 담기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상대가 마음을 다 주더라도 그걸 가볍게 여길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마음을 준다는 건 엄청난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이성관이라던가 사랑에 대한 기준이라던가 그만큼 가치관이 쌓이니 잘 맞는 짝을 찾기 어려워진 건지 이후 한동안 연애를 못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거의 4, 5년 동안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소개팅을 여러번 했지만 잘 안 됐다. 내가 마음을 밀어낸 적도 있었지만 상대의 거절도 많이 받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내느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꼭 사랑을 찾고 싶었던 마음이라 고민이 많았다. 당시 MBTI가 유행했는데 내가 굉장히 드문 유형이라는 걸 듣고, 스스로가 문제인 줄 알고 절망에 빠져있기도 했다. 포기와 가까운 마음이 들 때쯤 아내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이해하기 어렵게도 아내 앞에서는 모든게 편했다. 내가 나다워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지난 사랑 얘기를 꺼내거나 내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어도 그걸로 날 재단하거나 실망하지 않는 사람. 내가 세워왔던 가치관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지금은 결혼한지 2년 반이 흘렀다. 어려움이나 갈등이 없는 건 물론 아니지만 전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흔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연애기간까지 합하면 아내와 만난 햇수는 5년 반인데, 가끔은 아내와의 시간이 그보다 훨씬 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러번의 사랑의 시작에서부터, 그 끝에는 아내가 있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지 않았으면 아내를 만나지 못했을 것 같다. 아니, 아내를 만나기 위해 그 길들을 걸어온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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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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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만개했습니다. 1년 중에 이런 순간이 있다는 게 참 아름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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