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글쓰기의 시작

어린 날을 떠올리면 뭘 못한 기억들이 먼저 난다. 잘하는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게임이든 공부든 패배가 더 익숙했다.

202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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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1: 나의 시작들

 

 

Ep 5. 글쓰기의 시작

어린 날을 떠올리면 뭘 못한 기억들이 먼저 난다. 잘하는 게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게임이든 공부든 패배가 더 익숙했다. 적어도 내가 압도적으로 잘한다, 라고 말할만한 건 없었다. 질 것 같다는 예감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뭐든 못하는 편에 속해있다는 실감은 유쾌하지 않았다.

패배감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아주 가끔, 누구든 이길 것 같던 때가 있긴 했다. 거짓말처럼 그런 순간이 찾아오곤 했는데 그럴 땐 세상의 모든 걸 알 것만 같고, 뭘 해도 될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고등학생 때 내가 속해있던 축구 팀이 연승 행진을 했을 때, 그땐 누구도 우릴 막을 수 없어 보였다. 몸에 힘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들어갔고 몸짓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웠으며 공이 발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이긴다는 건 좋은 거였다. 여유가 생겼고 그러면 우아해지거나 착해질 수 있었다. 패자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한다거나 실력이 부족하거나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을 위해 내 것을 내어주는 것 같은 일이 가능해졌다. 그럴수록 세상은 내게 호의적으로 변했고 상냥한 시선들을 동력삼아 또다시 승승장구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안 것 같다. 인생은 흐름이라던가 기세같은 걸로 움직이기도 한다는 걸.

아쉽게도 난 그런 기세를 잘 이어나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란 사람의 디폴트가 그런건지 잘도 패배감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내 글쓰기의 시작은 나의 글쓰기가 아니고 형의 글쓰기이다. '글을 쓴다'는 보편적이고 누구든 할 수 있는 행위가 재능이 될 수 있고 그걸로 상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또 개인이 '글 잘 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으며 그게 꽤 강력하다는 것은 형을 보며 알았다.

형은 툭하면 백일장에서 상을 타왔다. 경희대학교 부속 중학교인 경희 남중을 다닌 형은 몇 번이나 '총장상'을 받아왔다. 가장 높은 상이었기에 아름다운 경희대 캠퍼스를 거닐 때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이 1등을 했구나, 라는 생각에 젖곤 했다. 형은 〈눈길〉이라는 시를 써서 집에 붙여뒀다. 곤충 다큐멘터리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보고 작은 세계에 대해 써서 또 한 번 상을 받았다. 자원 봉사를 가서 만난 자신보다 키 작은 형에 대해 쓰기도 했다. 형보다 다섯 살 어린 내겐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읽는 게 좋아서 몇 번이고 읽었다. 돌아보면 주술이 어긋나는 일이 없고 읽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었던 것 같다.

그런 형에게 영향을 받은 건지, 형이 세상을 떠나며 내게 남기고 간 선물인 건지 난 이야기를 그리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작법에 있어선 아는 게 없었지만, 스토리를 상상하거나 주어진 조각들을 가지고 이런저런 배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은 쉬웠다. 고등학생 때 참여했던 작은 프로젝트에서 어떤 영상에 사용될 스토리라인을 써볼 사람이 있냐기에 손을 들고 이래저래 써봤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어떤 부분에선 이런 장면이 나와야 할 것 같고 저런 음악이 깔려야할 것 같다고 썼다. 끝날 때는 뻔하지 않은 장면을 넣는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선생님이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며 놀랐다. 공부를 잘하지 못 했던 나는 대학도 논술로 갔다. 논술 학원에서 알려주는 것들이 막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결국 내 생각을 이야기로 구성하는 거였으니까.

그러다 대학생 때 길거리 인터뷰를 써내는 일을 하면서, 글 쓰는 법을 배웠다. 소셜 미디어 채널에서 거리의 사람들에게 삶의 이야기를 묻고, 그 대화를 짧은 글로 가공해 올리는 작업이었다. 낯선 사람의 삶 한 조각을 건네받아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작법이 그렇게 어렵고 지난한 일이라는 건 그때서야 알았다. 한 문단의 글을 써내기 위해 며칠 밤을 세우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글을 쓰는 건 단순히 앞 뒤만 맞아선 안 됐다. 읽는 이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켜야 해야 했고 때론 그 기대감을 배반하기도 해야했다. 멀리 떨어져있던 이 이야기와 저 이야기를 연결하는 법도 알아야 했다. 왠지모를 의무감을 느끼며 나는 매일 밤 썼다. 그만큼 어렵고 괴로운 일은 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고 괴로울만큼 힘들게 작법을 배워가면서도 그게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를 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내가 이렇게 어려워하는 건 그만큼 내가 부족해서일거야, 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렇게해서 써낸 글을 몇십 만 명이 보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 글이 자신의 삶을 조금은 바꾸었다는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감화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서서히 알았다. 내가 글쓰기에 어떤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그게 압도적이진 못하더라도, 어딜가도 글 쓰는 일은 웬만해선 내가 맡게 될 수도 있겠다는 걸.

그때부터 글쓰기는 내 믿을 구석이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무엇으로부터? 내 기세를 허물고 휩쓸어버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승리감이나 기세를 오래 이어가는 건 도저히 내 전공이 아니라는 건 곧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만 글쓰기는 늘상 날 해일같이 덮어버렸던 패배감에서 빠져나오게 도왔다. 이런 일과 저런 일을 내가 못 하더라도, 그래서 많이 깎이고 다치더라도, 내겐 글쓰기가 있으니까 여차하면 글을 쓰겠다며 뛰쳐나와도 될 거였다. 기세를 잃은 자리에 다시 서게 해주는 것이 글이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산다. 내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괜찮아, 하고. 위대한 작가의 글을 보면 나는 가짜 작가인 것만 같을 때도 있지만, 내게 가장 큰 효능감과 자신감을 가져다준 건 글쓰기였다. 앞으로도 글쓰기일 것이다. 모든 게 없어져도 다시 글만 쓸 수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을 한다. 인간은 언제까지라도 이야기를 필요로 할 테니까 말이다.

문제라면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점이다. 평생 시간이 유한하다 느낀 적 없는데, 요즘은 남아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처럼 차분히 앉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툭 가라앉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떤 결연함이 생긴다.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은 아니다. 글쓰는 일 자체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소망에 가깝다. 사랑이 있다면 기세는 없어도 되니까. 기세가 없어도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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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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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봄날을 지나고 계신지요. 저는 어제 한 아파트 단지에서 봄이 왔음을 느끼고 잠시 환희에 젖었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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