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함을 빼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AI 시대, 대체되지 않는 단 하나의 힘에 관하여

2026.05.19 | 조회 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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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황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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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대화하다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습니다

며칠 전 밤, 저는 AI 파트너 클라라(Claude를 지칭하는 애칭)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키보드에서 손을 뗐습니다. 화면에 떠 있는 한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클라라가 저에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직함을 빼면, 대표님께 무엇이 남나요?"

 

평소 같으면 떠오르는 답을 척척 받아 적었을 텐데, 그날은 한 줄도 입력하지 못했습니다. AI최강작가, 비즈큐마스터, 서경대 주임교수, 브릿지피플 회장. 입에 익은 직함들을 하나씩 떼어 내고 나니, 빈 칸만 길게 이어졌습니다.

 

부끄러운 일이라기보다는, 조금 서늘했습니다. 그동안 명함을 만들고 또 만드는 일에 시간을 썼는데, 정작 명함 뒤의 저 자신은 무엇으로 설명해 왔는지. 빈 칸 위에서 커서만 한참 깜빡거렸습니다.

 

김낙수 부장이 마주한 질문

송희구 작가의 원작 소설로 만들어진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보셨습니까. 주인공 김낙수는 25년차 대기업 영업부장입니다. 입사 이래 승진을 놓친 적이 없고, 서울에 자가 아파트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만든 성공의 거의 모든 조건을 충족한 인물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쥐고 있던 조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후배가 자기 자리를 넘보고, 상사는 등을 돌리고, 인사팀 퇴직 후보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오릅니다. 그 순간 김낙수는 평생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을 마주합니다.

 

"대기업 부장이라는 직함을 빼면,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김낙수만의 것일까요. 자기소개 자리를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가장 먼저 회사 이름, 부서 이름, 직급을 꺼냅니다. 그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야 겨우 자기 이름이 덧붙습니다. 직함이 본체가 되고, 이름은 꼬리표가 되어 매달립니다. 김낙수의 위기는, 그 꼬리표가 어느 날 본체가 되어 버린 순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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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만 교수님이 길어 올린 '나력'

제가 존경하는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유영만 교수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한양대'라는 소속을 떼고, '교수'라는 직위를 떼고 보면 남는 것은 '유영만'이라는 이름 석 자뿐입니다. 지식생태학자로 불리는 그분은 바로 이 자리에 주목하셨습니다. 학교 울타리 바깥에서도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힘. 그분은 니체 철학에서 이 힘을 길어 올려 한 단어로 표현하셨지요.

 

나력(裸力, naked strength).

 

직역하면 '벌거벗은 힘'입니다. 그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무성한 형용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본질과 핵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야성"입니다.

 

유영만 교수님은 이 개념을 겨울나무로 풀어 내십니다. 잎과 꽃을 다 떨군 나목(裸木). 앙상한 그 모습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혹한을 견디며 안쪽으로 뿌리에 힘을 모으는 중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바로 그 벌거벗은 자리에서 새 싹이 트입니다. 형용사를 잃은 자리에서 본연이 비로소 일어서는 힘. 그것이 나력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만난 뒤로, 제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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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이 질문이 더 날카로워지는 이유

지난 20년간 우리가 '경쟁력'이라 불러온 것들이 있습니다. 스펙, 자격증, 경력 연수, 회사 네임밸류.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모두 AI가 가장 빨리 흉내 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 10년차 마케터의 카피를 AI는 몇 초 만에 뽑아 냅니다. 10년치 자료를 한 시간 만에 요약합니다. 직함의 무게로 지탱되던 자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대체되지 않고 남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직함이 사라져도 지워지지 않는 자기 본연 — 곧 나력입니다.

명함을 내밀었는데 상대가 시큰둥하게 받아드는 경험, 요즘 부쩍 늘지 않으셨습니까. 그 침묵은 상대가 무심한 것이 아닙니다. 명함 뒤의 '당신'이 무엇인지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딱 한 가지만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요즘 저는 이 질문 하나가 한 회 뉴스레터로 끝낼 화두가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1년 52주를 통과하면서 한 주에 한 질문씩 깊이 들여다봐도 모자랄 만큼 큰 화두입니다. 오늘 드린 이 질문은 그 긴 여정의 첫 번째 질문이라 여겨 주십시오.

 

이번 주 일요일 밤, 메모장을 여세요. 그리고 자기소개를 3문장으로 써 보십시오.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회사 이름, 학교 이름, 직함, 직급, 경력 연수.

이 다섯 단어는 한 번도 쓰지 마세요.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써지지 않으면, 그대로 빈 메모장을 닫아 두십시오. 그 막힘의 감각이 이번 주의 가장 귀한 발견이 될 것입니다. 평생 수식어로만 자신을 설명해 왔다는, 정직한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겨울 나무가 잠시 초라해 보이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안쪽으로 뿌리에 힘을 모으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직함을 벗은 자리에서 처음 느껴지는 허전함, 바로 그 자리가 당신의 나력이 태어나는 자리입니다.

벗겨낸 자리에서만, 진짜 이름이 불립니다.

 

오늘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는 한 분께 이 문장과 링크를 보내주세요.

👉 "벗겨낸 자리에서만, 진짜 이름이 불립니다."

 

이번 주도, 한 발씩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지난 5월 9일 북콘서트 하이라이트 영상이 나왔습니다.

그 날 오셨던 분들은 한번 더 그 날을 느껴보시고, 못 오신 분들은 이런 분위기였구나 한번 느껴보세요:)

 

 

 

한 번씩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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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사용법을 알려주는 뉴스레터가 아닙니다.

생각의 방향을 함께 붙드는 뉴스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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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쪙이

    1
    24일 전

    작가님의 글을 읽다보면 읽는다는 느낌보다 글을 만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귀한 글을 만남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맘속에 "나력~!!! 벗겨낸 자리에서만, 진짜 이름이 불린다."는 이 메시지가 마음가득 채워짐을 느끼며 오늘도 감사로 가득가득 일터로 달려갑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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