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 1: 나의 시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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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7. 상실의 시작
초등학생 때였나, 아파트 단지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형이 킥보드를 20분만 빌려달라고 했다. 곧 가져다주겠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고 빌려줬는데 30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그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더 서 있다 뭔가 잘못된 걸 느낀 나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했다. 킥보드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엄마 차를 타고 온 동네를 뒤졌다. 이미 어두워진 밤, 창 밖을 필사적으로 훑으며 킥보드를 빌려간 형이 있는지 살폈다. 그런걸 함부로 주면 어떡하냐며 나무라는 목소리에 풀이 죽어 속으로 울면서 빌었다. 제발 킥보드를 되찾게 해달라고. 찾기만 하면 착한 어린이가 되겠다고.
결국 킥보드는 찾지 못했다. 속상했던 마음이 진정됐던 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엄마가 별 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며 안심시켜줬을 때였다. 그때 나는 킥보드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슬펐지만, 잃어버렸기 때문에 엄마한테건 누구한테건 칠칠맞지 못한 애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게, 그래서 혼나게 되는 게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겨우겨우 쌓아온 착한 어린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킥보드를 잃어버렸지만, 사실은 내 안의 어떤 걸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마저 날 것 같았고.
나는 뭘 잘 잃어버리는 애였기 때문에, 많은 어린 날에, 나는 내 안의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상실이라고 하면 형을 떠올리게 된다. 형은 내가 10살 때 세상을 떠났다. 떠나기 전까지 형은 뛰어난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해 전교 등수로 성적을 말했다. 운동을 잘해 인기가 많았다. 끼가 많아서 아동 가요제에 나가기도 했다. 글을 잘 써서 툭하면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왔다. 형에 대한 숱한 주변의 칭찬 일부를 나는 나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형을 칭찬하면 나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형의 존재는 내게 자부심으로 남았다.
형을 잃었을 때 나는 내 안의 상당부분, 어쩌면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많은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형의 장례식장에서 목놓아 울 때, 더이상 형이 없는 방에 들어설 때 느꼈던 슬픔과 허전함은 10년의 인생동안 날 지탱해줬던 존재에 대한 총체적인 마음이었다. 그 중에서도 형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자부심은 정말이지 통째로 없어져버려, 어린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더이상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뛰어난 형의 동생이라고 해서 나도 뛰어났던 건 아녔다. 난 원래 형처럼 총명하지 못했고 형처럼 친구가 많지도 않았다. 글쓰기라던가 노래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형을 잃고 나서 전보다 훨씬 휘청이기 시작했다. 수년이 흘러 더이상 형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가라앉지는 않게 된 후에도 똑같았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생이 되면서도 난 형이 떠나기 전보다 어설픈 쪽에 속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형제라도 형은 형이고 나는 나인데 말이다.
삼십이 넘어 본 수학자 허준이 교수의 강연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감의 근거란 너무나 쉽게 힘을 잃고 없어질 수 있는 거여서, 근거 없이도 자신감을 갖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은 자신감이 있어야 나설 수 있고, 나서야만 얻을 수 있는 성취들이 많기 때문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감의 근거를 만들기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다.
돌아보면 그건 사실인 것 같았다. 살면서 뭐든 알 것 같을 때가 있었다. 그럴때는 정말이지 뭘 해도 될 것 같았고 실제로 타율도 높았다.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때가 있었다. 그때는 뭘 해도 안 될 것 같았고 실제로도 잘 안 됐다. 자신감이라는 건 그 자체로 발휘하는 힘이 있는 듯했다. 슬프게도 형의 죽음 이후 나는 자신감이 없는 쪽에 더 가까웠다. 형이 있을 때는 그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졌던 자부심, 그러니까 근거가 부족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없어진 나는 활발한 사람에서 내향적인 사람으로, 적극적인 사람에서 소극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자신감 넘치는 상태란 내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시간이었다. 꼭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게 있지 않으면, 자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근거없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그걸 되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근거 없이도 자신감이 넘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형이 떠난 이후 나는 나를 잘 자랑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감을 억지로 찾고자 노력하는 건 그만두려고 한다. 다만 내 머릿 속을 계속 채우는 건 이런 생각이다.
아주 어릴 때 겪은 상실이라도, 그때 정말로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는 10년, 20년, 혹은 평생을 통해 알게 되기도 한다. 나는 20년이 넘어서야 알았다. 형을 잃은 게 다가 아니라, 형 덕분에 내 것이었던 무언가를 잃었다는 걸. 형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궁금하다. 형이 살아있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됐을까. 더 나섰을까, 더 웃었을까. 아니면 어차피 이 정도였을까. 답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형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나는 아직 그걸 대체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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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장 중

출장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와 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마음이 너그러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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